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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류의 방향타를 잡아라

등록 2004-09-15 15:00 수정 2020-05-02 19:23

[학술- 다시, 동아시아!]

21세기 동아시아의 문화 선택 한류, 과연 패착이 아니었음을 입증할 수 있을까

▣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 중어중국학

2001년부터 한류를 진단해왔지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두 가지. ‘한류의 실재’와 ‘한류의 지속화 방안’이 그것이다.
우선 한류의 존재 문제. 삼성전자의 한류기획이 적중했던, 대만문화산업자본이 대륙을 겨냥해 중역된 문화상품을 제조해낸 결과이던, 최근 동남아와 일본의 한류 열풍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어렵사리 연 점포, 한류

양상은 물론 다르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사회주의 해체 이후 급속한 자본화 과정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도기적 대행을 한류가 수행하는 것이라면, 동남아의 경우는 할리우드의 스타 시스템이 한류라는 문화적 근접성에 의해 지분을 양보한 상황, 그만큼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장에 따라 반주변부 문화가 형성되고, 그것이 문화산업 자본의 세계분할 구도에서 한뼘 땅이나마 확보해낸 그런 신자유주의의 하위 체제화돼가는 과정의 드러난 양상이라고 하겠다. 일본의 경우 ‘욘사마’ ‘한류 4천왕’으로 난리법석이지만, 정작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일류 현상은 깊게 뿌리내려 있으며, 일본의 문화산업 현지화 체계인 아이돌 시스템이 정확히 작동,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현실은 어떤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이렇게 가닥을 잡고 보면 결국 한류란 우리가 식민지, 분단, 파행적 자본의 세월을 견뎌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가까스로 수직이동, 중심부의 배제와 착취의 논리를 피눈물로 익히며 자본의 세계화라는 각축 속에서 겨우 따낸 상가입주권, 세계 문화시장이라는 쇼핑몰에 어렵사리 연 작은 점포, 혹은 방금 찍은 명함 한장에 다름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점포를 열었으니 미숙하기 짝이 없는데다 한푼이 아쉬워 행상 수준으로 들고 뛸 수밖에 없는 수준, 안타깝지만 그것이 우리 한류의 현주소인 것이다.

두 번째 한류의 지속화 방안. 그러나 그나마 여기까지 오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한류의 물줄기를 어떻게 하면 강하게 혹은 제대로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두 가지의 대응을 요한다. 한류를 문화산업으로 지속 강화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과 진정한 한류의 활성화 방안. 전자의 경우 자원의 부재와 우리 경제의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우리 사회 전체가 혈안이 되어 있는 만큼 긴급 사안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차대할수록 진정한 한류의 방향타를 잡는 것을 통해서만 그 올바른 해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최근 한류는 필리핀까지 확산을 이루는 한편으로, 중국과 대만에서는 한류 스타들이 인기와 돈벌이에만 연연한다는 비판 속에 그 파고가 잦아드는 추세이다. 진정한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경제논리와 기능적 대처로 문화산업 규모 늘리기에만 급급, 한류의 계기성을 오히려 상실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따라서 한류의 정면과 반면을 제대로 짚고 이후 행보를 해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21세기 문화적 관계망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가 주도하고 있다. 한류란 이들 거대 문화자본이 기획·조직하는 문화산업 버전인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변부적 비판성이 나름의 문화적 해석력과 창신력으로 생동, 그것이 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강력한 방어 기제로 현상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식민지와 분단의 아픔이 한 세기를 넘는 그 억압과 긴장의 세월, 그것을 파행적 자본화의 그늘로 겪어내면서 우리는 어느새 현상 타파의 의지를 삶의 진작 방식으로 체화하게 되었고, 역사의 갈림길을 정면돌파와 ‘기우뚱한 균형’의 관계성으로 열어가는 변방적 삶의 방법론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작금에 동아시아를 관류하는 한류 또한 그 역동적 삶의 형질을 어떤 형태로든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

다종다양한 표출이 중요하다

이 베이징과 도쿄 공연에서 받은, 독일 작품이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 녹여 희망의 불씨로 피워낸 그 문화 창신력이야말로 한류의 진수이며 한국 문화의 정수라는 격찬. 그처럼 우리에게는 식민지·분단의 참혹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침략 문화의 창궐 속에서도 그 핵질만을 골라 우리의 생산적 문화형질과 절합해내고 전화해낸 창조적 중역성, 아름다운 관계 지향의 문화동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월드컵의 문화활력, 촛불시위의 순정, 위기 국면마다 도저하게 뿜어져나오는 현상 타파의 민중 저력과 저항문화, 발랄한 인터넷 쌍방향성 문화 등. 중국에서의 또 다른 한류 흐름은 바로 이러한 질곡을 희망으로 전화해내는 부단한 창조적 동력에 자극받은 바 크거니와, 우리 사회의 각성 정도와 문화적 열기, 그 ‘새뚝이’(기존의 장벽을 허물고 새 장을 여는 사람) 근성과 맘판의 문화는 중국 사회에 한국 배우기의 새로운 한류 기운을 조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 쿼터. 최근 2, 3년 동안 유럽 등 해외 중요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가 올린 개가는 비단 그 작품성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미국 할리우드의 문화 압력에 강고하게 버텨내면서 영화의 한 수준을 만들어낸 한편, 세계 문화 다양성의 보루이자 희망으로 부상한 실천적 결과이다. 이라크 참전이라는 우리 사회의 반면이 세계를 실망케 했지만, 그러나 칸쿤 반세계화 투쟁의 승전보가 입증하듯 한국은 반세계화 투쟁의 중요한 거점이며, 정보인권운동은 세계진보운동의 방향타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다. 한류는 십대 가수와 TV 드라마 등 상업적 대중문화가 주종을 이루며 동아시아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는 바, 미디어매체와 교통의 발달 그리고 반주변부의 경제력, 무엇보다 문화의 세계화 논리는 국경넘기의 공간 장벽과 장구한 세월을 간단히 뛰어넘게 함으로써 한류의 흐름은 가속화될 수 있었다. 상업적 트렌디 드라마지만 거기서 한국적 삶의 자락들을 볼 수 있었다는 대만 학자의 말처럼 그 누추하고 비리한 삶의 체현들은 어떻게 동아시아로 흘러들 수 있었을까. 이는 각기 조건에서의 선택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각국의 역사적 현실과 문화조건 속에서 문화적 근접성이고 문화적 패권이던 한류는 지금 동아시아가 행한 문화적 선택인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 한류의 동아시아적 회통이라는 현재적 광경이 중요하다. 눈물을 쥐어짜는 애정극이라도 주변국 사람들이 거기에 자신의 오늘을 비추고, 그러다 괜찮은 영화 한편 속에서 동아시아적 과거와 오늘의 삶이 갖는 문제의 보편성에 공감하기도 하고, 어느새 문제의 심연에 이르러 같은 곳을 바라보는 그 새로운 관계의 정향(定向), 함께 길 위에 서는, 한류란 그렇게 다종다양하고 중층적 표출로 인해 오히려 곶감씨처럼 단단한 희망의 씨앗으로 여물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네티즌의 소통, 한류의 진정한 힘

또 있다. 한류의 진정한 힘. 그것은 다름 아닌 네티즌들의 발랄한 소통이 새로운 정감적 진지를 만들어내는 그 지점에 있다. 부단한 퍼나르기와 답글 달기, 한류 스타들의 팬페이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교감과 문화적 체감들. 그것은 소비적 분비물의 성격이 아직은 강하다. 그러나 그 무정형의 문화횡단 속에는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의 작위와 음모와 조작의 간극을 갈라쳐 흐르는 어떤 기운이 만들어지고 있다. 국가간의 의도적 경계를 타고 넘는 문화적 경락이라고 할, 틈새를 흐르는 물의 기운. 그것이 어쩌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성을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낮은 수준에서는 대중문화의 발랄한 문화횡단에서 세계사의 전진을 이끄는 아름다운 결단과 동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드는 세계적 관계망은 이제 ‘진정한 한류’라는 이름으로 다시 정재돼야 할 것이다. 한류가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 지향의 고리들, 그 자발적 구조화에 의한 확대재생산 과정은 지역과 세계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계기성을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로운 관계성의 계기들을 어떻게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가. 이는 한류의 장력이 미치는 동아시아에서의 문화 파장을 문화적 연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문제와 그 주체를 민간 동력에 두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지난 6월 서울에서의 세계문화다양성회의에서 확인됐거니와 우리의 목표와 지향은 분명하다. ‘부재에서 실재로’, 이제까지 동아시아 사회에 부재했던 평등질서와 진정한 문화향수, 동북아와 세계평화, 각국의 문화 다양성의 견지와 그것을 통한 상호 문화 수준의 진작, 그 실재의 문화기획. 미국 문화의 패권적 관철도 중화문명의 화이관계, 조공과 책봉의 21세기적 전화도 아닌 다원평등한 문화적 회통과 연대의 경로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한류, 21세기 동아시아의 문화선택은 이로써 결코 패착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과연 입증해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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