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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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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쳐야 산다, 그런데 뭉친다고 살까

선거제도 혁신했으나 정치공학적 셈법에만 몰두하는 자유한국당…

통합은 최선의 선거전략이지만, 통합한다고 이기는 선거전략 되진 않아
등록 2020-01-18 05:35 수정 2020-05-07 02:01
새로운보수당이 1월5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에서 중앙당창당대회를 열었다. 가운데는 첫 책임대표에 선출된 하태경 의원.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새로운보수당이 1월5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에서 중앙당창당대회를 열었다. 가운데는 첫 책임대표에 선출된 하태경 의원.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1월14일 오전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 정운천 새로운보수당 의원이 꽉 들어찬 취재진을 비집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언론사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제일 기대를 모으며 오시는 분이네….” 미리 와 있던 안형환 혁신통합추진위원회(혁통위·1월15일 사퇴) 사무총장의 농담에도 정 의원의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장관님, 어서 오세요.” 이번엔 박형준 혁통위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정 의원에 대한 예우를 담아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정 의원은 살짝 웃어 보였다. 뒤이어 같은 당 지상욱 의원도 긴장한 얼굴로 회의장을 찾았다. 새보수당의 두 의원은 곁에 앉은 자유한국당 김상훈·이양수 의원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야권은 반드시 패한다?

이날의 만남이 어색할 만도 하다. 3년 전 둘로 쪼개졌던 보수정당이 재결합을 공식 논의하는 첫 자리였다. 반문세력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혁통위가 판을 만들었다. 새보수당 대주주인 유승민 의원이 내건 ‘통합의 3대 원칙’(탄핵의 강을 건너자, 개혁보수로 나가자, 낡은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자)을 포함하는 ‘보수 재건’의 6대 원칙을 혁통위가 발표하고, 이를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수용하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어색한 만남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못했다. 이튿날인 1월15일, 황 대표가 극우 성향 ‘태극기 세력’과 맞닿은 ‘우리공화당과도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한 발언을 새보수당이 문제 삼았다. 새보수당은 혁통위에서 광범한 보수 진영의 통합을 논의하는 것보다 새보수당과 한국당의 ‘당 대 당’ 통합을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보수 통합의 주도권을 놓고 두 보수정당의 신경전은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보수정당의 재결합 논의는 급물살을 탈 것이란 관측이 많다.

보수 통합은, 달라진 4·15 총선에 대처하는 한국당의 최우선 전략이다. ‘일여다야’ 구도에서 야권은 반드시 패배하고, 그러면 앞으로 4년간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4+1 협의체’(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당권파·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에 밀려 선거법·검찰개혁법 통과를 저지하지 못했던 ‘보수의 악몽’이 재현될 것이란 주장이다.

반면 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으로 바뀐 선거 규칙의 의미를 실현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선거연령 만 18살 인하’로 새로 생겨나는 젊은 유권자를 끌어들일 선거 전략은 세우지 않고, 오히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시행을 맞아 위성 비례정당을 만들어 소수정당 몫을 가로챌 궁리를 하고 있다. 한국당 총선 기획단 관계자는 “우리 총선 전략은 보수 통합, 인적 쇄신, 위성정당, 정책 혁신”이라며 “선거연령 인하는 우리가 반대 또는 조건부 반대를 했던 부분이라서 (이번 총선에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거제도는 혁신했으나, 한국당은 과거처럼 정치공학적 셈법에만 몰두하는 상황이다.

한국당이 ‘일대일’ 구도에 목매는 이유가 있다. 한국갤럽이 1월7~9일 성인 1천 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당 지지율은 20%로 민주당(40%)의 절반이다. 조국 사태 후폭풍으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40% 선이 깨졌을 때도, 이탈한 민심을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텃밭인 TK(대구·경북)를 제외하고 수도권, PK(부산·경남)에선 한 표가 아쉬운데, 이마저 보수 진영 후보가 나눠 가져야 한다면 승산이 없다.

‘차마 찍을 수 없는 정당’ 낙인

현역 의원인 윤상직 한국당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부산 기장군 사례를 살펴보자. <프레시안>의 의뢰로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1월4일 기장 시민 718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최택용 민주당 예비후보(39.1%)와 정승윤 한국당 예비후보(39.6%)가 ‘한 끗’ 승부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당이 지역구를 지키려면 4.1%인 바른미래당(새보수당의 전신) 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박근혜 정부에서 치른 2016년 총선에선 ‘일여다야’ 구도에서도 야당인 민주당이 1당이 된 적이 있다. 다른 야당인 국민의당이 진보 진영의 표를 가져가기는 했지만, 당시 새누리당에 실망한 중도·보수 진영의 표도 대거 흡수하며 새누리당의 의석수를 축소시킨 덕분이었다. 그러나 2020년 일여다야 구도가 다시 이뤄졌을 때, 세가 약한 새보수당이 국민의당처럼 정부·여당에 등돌린 진보·중도 진영의 표를 가져와 한국당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지는 않아 보인다.

높은 비호감도가 한국당에는 치명적 약점이다. ‘차마 찍을 수 없는 정당’으로 다수 유권자가 느낀다. <문화일보>가 1월12~13일 엠브레인에 의뢰해 1009명에게 정당 호감도를 물은 결과, 한국당이 비호감이라는 응답(75.6%)이 호감이라는 응답(16.5%)보다 네 배 넘게 나왔다. 보통 비호감도가 호감도의 두 배 이상이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것으로 정치권에서는 판단한다. 문재인 정부 3년차에 중간 평가 성격으로 치르는 총선에서 ‘정권 심판론’을 외치기 전에 ‘야권 심판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라는 구호를 앞세워 개혁 보수당의 노선을 걸어온 새보수당의 상징성이 한국당에 필요한 시점이다.

보수 통합이 더 절박한 쪽은 새보수당이다. 2017년 1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성파가 만든 바른정당만 해도 현역 의원 29명이 있는 교섭단체 정당이었으나, 이후 대선 패배(2017년 5월)-바른미래당 창당(2018년 2월 창당)-지방선거 패배(2018년 6월)-바른미래당 비당권파 모임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 발족(2019년 9월)을 거치며 8석짜리 정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이후 “8석을 80석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로 출범한 새보수당마저 ‘컨벤션 효과’(정치 이벤트 직후 지지율 상승)도 없이 3% 지지율에 그치자, 창당 8일 만에 한국당에 손을 내민 것으로 풀이된다(한국갤럽 1월7~9일 설문조사). 한국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출신 김병민 경희대 객원교수는 “정당지지율 10%도 안 되는 정당의 경우 선거비용 보전(유효득표수 10% 이상 받으면 선거비용의 50% 이상을 돌려주는 제도)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국 단위에서 후보자를 모집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군소정당일수록 생존 문제 때문에 통합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보수정당과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혁신통합추진위원회’의 첫 회의가 1월1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자유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이 3년 만에 재결합을 논의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보수정당과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혁신통합추진위원회’의 첫 회의가 1월1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자유한국당과 새로운보수당이 3년 만에 재결합을 논의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보수 통합 뒤 남은 일들

결국 서로의 절박함이 동력이 돼 ‘통합보수신당’이 만들어지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새보수당이 내건) 통합의 3대 원칙이 있었지만 사실 변수는 두 가지였다”며 “(새보수당 쪽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관련 입장 정리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 같고, 개혁 동력은 새보수당 쪽에서 살려낼 거라고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다만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한국당의 위기의식이 그리 높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통합까지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반문연대 같은 빅텐트로 해서 (보수 진영에서) 후보를 한 명 낼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고 내다봤다.

보수당에 관심이 많은 지역에선, 일단 보수 통합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다. <뉴스1>이 엠브레인에 의뢰해 1월12일 부산·울산·경남 지역 유권자 1015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총선 전 보수 진영 통합에 찬성하는 응답이 60.4%로, 반대(29.4%)의 두 배였다.

그러나 통합이 ‘이기는 선거’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보수 통합에 성공하더라도 2016년 총선이 재현될 수 있다. ‘보수 하나-진보 여럿’의 유리한 구도를 만들고도, 혁신 없이 ‘진박 공천 파동’ 같은 파열음만 내다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로 새누리당’이 되는 것이다. 황교안 체제가 유지되면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황 대표가 새보수당은 물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미래를 향한 전진 4.0’ 창당을 준비 중인 무소속 이언주 의원, 우리공화당까지 ‘묻지마 통합’을 추진하며 내건 명분은 오로지 ‘반문연대’다. 그러면서 ‘좌파 독재’ ‘자유우파 통합’ 같은 말을 많이 쓴다. 이런 이념 프레임은, 보수당의 전통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으나 진보·중도층의 유입은 막는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이념 프레임은 보수 대 진보 진영의 대결을 부추겨 문재인 정부에 실망해 떠나려 고민하던 여권 이탈층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이 중간지대의 유권자를 유인하려면 현 정부의 무능과 실패를 집중 공략하며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정공법은 쓰지 않는다.

그나마 보수 진영에선 유승민 의원이 그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통합 뒤 친박 강경파가 그런 혁신의 공간을 새보수당에 내줄 가능성이 적다. 신율 교수는 “이념 위주로 통합해서는 상대의 프레임에 말려들 수밖에 없으니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서 북한 문제나 경제 문제, 두 가지만 물고 늘어져야 한다”며 “(그런데) 한국당이 1호 공약으로 내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폐지’는 국민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크지 않다”고 말했다. 황 대표가 ‘현역 의원 50% 물갈이’라는 인적 쇄신 목표를 내건 상황에서 공천권을 둘러싼 한국당 내부, 한국당과 새보수당 사이 투쟁도 통합 뒤 뇌관으로 부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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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과 2016년, 두 개의 갈림길

만약 황교안 체제가 무너지고 비상대책위원회가 들어선 뒤 보수 통합이 성사된다면 파괴력은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위기 속에 들어선 비대위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빠르게 인적·정책 쇄신을 밀어붙이며 민심을 뒤흔든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총선의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2016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대표적이다. 특히 2012년에는 박근혜 비대위가 당명과 당색을 바꾸고 ‘경제민주화’ 같은 진보적 정책을 앞세우며, 김종인·이상돈 같은 중도·개혁, 합리적 보수 성향의 외부 인사를 영입해 총선판에 충격을 주었다. “새보수당이 한국당과 통합 뒤 그리는 지향이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김만흠 원장)이기도 하다. 다만 현재 보수 진영에는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처럼 카리스마가 있는 대선 주자급 지도자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박성민 대표는 이렇게 전망한다. “(황교안 체제에서) 한국당이 대충 복원되면 지리멸렬한 야권 상태에선 벗어나게 되니까 누가 이길지는 모르지만 (여야가)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당이 비대위로 전환하면 혁명적 상황에서 과감한 공천과 혁신이 가능해지면서, 야권이 승리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지금까지 버텨온 황교안 대표 (체제가 계속 유지될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 두 시나리오 모두 살아 있다.” 2012년과 2016년의 길,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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