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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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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연구의 큰 별이 떨어지다

등록 2005-01-19 15:00 수정 2020-05-02 19:24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격동의 현대사에 온몸을 내던진 뒤 살아남아 그 도리를 다한 ‘김남식 선생’이 남겨놓고 간 것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지난 1월7일 김남식 선생이 돌아가셨다.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통일 문제나 북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해온 사람들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분이다. 그분의 빈소에 후학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면서 이런저런 옛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남에서 북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에 대한 변천사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게 없던 북한연구

북괴, 지금은 들어보기 힘든 말이 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을 ‘북괴’라 하지 않고 북한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용기가 필요했다. 용례가 가장 풍부하다는 <우리말 큰사전>에도 올라있지 않은 말로 우리는 제 동포의 절반을 불러왔다. 1980년대 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막 일어날 무렵, 어느 한국문학 교수는 ‘북괴’라는 말을 “제 민족을 가리키는 말 중에 가장 고약하고 야비한 말”이라고 했다. 다른 것은 다 해도 통일만은 않겠다는 뜻이 똘똘 뭉친 용어가 북괴라는 것이다. 북괴는 그저 때려잡고 쳐부수고 무찔러야 할 그런 대상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 일간지가 흥미 있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북과 미국, 북과 일본, 북과 소련이 축구 경기를 할 경우 어느 팀을 응원하겠냐는 것이었다. 결과는 북-미 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북-일, 북-소의 경기까지 모두 북의 상대 팀을 응원하겠다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북-일간의 경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민족인 북을 제쳐두고, 우리에게 큰 불행을 안겨주었던 일본을 응원하겠다고 나선 것은 분명 반공의식이 민족의식을 압도한 결과였다. 그리고 같은 공산권인 북-소간의 경기에서 소련을 응원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반공의식의 핵심은 바로 반북의식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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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연구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단일 주제로는 아마도 가장 많은 연구 논문과 저서가 쏟아져나온 분야일 것이다. 1963년부터 1994년까지 나온 석·박사 학위 논문만 해도 1천편이 넘고, 분단 이후 1986년까지 발간된 단행본이나 논문이 3천건에 가까우니 이만큼 많은 연구 결과물이 나온 분야는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건 없다는 점이다. 그 3천건 중에 독자적인 학술적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논문이 100건이 넘을까? 사실 북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을 둘러싼 문제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변수가 된 200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세대의 대표주자 격인 이종석, 서동만 등이 정부에서 활약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적 역사에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은 복사의 시대였고, 1980년대 중반은 번역의 시대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의 같은 책이 해적판으로 돌았는데, 험한 시대이다 보니 학생운동 출신의 영인본업자는 책표지를 떡하니 로 바꿔 출판했다. 꼭 이 책 제목 탓은 아니었겠지만, 한국 사학계 내에는 우리가 흔히 민족주의자라 부르는 사람은 사실 친일파 내지는 타협파였고,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짜 민족주의자였으며, 민족을 초월한 진짜 공산주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나도 1986년에 버클리대학의 스칼라피노 교수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이정식 교수가 같이 쓴 의 1부 ‘운동 편’을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란 제목을 달아 3권으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대숙의 책도 원래의 제목을 회복하여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한겨레21> 2001년 10월24일치 제381호를 참조)이 아니라고 사실대로 써놓은 두 책은 출판사 사장이 잡혀가는 정도의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금지도서 목록에는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넘어 넘어’, 그리고 또 ‘넘어’…

미국 유학 시절 한 세미나에서 를 갖고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미국 학생들은 이 책이 너무 보수적·반공적이라고 비판한 반면, 진보적인 얘기를 많이 하던 나는 열심히 이 책을 옹호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번역자인 내가 이 책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좋게 얘기한 것은 단순히 번역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에 가기 이전까지 내가 국내에서 읽은 책들 중에서 이 책만큼 ‘객관적’으로 쓰인 책도 없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김일성의 실체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북에 대해서도 <로동신문>이나 <근로자> 등 원사료를 충실히 이용하면서 북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있었다. 반공의 본산 미국의 보수적인 대학원생들이 너무 보수적이고 1950년대식의 전체주의 연구방법론의 시각에서 북을 다루었다고 비판하는 책이, 198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금지도서요,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최일선에 서서 정신없이 지내던 내게는 상대적으로 좋은 책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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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남쪽에서 북과 관련된 최대의 베스트셀러는 <분단을 뛰어넘어>였다. 그 시절 참 넘어야 할 것도 많았다. 1980년대의 질풍노도의 시대를 연 책이 광주의 학살과 저항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였고, 그 책을 줄여서 ‘넘어 넘어’라 불렀는데 또 ‘넘어’가 나왔으니 말이다. <분단을 뛰어넘어>는 1983년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하던 선우학원·최익환·양은식·전순태 선생 등 교수, 사업가 등이 처음으로 북을 방문한 뒤, 이듬해인 1984년에 펴낸 고향 방문기였다. 동포 사회에서 화제를 불러온 이 책이 국내에 들어와 복사본으로 돌다가 출판된 것이다. 북에 대한 글이라곤 악의로 가득 찬 반공 서적 외에는 볼 수 없었던 우리 세대에게, 미국에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해온 이산가족 출신 해외 동포들의 고향 방문기는 그야말로 충격과 감동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직선제 선거에서 민주 진영은 분열되고 노태우가 당선됐다. “죽 쒀서 개 줬다”란 말이 이때처럼 실감난 적도 또 없었다. 개가 죽 먹는 동안이었는지는 몰라도, 서울 올림픽을 치른 1988년은 아마 해방 직후를 빼곤 단군 이래 최대의 언론 자유를 누린 시기였다. 충분하진 않았지만,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얻어낸 새로운 열린 공간에서 이제 통일운동이 대중 속에서 시작됐다. 당시 통일운동의 주된 과제는 ‘북한 바로알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북한 바로알기 운동’에서 손꼽히는 강사는 몇명 안 되었는데, 사람이 없다 보니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바닥이 좁다 보니 강사들끼리 다 잘 아는 사이였고, 가끔씩 밥도 같이 먹으며 안부도 묻고 나름대로 정보도 교환했다. 사실 그때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끼리 제일 궁금했던 것은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괜찮은지였다. 서로 무슨 얘기 어떤 식으로 했느냐고 묻다가 “그런 얘기 하고도 안 잡혀가? 요새 안기부는 뭐 하냐?” 하며 까불기도 했고, ‘아, 저 정도까지는 얘기해도 되는 건가’ 하고 수위를 조절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는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나, 이를 단속하는 기관원들이나 새로운 상황에서 기준을 상실한 그런 시기였다. ‘물태우’ 별명을 얻은 노태우가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뒤, ‘날 물로 보지 마’라며 공안정국을 불러온 1989년 봄이 올 때까지는.
당시의 상황에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은 필연적인 요구였으나, 이를 감당할 만한 역량은 사실 준비돼 있지 않았다. 나를 포함하여 그때 잘나가던 강사들도 어디서 제대로 북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었다. 북에 대해 독학으로라도 공부하고 싶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이란, 읽고 있으면 이런 책 계속 읽어야 하나 하고 처량한 생각이 들 정도의 한심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이야 연구자들이 북에서 나온 책들을 비교적 쉽게 구해서 읽어볼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책을 번역하면서 이정식 선생 소개로 안정적으로 북쪽 자료를 볼 수 있었지만, 북쪽 자료를 갖고 있는 기관조차 많지 않았다. 통일원만 하더라도 1960년대 이전 자료는 거의 없었다. 한 1년쯤 학보 같은 데다 조각글 쓰고 났더니 그나마 책 번역하면서 공부한 것은 다 바닥이 났다.

남파됐다가 전향했던 비운의 인생

김남식 선생은 1980년대 후반 실천운동의 차원에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처음 벌어지고, 또 젊은 연구자들이 북을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삼기 시작할 무렵 등대가 되어주신 분이었다. 선생은 일제 말기에 민족해방 운동에 투신하셨고, 해방 이후에도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분이다. 1960년대 중반 남파됐다가 검거된 후 전향하여 기관쪽 일을 많이 보았다. 그러면서도 <북한총감>(1968), <실록 남로당>(1974), <남로당연구자료집>(1974) 등의 책을 펴냈다. <실록 남로당>은 선생이 신문에 연재한 것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으로, 1970년대라는 시대적 제약과 신문 연재라는 형식적 제약이 겹친 것이었는데, 이를 손보아 1984년에 <남로당연구>라는 제목으로 자료집과 함께 재출간을 했는데, 마침 내가 이정식ㆍ스칼라피노 두 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출간하기로 하고 번역하고 있던 곳과 같은 출판사라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 뒤 출판사에 있던 선배의 ‘명령’으로- 사실은 모 운동단체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를 기획하게 되었다. 당시는 워낙 자료가 부족했던 시대라 온갖 부지런을 떨며 현대사 자료를 모았는데, 좌익 자료도 일부 있었지만 주로 우익·중도 자료였는데, 김남식 선생은 해방 이후의 귀중한 자료들을 많이 보관하고 계셨다. 선생이 모아놓은 자료와 내가 모아둔 자료를 합쳐보니 두꺼운 자료집으로 15권 분량이 되었다. 선생이 아니었다면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등 희귀 자료들은 연구자들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선생을 모시고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 편집을 한 덕에 다른 젊은 연구자들보다 일찍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참 막힘이 없는 분이셨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어 여쭤보면 “아, 그건 말이야”하 면서 특유의 손짓을 하며 즐겁게 설명해주셨다. 현대사의 굴곡이 온몸에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지라 정식으로 대학 강단에 서실 수 없었지만, 선생은 북한연구의 길에 갓 들어선 젊은 연구자들에게 나침반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셨다. 지금 대학에서 현대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공부를 시작하던 1980년대에는 어디서도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1880년대 개화파 청년들이 백의정승 유대치의 약방을 드나들며 가르침을 받았듯이, 1980년대의 현대사 연구와 북한 바로알기에 나선 젊은 연구자, 활동가들에게 선생은 백의정승 유대치와도 같은 존재였다. 1990년대 이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시작된 북에 대한 연구를 주도한 젊은 연구자들 중에 그의 학은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언젠가 글을 하나 틀리게 썼다가 선생의 눈에 띄어 책방에서 우연히 뵈었을 때 1시간가량 노상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1986년 ‘김일성 사망’ 보도의 정곡을 찔러

1986년에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모든 신문이 주먹만 한 활자로 ‘김일성 사망’을 1면 톱으로 뽑았는데, <중앙일보>만 ‘설’이라는 한 글자를 더 써서 망신을 덜 당했다. 대한민국의 북한 전문가란 사람들은 모두 김일성 사망의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을 내놓았고, 몇몇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김일성이 죽는 장면을 보기라도 한 듯 오버에 오버를 거듭했다. 그때 신중하게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것 같지 않고, 또 설혹 사망했다 하더라도 북이 저런 식의 반응을 보일 리 없다는 태도를 보인 전문가는 내 기억으로는 선생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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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에 온몸을 내던졌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분인 김남식 선생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남은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그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옛 벗들의 사랑과 열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남쪽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1960년대 중반부터 그는 처음에는 노예의 언어로나마 자료를 남기고 기록을 해두셨고, 노년에는 주인의 언어로 젊은 날의 꿈을 새로운 현실 속에 이어갔다.
실천운동으로서의 북한 바로알기 운동과 학문적 차원에서 진행된 북에 대한 연구는 중첩된 영역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성격과 독자나 청중이 기본적으로 다른 일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두 일이 분화되지 않은 채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북을 연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당하게 주사파 취급을 받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1980년대 말에는 북을 연구하겠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다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소련이 넘어지자, 유행처럼 몰려들었던 연구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김일성 주석이 세상을 뜨자마자 북에는 자연재해가 몰아닥쳤고, 사람들은 굶어죽어갔다. 북을 다룬 어떤 논문의 제목은 ‘3분에서 3년까지’였다. 북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시간 문제일 뿐인데, 지금 당장 북의 체제 붕괴 소식이 들려와도 하나 이상할 것 없고 잘 버텨야 3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북은 예상을 뒤엎고 살아남았다. 서방이나 남쪽의 언론매체들은 자주 이북이 너무나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럽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북의 진짜 문제는 북이 너무나 예측 가능하다는 점이다.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 시기에 확립된 북쪽 지도자들의 기본적인 정책 방향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 김일성이 한 연설문의 전문은 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에 아직도 종종 실려 오늘날의 북한 주민들에게 지침으로 제시되고 있다. 서방 세계에서는 이미 설득력을 상실한 ‘전체주의 이론’은 아직도 탈냉전 이후 서방의 북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북에 대한 이런 판에 박힌 인식은 외부 사람들이 북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북의 핵개발을 둘러싼 의혹이 고조됐을 당시에도 서방의 정책 결정자들과 관찰자들은 북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북을 보고 새삼스럽게 ‘벼랑 끝 전술’ 운운하지만, 북은 한국전쟁 이래 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지진해일 성금액, 북에는 민망하다

남에게 북은 늘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런 이미지는 갑자기 변해버렸다. 무서운 존재에서 통일되면 거지떼가 되어 몰려올지 모를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러니 늑대 팔아먹으며- 학계에서는 ‘적대적 의존’이라 부른다- 살아온 수구세력의 서식 환경은 자꾸 파괴되는 것이다. 북에 대한 또 하나의 정형화된 사고는 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고집하는 일이다. 이는 생각보다 뿌리 깊은데, 서구에서는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공산 체제를 바라볼 때 나타난다. 동구가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진 이론인데, 북이 살아남은 탓인지 한반도 남쪽에서는 여전히 건재하다.
과연 북은 변하지 않았는가? 개성공단 문제를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려던 나진선봉지구가 실패했다. 중국 자본을 유치하려던 신의주 특구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개성에서는 평야지대에 배치된 최정예 부대를 빼고 공단을 제공했다. 북의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때 엄청난 대가를 지급하고 그나마 얻은 땅이다. 그런데 겨우 냄비를 생산했다. 교회 나간다면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장대하리라”는 성경 말씀으로 위로라도 해보겠지만, 성경과 담쌓은 공산주의자 동포들에게는 민망할 따름이다. 만날 삽질하는 사병 수를 ‘몰래’- <조선일보>의 허가를 받지 않고(?)- 9천명 줄였다고 난리치는 우리나라는 과연 남북 관계에서 북이 변한 만큼 변한 것일까? 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에 정부가 5천만달러 지원을 약속하고 어쩌면 총액 1억달러를 복구비로 지원하게 되리라는 보도가 있었다. 잘한 일이다. 그런데 제발 그 소식이 가족 중에 누군가가 굶어죽어간 북녘 동포에게는 전해지지 말았으면 한다. 수구세력이 ‘퍼주기’라고 거품을 물던 대북 식량 지원 총액이 얼마던가? 생각하기조차 민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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