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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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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까지 계획이 있구나?

지방자치단체장·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등 잠룡들이 논의 주도하는 기본소득
등록 2020-03-28 14:01 수정 2020-05-07 01:36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3월24일 ‘경기도형 재난기본소득 지급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경남도청 제공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3월24일 ‘경기도형 재난기본소득 지급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경남도청 제공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정치를 창출한다.”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말이다.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지만, 거꾸로 정책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본질을 짚은 말이다. 정책은 정치를 통해 사회적 의제가 되고 정책 집행에 따라 공론장의 지형은 바뀐다. 10년 전 이맘때,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무상급식’ 논쟁은 이후 복지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여론을 바꿨다. 정치 없이 정책은 빛을 볼 수 없고, 정책 없이 정치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코로나19 총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4월15일 총선은 재난 상황이라는 블랙홀에 모든 쟁점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각 당이 정책이나 공약을 발표했지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거대 정당이 만든 ‘비례위성정당’을 둘러싼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여론조사마다 다르지만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층 비율도 20%에서 40% 사이로 형성되고 코로나19로 투표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연말까지 버틸 수 있는 내수 시장 구축해야

자칫 ‘깜깜이 선거’로 흘러갈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이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잠룡으로 분류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나 지역구 후보들이 논의를 주도하며 존재감을 보인다. 재난기본소득과 기본소득을 둘러싼 이들의 선택이 총선을 지나 2022년 대선 구도까지 좌우할지 관심이 커진다.

재난과 기본소득의 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만들어 사회적 의제로 밀어 올린 데 앞장선 이들은 차기 여권의 대선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김경수 경남도지사다. 이재명 지사는 3월6일 기자회견을 통해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보는 업종을 특정할 수 없다. 거의 모든 도민이 다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지원은 불공정하다. 재난기본소득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라며 재난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했다. 김경수 지사는 3월8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추경은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임시 대책이지 미래 위기를 막기 위한 근본 대책으로는 대단히 부족하다”며 “모든 국민에게 재난기본소득 100만원을 일시적으로 지원하자”고 정부와 국회에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 타격을 입은 소상공인과 취약계층 지원이 논의의 중심이었는데, 두 광역단체장이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의제에 불을 붙였다.

김경수 지사의 재난기본소득 논의 과정에 참여했던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출·제조업이 몰려 있는 경남과 경기는 경기 전망이 어둡고 장기화할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해 올해 말까지 버틸 수 있는 내수 시장을 구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두 광역단체장이 적극적으로 보편적 기본소득 100만원을 주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두 광역단체장이 긴급 구호를 넘어 코로나19 사태 장기화까지 염두에 두고 ‘재난기본소득’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읽힌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3월23일 ‘경남형 긴급재난소득’ 도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3월23일 ‘경남형 긴급재난소득’ 도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 보편 지원에 가깝다?

대표 상품인 ‘청년배당’으로 기본소득을 정치철학으로 삼는 이재명 지사는 한발 더 나아가 3월24일 “도 재원을 통해 도민 1인당 10만원씩 지급하겠다”고 보편적 재난기본소득 깃발을 처음 올렸다. 고소득자에게도 지급하는 방식에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와도 “부자가 죄는 아니다” “세금을 내는 사람이 따로 있고, 혜택 보는 사람이 따로 있게 되면 세금 내는 사람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특유의 거침없는 언어로 반박하고 있다. 이재명 지사 쪽 관계자는 “그동안 경기도에서 청년배당 등 보편복지에 기반한 기본소득 관련 실험을 해왔다. 이번 결정도 그 연장선상이다. 앞으로도 기본소득 정책을 계속 펼 것이다”라고 한다. 이재명 지사의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 지지도는 2월 5%대에 머물다, 신천지 강제수사, 기본소득 도입으로 존재감을 보이며 최근 여러 여론조사에서 13~15%까지 상승했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에 이어 2위다.

잠룡들 가운데 ‘행동’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발 앞섰다. 3월18일 중위소득(100%) 이하 117만7천 가구를 대상으로 ‘재난긴급생활비’라는 이름으로 월 30만~50만원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앞서 4조8천억원 상당 긴급재난지원금을 1차 추경에 포함해달라고 중앙정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직접 시 예산 3217억원을 풀었다. 그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동안 아주 특정 계층 또는 핀셋 지원 방식이었는데 서울시의 재난긴급생활비 지원은 그 개념을 최초로 깬 것이다. 중하위 계층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정부에서 처음 실시하는 실질적인 재난기본소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며 선별 지원이지만 보편 지원에 가깝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총선에서 대구에 출마하는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더불어민주당)도 평소 합리적이고 온건한 태도와 달리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3월10일 페이스북에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선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합의를 얻어갈 첫걸음으로서 코로나 사태로 생계 위협을 받은 대구·경북 지역 취약계층에 대한 실험적 적용은 지극히 합당하다고 확신한다”며 국회와 정부에 대구·경북 지역 재난기본소득 시행을 제안했다. 김 전 장관은 3월19일 현금 지원과 재난기본소득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는 기획재정부를 향해 “우리 재정 당국은 본능적으로 재정건전성에만 지나치게 집착한다. 기재부 관료들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무조건 하나만 옳다고 하면 안 된다. 그건 고집이고 오만이다”라고 질타했다.

“과감성 있는 대책”이라고 했다가…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1위를 달리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회 위원장)는 당·정·청 코로나19 대책 논의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그는 3월23일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의 생활을 돕고 시장 수요를 진작하도록 재난지원금을 한시적으로 지급하는 문제를 정부와 협의해 며칠 안에 방향을 잡겠다”고 밝혔다.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 2~3위를 오가는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3월2일 당 회의에서 “한 기업인은 ‘재난기본소득’을 제안하기도 했다. 저는 이 정도 과감성이 있는 대책이어야 우리 경제에 특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재난기본소득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재난기본소득은 총선용 포퓰리즘”이라는 당내 목소리에 제동이 걸렸다. 그는 3월22일 정부에 40조원 긴급구호자금 투입(코로나 극복 채권 발행)을 요구하면서도 재난기본소득에는 선을 그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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