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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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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린다, 한국형 비토크라시

국회선진화법 ‘선의’ 악용해 199개 안건 볼모 삼은 자유한국당,

법 이전에 정치문화 관행 선진화해야
등록 2019-12-07 06:12 수정 2020-05-09 02:21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12월3일 국회 본청 중앙홀에서 의원총회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12월3일 국회 본청 중앙홀에서 의원총회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막 하는구나, 정치 막 하는구나.’

11월29일 오후 2시께 자유한국당이 이날 본회의에서 여야가 처리하기로 합의했던 안건 199건에 대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신청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분노가 치밀어오르면서 든 생각이었다. 안건 199건에는 박 의원이 사립유치원의 반발과 자유한국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들였던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도 포함됐다. 사립유치원 공공성 강화를 위한 유치원 3법은 지난해 12월27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이 손잡아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으로 지정됐다. 자유한국당의 보이콧(거부)으로 제대로 논의되지 않다가 11개월 만에 이날 열리는 본회의에서 표결을 앞두고 있었다.

박 의원은 이날 오후 4시40분 국회 본관 2층 계단 앞에서 민주당이 진행한 자유한국당 규탄대회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자유한국당이 유치원 3법을 사회주의 법안이라고 비난하고 발목 잡아도 330일이 지나면 유치원 회계 투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국민들 혈세로 지원된 돈이 (원장들) 명품백 사고 막걸리 마시는 데 쓰이면 처벌할 수 있는 상식적인 법을 만들 수 있다고 국민 여러분께 설명했는데… 진짜 자유한국당에 질렸다.”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막기 위해 자유한국당이 신청한 필리버스터지만, 유치원 3법까지 영향받아 20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면 법안은 폐기될 수 있다. 이날 눈물을 흘린 이들은 또 있었다. ‘아이들법’(민식·하준·해인이법 등 교통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어린이 교통 안전 대책을 담은 법)가운데 여야가 표결에 부치기로 합의한 ‘민식이법’의 처리가 무산되자 국회를 찾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볼모 삼지 말라”고 절규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국회가 20대 임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또다시 누군가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했다. 20대 국회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리얼미터가 12월4일 503명에게 진행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4.4%포인트) 결과를 보면 ‘잘했다’는 긍정 평가는 12.7%(잘못했다 77.8%)에 불과했다. 촛불이 요구한 개혁 입법 처리는 더디고 패스트트랙과 ‘조국 사태’를 둘러싸고 여야가 ‘강대강 대치’를 이어갔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정치’라는 비판이 계속됐다.

20대 국회가 박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상대 정당의 모든 것을 반대하는 극단적인 거부 정치를 가리키는 ‘비토크라시’(Vetocracy)가 20대 국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비토크라시 뒤에는 19대 국회부터 적용된 ‘게임의 규칙’인 국회선진화법이 자리잡고 있다. 20대 국회는 마지막까지 ‘선진화법 해석 전쟁’을 벌이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다.

7년 만에 깨달은 ‘불편한 진실’

“(이 법은) 소수파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것을 잡고 걸겠다라고 마음만 먹으면 즉각 걸리게 되어 있는, 우리 국회 스스로 식물국회를 자초하게 되는 매우 좋지 않은 법입니다.”(심재철 새누리당 의원)

2019년 12월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7년 전인 2012년 5월2일 본회의에서 ‘예언’됐다.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주도로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 표결에 오른 국회선진화법은 찬성 127, 반대 48, 기권 17로 통과됐다. 표결을 앞두고 진행된 찬반 토론에서 당시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은 법의 악용 가능성을 우려했다. 11월29일 벌어진 국회의 아비규환은 선진화법이라는 규칙을 ‘선수’가 악용하면 얼마든지 ‘입법 마비’와 ‘입법 불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국회가 7년 만에 깨달은 ‘불편한 진실’이다.

애초 선진화법의 입법 취지는 ‘선한 의도’였다. 선진화법 이전 한국 정치에선 정부와 여당이 예산안과 쟁점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면 야당 의원들이 단체로 본회의장을 점거해 표결을 막고, 끝내 야당의 반발을 물리적으로 돌파한 여당이 예산안과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선진화법은 ‘몸싸움 방지법’이라고도 했다. 법 조항 하나하나 여야가 대화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국회 구조를 만드는 데 무게를 뒀다.

법은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이를 징역형과 벌금형으로 엄격히 처벌하도록 했다. 과반수 찬성으로 안건을 통과시키던 국회의 다수결 방식 가운데 일부를 ‘5분의 3’과 ‘3분의 1’로 바꿨다.

애초 5분의 3과 3분의 1의 입법 취지

현재 국회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5분의 3’과 ‘3분의 1’에서 비롯된다. 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은 올해 4월29일 밤 자유한국당의 물리적 저지를 뚫고 5분의 3 찬성을 모아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했다.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법안이 본회의에 부의(안건을 표결하는 ‘상정’의 전 단계)되자 3분의 1을 택했다. 필리버스터는 국회 의석 3분의 1 이상이 동의하면 신청할 수 있고, 국회의장은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108명의 의석을 가진 자유한국당이 199건 모두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것은 20대 정기국회가 마무리되는 12월10일까지 무조건 그동안 반대하던 선거법과 공수처 설치법의 본회의 상정과 표결을 막겠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는 12월17일 전에 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21대 총선도 20대 총선과 같은 제도로 치러지는 상황도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가 입법 마비 상태에 이른 것은 선진화법 자체의 문제일까, 이를 활용한 정당의 문제일까. 애초 법에서 규정한 5분의 3과 3분의 1의 입법 취지는 여야가 합의와 타협을 하라는 것이다. 다수당에는 ‘날치기’ 대신 재적 의원 또는 법안 관련 상임위 위원 ‘5분의 3’의 동의를 확보하면 최대 330일 안에 본회의에 법안을 상정할 수 있게 했다. 입법 지연을 막자는 취지이면서 다수당에는 최대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한 뒤 330일 동안 반대당과 협상해 이견을 좁히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대신 매번 야당이 특정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함께 막았던 예산안을 여야가 합의하지 않더라도 매년 12월1일 본회의에 자동으로 올라가게 해 여당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반면 소수당에는 재적 의원 3분의 1(100명) 이상의 뜻을 모으면 필리버스터로 본회의 법안 처리를 지연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을 쥐여줬다. 다수당이 필리버스터를 무산시키기 위해 필요한 의원 수를 5분의 3(180명)으로 못박아 쉽게 소수당의 목소리를 깔아뭉개지 못하는 안전장치도 뒀다. 다수당이 ‘즐겨 활용하던’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도 그 요건을 강화해 안건을 쉽게 본회의에 올리지 못하게 자물쇠를 걸어놨다. 대신 필리버스터로 해당 국회에서 안건을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본회의 종료 뒤 소집한 임시회의에서 해당 안건을 바로 표결할 수 있도록 규정해 안건이 표결 없이 폐기되는 일을 막았다.

‘19대 국회 평가: 국회선진화법과 입법활동’(<의정연구> 20권 2호) 논문은 “합의제 강화는 다수당으로 하여금 원안을 고수할 경우 법안의 기한 내 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정안과 절충안을 제시하게 했다. 반면 다수당의 절충안에 대해 소수당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고집해 반대로만 일관한다면 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하기 때문에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선진화법의 긍정적 효과를 짚었다. 여러 논문에서 선진화법이 적용된 19대 국회가 18대 국회보다 전체 법안 처리율이 올라갔다고 분석한다. 국회가 다당제로 운영될 경우 선진화법의 존재는 “협치의 필요성을 높인다”(‘다당제하에서의 합의형 입법정치 모색’, 국회입법조사처)고 평가했다.

19대 국회에서 기초연금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 등 정부·여당 중점 추진 법안을 두고 여야가 거세게 충돌했지만 결국 선진화법에 따라 서로 한발씩 물러서며 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부 야당 의원은 본회의 표결에 참석해 반대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해당 법안의 통과에 반발했지만 국회는 선진화법에 따른 차선을 택한 것이다. 테러방지법 처리에 반대해 2016년 2월23일부터 민주당 의원들이 192시간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지만 법안 1건에 대한 반대였다. 법안은 야당 의원들의 불참 속에 표결을 거쳐 통과됐다. 결국 자유한국당이 비판받는 이유는 대화와 타협, 토론으로 이견을 좁혀 차선을 선택하라는 선진화법의 기본 정신을 무시하고 법 조항을 기계적으로 해석해 ‘꼼수’에 가까운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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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 “공수처법 문제 삼으면서 토론회 참석 안 해”

패스트트랙 지정에 뜻을 모은 4개 정당은 지난 7개월 동안 자유한국당을 향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라고 지속해서 제안했다. 자유한국당의 의견을 반영해 수정·절충안을 도출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선택한 것은 장외투쟁과 황교안 당대표의 단식이었다. 유치원 3법 역시 협상 대신 사실상 보이콧을 택했다. “이미 자신들은 300일 가까이 필리버스터를 해놓고, 이걸 또 하겠다는 것이다. 양심이 없는 짓이다.” 박용진 의원이 분노하는 이유다.

게다가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시도는 자신들이 대표 발의한 법안(27건)까지 포함해 199건의 안건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해 애꿎은 다른 법안을 볼모로 삼은 전략이다. 특정 법안에 대한 소수정당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필리버스터 제도를 악용한 것이다. 다른 정당과 협상할 여지도 스스로 잘라버렸다. 쟁점 법안 협상을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국회가 진즉에 했어야 할 숙제(아이들법, 민생 법안)마저 ‘인질’로 잡았다는 비판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내부에서도 “협상과 타협이 실종된 정치는 국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김성태 의원)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 19대 국회에서 당시 새누리당은 야당의 발목잡기를 막아야 한다며 선진화법의 개정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하지만 20대 국회에서 야당이 되자 자유한국당은 선진화법 조항을 100% 이상 활용했다.

<한겨레21>이 20대 국회를 돌아보기 위해 21대 총선 불출마 초선 의원(비례대표)들을 만났다. 정당은 총선 때마다 30% 안팎의 의원들을 교체하며 새바람을 불어넣으려 한다. 지역구 관리에 매이지 않고 ‘입법기관’으로서 포부를 마음껏 펼치려던 비례대표 의원들은 여야 대치, 각 정당의 당론이라는 ‘벽’ 앞에 좌절하고 국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의정활동 마지막까지 여야 대치에 멈춰 있는 국회를 보며 분노와 무력감을 표출했다.

언론인 출신 김성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리도 야당일 때 마찬가지였다. 야당이 되고 나면 집권세력이 일 못하게 만드는 게 정권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촛불 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제도 개혁을 하기에 엄청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선진화법 아래서 야당이 무슨 명분을 걸어서 잡아버리면 어렵다”고 말했다.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도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청와대와 여당에서) 국정 운영 주체일 때는 (정쟁에 빠져 반대만 하는 야당에) ‘이거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당이 여당에서 야당이 되니까 발목잡기를 반복하는 거다. 또 (민주당도) 야당에서 이제 여당이 되니까 힘이 생겨서 자신들이 야당 때 주장했던 법안을 어느 정도 통과시킬 수 있을 텐데 그걸 하지 않는다.”

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은 “개인적으로 선거법·공수처법 개정안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당은 여기에 학술적,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공수처 문제를 지적하는 토론회에 가도 한국당 의원이 잘 안 보이더라. 그런데 비쟁점 법안까지 필리버스터를 걸었다. 한국당의 현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여야가 교체될 때마다 ‘비토크라시’가 반복되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제를 가리킨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선진화법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부터 분권형 개헌으로 권력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지난 정부와 이번 정부에서 야당의 필리버스터, 장외투쟁, 단식이 모두 벌어졌다. 이대로는 아무리 정부와 여당이 개혁을 이야기해도 막힌다. 임계점까지 온 것 같다. 우리 정치가 타협의 정신을 살리려면 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연정을 하려면 여야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기본

선진화법으로 생기는 부작용은 고칠 수 있다. 지난 정부부터 현재까지 논의가 이어지는 분권형 개헌은 앞으로도 정치권에서 논의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게임의 규칙을 악용한 쪽에서 비롯됐다. 이는 민주주의 위기와 연결된다.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심화하는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한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는 “민주주의는 성문화된 규칙과 심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기능하는 국가의 경우,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성문화된 헌법을 지속적으로 강화한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완충적인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일상적인 정쟁이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아준다”고 주장한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상호관용)과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제도적 자제)를 뜻한다. 현재 우리 정치에서 찾기 힘든 규범이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4+1’(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은 법이 애초 취지와 달리 ‘누더기’가 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선거법과 공수처법 내용을 수정하며 매일 이견을 좁혔다. 선진화법에 따라 다수의 지지를 모으고, 동시에 자유한국당에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7년 전 선진화법이 본회의를 통과한 뒤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 직무대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진 국회는 결코 제도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문화와 관행이 선진화돼야 합니다. 특히 여야 의원들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정치 풍토가 반드시 선행돼야 합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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