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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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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혐오, 공포가 맞물려 돌아간다”

메르스 환자 다룬 장편소설 <살아야겠다> 펴낸 김탁환 작가 인터뷰
등록 2020-02-08 08:06 수정 2020-05-0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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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80번째 환자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다수 전파 환자였던 14번째 환자로부터 감염됐다. 162번째 환자는 2015년 6월11일께 삼성서울병원에서 80번째 환자의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과정에 개인 보호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돼 감염됐다. 162번째 환자는 7월23일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지만 80번째 환자는 기저질환(악성림프종)이 악화돼 11월25일 숨을 거뒀다. 마지막 80번째 환자의 죽음으로 메르스 사태는 종식됐다.”
2015년 ‘메르스 사태’에서 80번째 환자와 162번째 환자에 대해 보건 당국의 역학조사는 이렇게 담담하게 기록돼 있다. 은 메르스 사태가 종식된 지 4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기록을 꺼내 들고 피해자들을 다시 만났다. 메르스 사태 피해자들이 2020년 다시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서다. 무엇이 나아졌는지, 여전히 잘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들에게 메르스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80번째 환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정부,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이라는 대한민국 권력의 세 축을 상대로 제기한 피해보상 소송 1심 선고(2월18일 예정)를 앞두고 있다.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한 162번째 환자는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정신과 진료를 1년이나 받았지만 여전히 ‘대인기피증’ 등의 증세로 메르스 감염 이전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치료 중 폐에서 뿜어나오는 피가래가 기도를 자꾸 막아 목에 큰 구멍을 내고 ‘기도삽관술’을 한 흔적이 아직 선명하다. 3주에 한 번씩 레이저 치료를 받지만 흉터가 없어지지 않아 치료를 포기할까 고민한다.
메르스 생존자, 사망자 유가족 모두 메르스와 아직 싸우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잘못됐고, 나아진 것은 없었다.
2020년 2월6일 현재 23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우리는 궁금해진다, 이 감염 사태가 언제 종식될지. 기사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저마다 전망을 내놓는다.
이 보건 당국이 썼던 메르스 역사(疫史)의 뒤를 이어서 쓰는 이유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바이러스 감염이 없으면 정말 사태는 끝나는 것일까? 바이러스 감염이 멈춰도 감염증을 앓았던 사람들과 그 가족의 아픔이 계속된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바이러스뿐일까? 정부가 고쳐야 할 것은 방역망뿐인가? 언론 보도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2015년 5월20일 발생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는 확진환자 186명과 사망자 39명을 냈다. 정부와 병원, 공동체에 대한 믿음은 한순간 깨졌다. 영문도 모른 채 메르스에 걸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완치 뒤에도 후유증과 사회적 멸시에 내던져졌다. 폐가 망가져 일상생활조차 힘들어졌고 메르스에 희생된 환자였지만 전염병을 확산시킨 가해자로 취급돼 비난받았다. 전염병 감염을 막기 위한 격리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격리 후 환자들에게 쏟아진 근거 없는 원색적인 비난을 제지하지 않았다.

망각의 시간이 흘렀고, 2020년 1월19일 5년 만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국에서도 발병했다. 그사이 두려움이 전달되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두려움의 넓이와 깊이도 달라졌다. 두려움은 현존하는 공포를 넘어 중국인 등 특정 대상과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 배제로 번졌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2월5일 성명을 내 “특정 질병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특정 집단의 책임으로 돌리는 혐오 표현은 합리적 대처를 늦출 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대상 집단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증오를 선동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은 2월3일 서울 영등포구 한 카페에서 메르스 사태를 환자와 가족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장편소설 를 펴낸 김탁환(사진) 작가를 만났다. 김 작가는 “메르스 환자는 모두 피해자였다”고 했다. 공공의 안전이라는 이유로 메르스 환자 인권은 때로 너무나 쉽게 침해됐고 완치 뒤에도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메르스가 어떤 상처를 남겼고, 전염병 환자와 가족에 대한 사회와 이웃의 태도는 어땠는지 물었다. 는 김 작가가 세월호 참사 직후 현장 수색·수습 작업에 참여한 민간잠수사 김관홍씨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와 세월호 피해자들에 대한 연작소설 에 이어 펴낸 책이다.

언론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

책 에 메르스 피해자들 편에 서서, 피해자들의 서사를 쓰겠다고 했다. 어떤 뜻인가.
장편소설을 주로 썼다. 총체적으로 상황을 그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후에 작업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때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피해자들의 고통이 깊을 때는 지금 바로 글을 써야 한다. 세월호 참사 때도, 메르스 때도 재판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문 의학지식이 전제돼야 하는 재판인데 실제 피해자들은 의학지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에서 살았다. 최대한 빨리 이야기를 써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이들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국가폭력 피해자나 여러 재난, 참사 피해자를 보면 대개 피해자 조직이 만들어졌다. 피해자들이 모여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후원단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메르스 피해자들은 공식적으로 아직 다 함께 모인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낯선 곳으로 이사했다. 메르스를 전염시켰다는 낙인 때문에 피해를 밝히고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2015∼2016년에는 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도 어려웠다. 이후 몇몇이 국가와 병원을 상대로 재판을 시작했고 법정에서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자 했던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하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걱정과 공포, 혼란, 자책, 낙인, 분노, 두려움, 억울함 등 이들이 느낀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메르스 전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
대한민국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름 꿈과 희망이 있었고 아프면 병원에 갔다. 누구나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지만, 자신은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을 사람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메르스에 감염됐을 때 이들은 나라가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고 믿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성실하게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이들의 기대는 어긋났다. 메르스 사태 때 개인의 인권은 무시되다시피 했다.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개인의 자유나 방어권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 피해자는 숫자로만 기록됐다. 억울하게 도덕적 단죄도 받았다.

‘슈퍼전파자’라는 말도 문제였다. 누군가 메르스에 감염되고, 또 감염시킬 수밖에 없었던 운영 체계 문제를 지우고 피해자 개개인의 도덕 문제로 치환했다. 방송기자 ‘이첫꽃송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언론이 전염병을 어떻게 보도했는지를 썼다. 참사나 재난이 벌어질 때 실제 같은 고통을 겪은 기자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다. 메르스 사태 때 언론의 문제는 피해자를 가해의 시선으로 보도했다는 거다. 환자의 동선을 도표로 정리하고 몇 번이 몇 번을 감염시켰다고 했다. 피해자들끼리 선을 그으면서 법과 제도의 잘잘못은 지워졌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감염자의 삶은 계속 추락

메르스 확진자와 격리 대상자도 피해자였는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비난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과거에는 육로나 해로로 1천㎞ 전부터 전염병이 점점 가까이 옮겨오는 걸 인식하고 대비했다면, 메르스 때는 비행기로 순식간에 퍼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국 서울에 떨어졌다. 동시성이다. 두려움이 전달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이 발달하면서 동시성은 온·오프라인으로 확산됐다. 이제는 어느 곳에서 누가 걸렸다고 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수천만, 수백만 명이 동시에 상황을 알면서 확진자 수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확진자 10명이라도 공포의 강도는 과거 1천 명의 확진자가 나왔을 때보다 커졌다.

환자와 가족들은 왜 가해자로 취급받았을까.
메르스 환자들은 모두 피해자였다. 설령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겼다고 해도 가해자가 아니다. 한 사람이 몇 명에게 병을 옮겼다는 가해의 시선을 부여하는 순간, 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병을 옮겼느냐 옮기지 않았느냐로 가해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로 보기 시작하면 전염병 감염부터 완치 후까지 문제가 된다. 일단 병원으로 들어가면 전염성이 어느 정도냐로만 판단된다. 이 사람이 병에 걸리기 전 자리로 돌아가 계속 일하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국가나 사회는 거기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시민사회가 가진 한계이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도 비슷하지 않을까. 국가와 병원의 잘잘못을 가리는 건 피해자 몫이었다. 피해자를 보는 시선은 이중적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메르스에 걸린 이들이 큰 보상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사실과 달랐다. 소설에도 썼지만, 피해자들의 삶은 계속 추락했다. 메르스 피해를 겨우 극복했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 육체노동자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이 됐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완치 이후에도 메르스 피해자들은 충분한 보상과 지지, 위로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나.

죽음 문턱까지 간 사람들이었다. 완치는 됐지만 호흡기 관련 부위에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폐도 많이 망가졌다. 끔찍한 일을 겪어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다. 불안과 초조, 망상, 우울을 앓는 사람도 있다. 계속 악몽을 꿨고 메르스에 감염된 뒤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 ‘누가 내 살과 근육을 베어갔나’라는 망상에 빠졌다. 여전히 후유증과 트라우마 치료는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2017년 대통령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면담하는 상징적인 일이 있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메르스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품어야 한다.

바이러스 밝혀도 문제없는 세상 돼야

최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특정 대상과 집단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쉬운 방법은 혐오다. 공포 중에서도 걸러낼 부분은 걸러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게 잘 안 되니 전체를 잘라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도 중국(과 관련된 것)을 다 잘라내자는 식이다. 서울 시내에 중국인들이 돌아다니자 중국인은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비난까지 일었다. 무지와 혐오, 공포가 맞물려 돌아간다. 정확히 어디서, 왜 시작됐는지도 모르는데 새로운 전염병이 퍼질 때마다 특정 집단과 대상을 비난할 건가.

메르스 사태는 끝나고 삶은 계속된다. 전염병 피해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정부와 사회, 이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바이러스는 차단해도 병을 앓는 사람 목소리까지 차단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둘 다 차단했다. 침묵의 공간에서 유언비어가 쏟아졌다. 피해자는 그때 휴대전화로 자신들 뉴스를 보았다.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았다. 이젠 피해자들이 떳떳하게 발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차를 두고서라도 어떤 경로를 거쳐 병원에 갔고, 어떤 상황에서 병이 옮았고, 어떻게 병을 치료받고, 완치하면 뭘 하고 싶은지 말하게 해야 한다. 숫자가 아닌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숫자로 한꺼번에 넘어가버리면 숫자로만 남고, 기억될 뿐이다.

메르스 때 마지막 한 명이 남자, 이 환자만 없어지면 메르스는 종식된다고 했다. 언론은 메르스가 종식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경제적 손해가 얼마인지 계속 보도했다. 당사자는 ‘나만 죽으면 끝인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혼자라는 끔찍한 고립감이다. 한 사람의 인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국가와 공동체가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모두 어긋났다. 유가족이든 겨우 산 사람이든 결론이 그렇게 닿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지나간 뒤에라도 ‘내가 이번 바이러스에 걸렸다’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

독자는 공분, 당사자는 “약하다”

이름도 모르는 전염병이 다시 이 나라에 도착한다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메르스 피해자들은 의 (표현) 수위가 약하다고 했다.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공분했지만 실제는 소설보다 백 배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더 힘들고, 더 고독했다. 는 올해 대만에서도 출간됐다. 대만 도서전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연기됐다. 중국어로 번역돼 대만에 마침 소개될 때 다시 바이러스가 퍼져 마음이 착잡했다. 재난이 터졌을 때는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와 위로가 중요하다. 연대가 필요한 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서라고 소설가 존 버거도 말하지 않았나. 거의 똑같은 고통을 앓을 한국도 대만도,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지 고민할 때다.

글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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