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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피해자가 몇 명인지 몰랐을까

이윤택 #미투, 2018년 2월 ‘피해 말하기’부터 2019년 7월 대법원 확정까지
등록 2020-04-05 06:48 수정 2020-05-02 19:29
여성 단원들을 상습 추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여성 단원들을 상습 추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피해자가 몇 분이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2018년 2월 서울 종로구 한 소극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의 성폭력 피해자가 몇 명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 자신도 알았다.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진행된 생활에서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어떨 때는 이게 나쁜 죄인지도 모르고 저질렀을지 모르고, 어떤 때는 내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서 생긴 일일 수 있다.”

그가 기자회견을 열기 며칠 전, 한 극단 대표는 10년 전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했다. 그가 기를 푼다며 여성 단원을 방으로 불러 안마를 시키고, 성기 주변을 주무르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그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폭로’는 막힌 둑이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그의 말마따나 ‘18년 동안’ ‘관습적으로’ 벌어진 ‘아주 나쁜 행태’의 피해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확산되면서 폭로된 성폭력 가해자 중 가장 많은 고소인(23명)과 상대 변호인단(104명)을 마주했다.

가해자는 연극계에서 “신” “제왕” “교주” “왕”으로 불린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었다. 여성 연극인들의 ‘피해 말하기’ 이후 연극계는 뒤집어졌고, 누군가는 터질 게 터졌다고 했다. 이윤택은 한국극작가협회, 서울연극협회, 한국연극연출가협회 등에서 제명됐다.

1심보다 무거운 2심 형량

이 기자회견에서 이윤택은 공개사과를 했다. 하지만 성추행은 인정한다면서도 성폭행은 부인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면피성 사과’라는 비난이 일었다. 이어 기자회견에 앞서 ‘노래 가사를 쓰듯이, 시를 쓰듯이’ 사과문을 만들었고, 불쌍해 보이는 표정 등을 연습했다는 내부 폭로가 나오면서 대중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졌다.

‘피해 말하기’로부터 두 달 뒤, 이윤택은 2010년 7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여성 단원 9명을 20여 차례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안마를 시키면서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도록 하고, 연기를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가슴을 움켜쥔 행위 등이 피해 내용에 포함됐다. 현행법상 처벌이 가능한 혐의만 이 정도였을 뿐, 경찰이 파악한 피해는 1999년부터 2016년까지 60건이 넘었다. 이윤택의 성폭행으로 임신중절수술까지 받았다는 피해자도 있었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법의 처벌망을 피해갔다.

1·2심 판결문을 보면, 이윤택의 범죄 행태는 한결같다. 여성 단원을 방으로 불러 안마를 시킨 뒤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다. 배 좀 문질러라” “힘들어서 그런다. 어린애 기 좀 받자”며 피해자의 손을 당겨 성기 주변을 주무르게 한다거나, “몸으로 소리를 내야 한다” “소리는 여기서 내라”며 가슴이나 음부를 만지는 식이었다. 피해 내용의 해명 또한 이윤택과 그의 변호인은 대동소이했다. 성기를 만지게 한 행위에 대해 “‘갑자기’ 손을 당겨 성기에 닿게 한 적이 없다” “성기 주변 혈의 위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성기에 닿았을 수는 있으나 의도적으로 성기를 만진 적은 없다” “동의하에 주물러달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 연기지도를 빙자한 성추행에 대해서도 이윤택은 “발성 지도를 했을 뿐”이라며 상습 추행을 부인했으나, 법원은 피해자들의 구체적이고 일관된 진술을 받아들였다. “피고인은 자신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악용하여 연기지도를 가장하거나 안마를 해달라는 명목으로 극단의 단원들이나 출연 배우들을 상대로 장기간 반복하여 성추행을 해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

이윤택은 1심에서 상습강제추행, 유사강간치상 등의 혐의가 인정돼 징역 6년과 80시간 성폭력 프로그램 이수, 10년간 아동·청소년 기관 취업 제한을 선고받았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 중 실형을 받은 첫 판결이었다. 이후 2심에선 2014년 안무가로 일한 단원에게 유사성행위를 강요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고, 이 또한 유죄로 인정됐다. 형량은 1심보다 1년 무거운 징역 7년. 2019년 7월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첫 피해 폭로가 나온 지 1년5개월 만이었다.

연극계 도제식 문화 도마 위에

함께 생활하는 연극공동체인 연희단거리패를 만든 이윤택은 연희단거리패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배우 선정이나 퇴출 등 극단 운영에서 그의 입김은 절대적이었다. 피해 여성들이 짧게는 2년, 길게는 약 20년 동안 자신의 피해를 공론화하지 못한 이유였다. 한 피해자는 “자신들은 최고의 연극 집단 중 하나라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각자에게 일어난 일과 목격한 일을 모른 체하며 지냈다”고도 말했다.

이윤택이 연극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연희단거리패 출신 영화배우 곽도원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곽도원은 과거 과의 인터뷰에서 연극을 그만두게 된 이유로 이렇게 설명했다. “선배들 말을 안 듣는다고 극단에서 쫓겨났다. 이윤택 대표는 대한민국 연극계에선 가장 높은 분이고 내가 어느 극단에서 연극을 해도, ‘저놈 잘라’ 하면 잘리는 정도의 파워를 가진 분이다. 그러니 이제 연극도 못하게 된 거다.”

이윤택의 성폭력이 공개된 뒤, 연극계 도제식 문화도 도마 위에 올랐다. 연출과 배우, 교수와 학생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가 화를 키웠다는 지적이었다. 실제 이윤택뿐만 아니라 법적 처벌을 받은 조증윤 극단 번작이 대표, 하용부 밀양연극촌 촌장 등도 자신보다 어린 단원들에게 지도를 가장해 성폭력을 저지른 경우였다.

이런 연극계 문화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아래에서부터 움텄다. 연극인들은 연극계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자발적 연대체인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성반연)을 만들었다. 성반연은 가해자들의 현장 복귀에 지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2019년 초엔 연극인들이 예술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겪었던 성폭력과 위계적인 조직문화에서 일어난 폭력 등 6개 장면을 담은 소책자 을 만들어 예술대학과 예술 전공이 있는 대학교에 배포했다. 또한 젊은 연극인들이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연극제를 열기도 했다.

연극무대 떠나거나 일자리 잃기도

연희단거리패는 해체됐다. 한때 문화예술계에서 ‘실력 인증 마크’였던 ‘연희단 출신’이라는 말은 미투 운동 이후 주홍글씨가 됐다. 연희단거리패 출신 여성 단원들은 “연희단 출신이면 이윤택의 성폭력 피해자 아니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혔고, 상당수 단원은 연극무대를 떠나거나 일자리를 잃었다. 무엇보다 연극이라는 무대를 사랑했던 피해 여성들이 있었다. 왕처럼 군림한 범죄자의 해악은 이토록 컸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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