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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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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다간 신뢰를 잃을지니

사스·메르스로 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정부 대응 교훈
등록 2020-02-08 07:58 수정 2020-05-09 02:21
노무현 정부 때 고건 국무총리가 2003년 4월15일 사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국립보건원을 방문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때 고건 국무총리가 2003년 4월15일 사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국립보건원을 방문했다. 연합뉴스

“전북과 충남 일대에 전염병이 번져 400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했으나 국민 보건을 맡은 보사부(보건사회부)는 그 병원체도 밝히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보름이 지나서야 신종 콜레라라고 밝혀 보건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샀다. (…) 그동안 보사부는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10개 지역에 콜레라가 번져 (…) 환자 수도 모두 469명에 29명이 사망했다.”

1969년 9월10일치 <동아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기사 제목은 ‘保社部(보사부) 긴가민가우물쭈물갈팡질팡 역시 콜레라’다. 신종 콜레라는 당시 두 달여 동안 1396명의 감염자, 125명의 사망자를 발생(<매일경제> 1969년 11월3일)시키고 한풀 꺾였다. 가뜩이나 방역 체계가 취약한 시절 박정희 정권의 초기 대응이 화를 불렀다. 1969년 8월 말 첫 감염자가 나왔지만 보건 당국은 “식중독이다. 전염성이 없다”고 발표하며 비상방역 대책을 중지했다가 뒤늦게 콜레라 발생을 인정했다.

동요하는 민심에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작년 콜레라는 북괴로부터 인공적으로 침입된 것으로 보인다.”(1970년 2월4일치 <동아일보>가 인용한 보건 당국자 발언) 군사 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해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고 ‘북괴 세균전 획책 규탄 궐기대회’ 등을 열었다. 물론 이후 콜레라 병원균은 필리핀 화물 선박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결론이 났다.(<동아일보> 1970년 8월19일 ‘작년 콜레라 필리핀서 침입’)

‘총리실 중심 컨트롤타워’ 사망자 0명 사스

50여 년이 지나 국가 방역 체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감염병 위기의 조기 수습 여부는 여전히 정부 리더십에 좌우된다. 국민은 당연히 정부의 울타리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지만, 믿음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정부의 지지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당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1월30일 발표한 한국갤럽과 2월3일 발표한 리얼미터의 문재인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 여론조사에 영향을 끼쳤다. 긍정평가가 1월 3~4주 같은 조사 때보다 소폭 하락했다(한국갤럽 4%포인트 하락. 리얼미터 2.0%포인트 하락). 국민은 감염병 대처를 대통령과 정부의 능력을 가늠하는 리트머스시험지로 삼는 것이다.

방역과 감염자 관리, 치료 백신 개발 등은 전문가가 주도하는 영역이지만 신종 감염병 대처에서 정부의 리더십이 중요한 것은 불확실한 정보로 범정부 차원의 자원을 동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하며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와 해당 부처 관료가 하기 어려운 역할이다. 이는 재난과 감염병 위기 대처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컨트롤타워’와 연결된다.

“2003년 방역 인원이 부족했다. 처음에 간호대 학생들을 동원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결국 군의관과 군간호사를 동원하게 됐다.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같은 장관급인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총리실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당시 총리실 산하에 조직을 직접 설치한 이유다. 거기서 차이가 나는 거다. 정부 힘만으로도 안 된다. 의사협회 등 민간의 협력도 필요하다.”(<중앙일보> 2015년 6월5일 ‘고건 “사스 땐 전쟁하듯 대처…메르스 격리자 철저 관리를”’)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대처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전세계에서 발생한 사스 확진자는 총 8096명, 사망자는 774명으로 치사율이 9.6%였다. 하지만 한국은 2003년 3월16일 사스 경보가 발령되고 100여 일 뒤 상황 종료가 선언되기까지 감염자 3명, 사망자는 0명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방역을 진두지휘한 고건 전 총리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의 성공 요인을 엿볼 수 있다.

사스가 발생한 시점은 참여정부 출범 초기라 어수선할 수 있었지만 조기에 컨트롤타워를 명확히 한 것은 이후 대응에 힘을 발휘했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국가위기관리 성과에 미치는 영향: 전염성 호흡기 질환 사례를 중심으로’(2019) 논문은 “(노무현 정부는) 협력성 측면에서 국무조정실 중심의 대응체계가 구축됨으로써 협력을 잘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 컨트롤타워의 권한이 적절하여 총괄할 수 있는 지위를 유지하며 정부 부처 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 간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처가 이루어졌고, 시민사회와도 적절한 협력을 이루어 초동대응이 훌륭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한다.

“중앙정부의 메르스 대응 컨트롤타워가 복잡했고 조직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보였으며 전략적 의사결정의 신속성, 명료성에 대한 의문이 존재하였다.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병원 간에 정보 공유와 업무 협조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2015 메르스 백서>, 보건복지부)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14일 메르스 환자를 치료중인 서울대학교 병원을 찾아 격리병동 간호사와 통화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14일 메르스 환자를 치료중인 서울대학교 병원을 찾아 격리병동 간호사와 통화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메르스 땐 10여 일 뒤에야 복지부 장관이 지휘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대응 실패의 핵심 원인은 노무현 정부와 180도 다른 ‘컨트롤타워 부재’였다. 2015년 5월20일 국내 첫 확진자가 나왔지만 정부는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5월31일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메르스 전파력 판단이 미흡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6월2일에야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 본부장을 복지부 차관에서 복지부 장관으로 격상하고 국민안전처에 대응 조직을 구성했다. 그럼에도 컨트롤타워 논란은 계속됐다. 앞에서 인용한 논문은 “메르스 감염 세계 2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까지도 두 주무 부처의 장이 총괄하는 비효율적인 형태를 구축하고 대처했다”고 평가한다.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대응 속에 국내 메르스 확진자는 총 186명, 사망자는 39명이 발생했다. 치사율은 약 21%에 이르렀다.

두 정부는 왜 상반된 모습을 보였을까? 사회학과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감염병 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요소로 ‘위험소통’(Risk Communication)을 꼽는다. 위험소통은 정부와 정치가가 역량을 발휘하는 영역이다. 컨트롤타워 구성부터 이후 대응까지 노무현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위험소통에서 차이를 보였다. 위험소통에선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한다. ‘대중이 위험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불명확한 정보가 퍼져서는 안 된다(전문가가 정확한 정보를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과 대중의 위험에 대한 인식은 내용 그 자체보다 정부와 전문가에 대한 신뢰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한다.

정보 움켜쥐고 가짜뉴스 단속도 불안 키워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대응에서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히는 정보 비공개는 “불명확한 정보가 확산돼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치우쳐 범한 패착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메르스 관련 정부 위험소통의 한계에 대한 사회적 원인 분석’(2015) 논문은 “보건복지부 및 질병관리본부의 전문가들은 과학적 증거에 의거하여 의사결정을 추진하는 증거 기반 의사결정을 선호한다.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은 정책 결정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경우에는 타당할 수 있으나, 메르스 위기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과학적 증거가 마련될 때까지 계속 기다리게 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결국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메르스 초기 정부와 전문가들은 WHO 자료를 바탕으로 감염력과 전파력이 낮다고 판단하고 정보공개를 꺼렸다. 메르스 사태 때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담당자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된 ‘메르스 위험 커뮤니케이션 분석’(2016) 논문은 “(최초 메르스 인지) 당시 정부의 관심사는 발표의 정확성이었다”고 말한다. “양성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내부 회의에서는 거짓 양성일 가능성을 해소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 실시 등 4가지 재검토를 결정한다. (…) 5월22일 전문가 회의에서는 일부 전문가들이 메르스 환자 확인 발표가 너무 빨랐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전문가들 역시 발표의 정확성이 큰 관심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르스 방역보다 정보 공개로 인한 사회 혼란을 더 우려한 것이다.

논문은 병원명 비공개 결정에 대해서도 ‘정부의 느린 의사결정’ ‘긴 보고체계’ ‘위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부재’ 등이 문제였음을 정부·지자체 관계자들 입을 통해 지적한다. ‘메르스 관련 정부 위험소통의 한계에 대한 사회적 원인 분석’도 “병원명 공개는 (병원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 의사결정을 지연시키는 전문가와 의료집단의 이해관계를 끊어내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정보공개를 미루고 메르스 위기를 확산하게 한 주요 원인이다”라고 돌아본다. 중앙정부에 맞서 적극적인 정보공개에 나섰던 지자체장(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 등의 리더십이 주목받았다.

당시 정부의 감염병 위기관리 매뉴얼에도 “모든 정보를 공식화하라”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그 결과 감염병이 여러 병원으로 확산되고 국민은 불안에 떨었다. 오히려 정부는 괴담 유포자를 엄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로 신뢰를 잃은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한국갤럽 여론조사)는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11%포인트 떨어져 6월 셋째 주 29%로 추락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이던 대구·경북 지역도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질렀다.

비공개 유혹 들 때마다 내릴 결정은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거친 뒤 신종 감염병 관련 예산은 5년 동안 1200% 증가(나라살림연구소 분석)했고, 권역 감염병 전문 병원, 신종 감염병 치료 병상 등이 설치됐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부가 거친 시행착오에 따라 상대적으로 업그레이드된 방역시스템 위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1월 말 컨트롤타워를 두고 청와대·총리실·질병관리본부 사이 혼선을 노출했으나 현재 보건복지부 장관이 중앙사고수습본부장을 맡았다. ‘메르스 교훈’으로 정보공개는 비교적 원활하게 되지만 일부 확진자 동선 세부 내용이 비공개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사태가 진행되면서 방역망 빈틈이 노출되고 확진자 수가 증가하며 고비를 맞는 상황이다. 국면마다 컨트롤타워에 혼선이 생기거나 정보 비공개의 유혹에 맞닥뜨릴 수 있다. 전쟁의 승패는 국면마다 의사결정을 하고 책임지는 정부의 리더십에 달렸다는 교훈은 이번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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