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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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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지원만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보호 종료 청소년 자립 위해선 당사자 목소리 반영한 정부 지원 필요
등록 2019-11-05 01:56 수정 2020-05-02 19:29
아름다운재단이 10월29일 서울 종로 낙원상가 5층 청어람홀에서 주최한 ‘보호 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토론회’에서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 신선씨(맨 왼쪽)가 발표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아름다운재단이 10월29일 서울 종로 낙원상가 5층 청어람홀에서 주최한 ‘보호 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토론회’에서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 신선씨(맨 왼쪽)가 발표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4월1일 발행된 제1255호 표지는 ‘고아들의 18 청춘’이었다. 아동양육시설·가정위탁 ‘보호대상아동’에게 만 18살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준비되지 않은 자립’을 강요하는 현행 아동보호 제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보호가 종료된 청소년과 청년 여러 명을 만났고, 다양한 전문가 제언을 소개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보호 종료 ‘당사자’를 좀더 많이, 좀더 깊이 만나고 싶었다.
지난 5월 이런 아쉬움을 단번에 해소해줄 특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하나로 진행된 ‘신선 프로젝트’였다. 보호 종료 당사자 캠페이너인 신선(26)씨가 다른 당사자 9명을 직접 인터뷰하는 기획이었다. 신 캠페이너는 만 여덟 살부터 아동양육시설에서 살았고, ‘대학생 보호 연장’으로 스물셋에 자립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신씨는 현재 아동자립 전문가를 목표로 또래 친구와 후배를 돕는 다양한 봉사와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보호 종료 당사자를 심층 인터뷰하고 당사자 처지에서 사회적 인식과 자립 지원 제도의 개선점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씨는 “보육원을 떠나 2~3년을 혼자 고생하면서 자립을 배우지만 그 과정에서 경험한 고민과 상황이 서로 공유되지 않아 갓 자립한 후배들도 선배들이 경험했던 어려움을 그대로 반복한다”며 “이 악순환을 해결하려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보호대상아동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 중 하나다. 수가 많지 않고 뭉치기도 쉽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는 언론과 정치인이 많지 않고, 스스로를 대변할 기회가 주어진 적도 거의 없다. 아름다운재단은 첫 기부자인 김군자 할머니의 기금을 통해 2001년부터 지속적으로 보호가 종료된 이들의 자립을 지원해왔다. 캠페인을 기획한 김성식 아름다운재단 1%나눔팀장은 “자립 지원을 시작한 지 18년이 지났지만 보호대상아동과 보호가 종료된 청년들을 향한 사회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퇴소 이후의 삶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김 팀장은 “이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캠페인을 통해 이들이 ‘홀로 살아낸 동정의 대상이나 역경을 이겨낸 신데렐라가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보통 청년’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난 5개월간 우직하게 전국을 돌며 보호 종료 당사자들을 만났다. 또래와 수다를 떨듯 편안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며 인터뷰를 진행했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지면을 통해 신씨와 친구들이 자립 과정에서 부닥친 어려움과 편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많이, 깊이 소개한다. 9명의 인터뷰를 정리해보니 여덟 가지 공통된 주제가 나타났고, 이 주제에 맞춰 인터뷰를 종합해 구성했다. 주제별로 맨 앞에는 인터뷰어인 신씨(‘나’)의 경험과 소회를, 그 아래는 인터뷰이 9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신씨는 “알려진 게 없어 독자들이 알지 못했던 보호 종료 뒤 ‘우리의 삶’을 부디 동정과 편견 없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아동복지법 제3조 4호에서 ‘보호대상아동’이란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로부터 이탈된 아동, 또는 보호자가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 등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적당하지 아니하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의 아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호대상아동의 보호 조처는 입양, 가정위탁, 시설입소로 나뉜다. 가정위탁은 조부모나 친인척, 혹은 다른 가정에서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보호하는 것이다. 시설입소는 쉼터 등 일시보호시설, 아동양육시설, 장애아동시설, 그룹홈 등의 보호를 말한다.)

“18살 자립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보호연령을 높이는 것이나 자립생활관을 더 늘려야 한다는 (전문가) 제언들이 있는데, 많은 시설보호 청소년이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어 시설을 떠나고 싶어 한다. 자립생활관도 시설 내에 있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립 욕구가 강한 반면, 시설의 규칙에 따라 살아오며 주도적인 결정이나 활동, 생활기술 사용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립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이 많다. 이런 경우라면 독립생활을 하면서 상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가까이 있든지, 일정 기간 독립생활을 한 뒤 필요하면 다시 시설에서 지낼 수 있는 등 유동성을 인정하는 게 필요할 것이다.”

아름다운재단(이하 재단)이 10월29일 주최한 ‘보호 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토론회’에서 전현경 재단 연구사업팀 전문위원이 ‘당사자 경험에 기반한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언급한 사례들이다. 보호 종료 청소년의 자립을 지원하려면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처지에서 자립에 대한 이해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재단이 보호 종료 청소년의 자립을 지원하는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당사자인 신선(26)씨를 캠페이너로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홍보 안 돼 신청 미달된 ‘주거지원 서비스’

신선씨는 만 8살부터 15년간 아동양육시설에서 살았다. ‘대학생 보호 연장’ 제도로 23살까지 자립을 미룰 수 있었지만, ‘진짜 어른’인 신씨에게도 자립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캠페인 중 일부인 ‘신선 프로젝트’를 맡아 반년간 당사자 9명의 ‘자립 이야기’를 심층 인터뷰한 신씨는 토론회에서 “탁상공론에서 다뤄지는 것과는 다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신씨는 자립 지원에 “실제 수혜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해달라”고 주문했다. 특히 “지금처럼 정부가 경제관리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자립정착금과 디딤씨앗통장(아동발달지원계좌·CDA) 등 경제적인 지원만 계속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경고했다. 극도로 억눌린 소비생활을 했던 시설 아이들이 갑자기 자립정착금과 디딤씨앗통장 지원금을 합쳐 1200만~1300만원을 받아 나오면 두세 달 안에 ‘탕진’하는 사례가 속출한다는 설명이다. 일부 당사자는 지난 4월부터 퇴소 2년 이내 보호 종료 자립생에게 월 30만원씩 주는 ‘자립수당’을 믿고 일단 빚부터 지고 보는 경우도 나타났다고 했다.

지역별·시설별·담당자별로 자립 지원의 내용과 금액에 편차가 심한 것도 당사자들을 ‘억울하게’ 만든다. 신씨는 “올해가 되어서야 500만원으로 통일된 자립정착금을 비롯해, (여전히 지자체별로 표준화되지 않은) 무연고자 장례 서비스, 개인 후원금, 자립 정보 제공 등 지원 제도는 ‘수도권 위주’라고 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도 정보 전달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립지원 제도에 반응(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태를 꼬집었다.

정부는 올해 주거지원통합서비스를 시작했다. 보호 종료 자립생을 대상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청년매입임대주택 240호를 지원하면서 자립 정보 제공과 자원 연계 등 ‘맞춤형 사례 관리’까지 해주는 진일보한 정책이다. 하지만 제대로 홍보되지 않은 지역이 많아, 당사자들에게 꼭 필요한 제도임에도 서울 이외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미달’ 사태가 벌어졌다. 기존 LH 주거지원이나 자립수당도 있는 줄 몰라서, 혹은 신청 방법을 몰라서 신청하지 않는 당사자가 많다. 신씨는 “우리끼리는 ‘주민센터 직원을 잘 만나야 지원받는 게 달라진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 찾아간 주민센터에서 몇몇 불친절한 지자체 담당자들에게 상처받은 친구들은 이후 모든 연락을 끊고 세상을 ‘적’으로 돌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당사자들이 필요한 지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가장 시급할 때 자립수당 지원해야”

국내 보호대상아동 정책 권위자인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토론회에서 ‘공급자 중심’ 자립지원 제도의 문제를 짚었다. 정 교수는 “다양한 나라들의 보호 종료 지원액을 확인했는데, 우리나라가 크게 뒤지지 않았다”며 “(문제는) 우리나라가 너무 공급자 중심으로만 지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자립수당 30만원 지원도 정 교수 등 많은 전문가들이 시행 전부터 우려했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퇴소 시점부터 2년간 매월 30만원씩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전달하는 쪽으로 시행됐다. 정 교수는 “퇴소하는 시점은 (자립정착금과 디딤씨앗통장 등으로) 아이들이 가장 풍족할 때”라며 “이때가 아닌 가장 시급할 때, 가장 필요할 때 ‘세컨드 찬스’(두 번째 기회)로 지원하도록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자립지원 정책을 논의할 때 주로 ‘경제적 지원’에 초점을 맞추지만, 당사자들의 고충과 필요를 잘 아는 신씨는 “심리 안정 지원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신씨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며 많은 자립생과 정보를 공유하고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나에게 연락해오는 친구들의 고민 중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은 ‘죽고 싶다’ ‘너무 힘들어서 상담받고 싶다’ ‘가족이 없으니까 의지할 곳이 없다’ 등 심리적 문제가 대부분이다.” 그는 이어 “내 경우 자립 선배들과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자립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며 “이미 취업·진학 등을 경험한 자립 선배들을 (멘토로) 활용하면 심리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땅과 물과 바람에 기대는 나무처럼

이날 토론회에는 사회사업가로 성공한 ‘자립 선배’인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도 토론자로 나섰다. 김 대표는 “보육원의 핵심 키워드는 자립이며 자립을 위해서는 일자리가 필요하다”며 “그런데 막상 일자리를 구해줘도 많은 자립생이 2~3개월밖에 버티지를 못한다”고 안타까운 상황을 전했다. 그는 “자립생들이 직장에서 버티지 못하는 건 어려서부터 받은 ‘내면의 상처’ 때문”이라며 “나 같은, 신선씨 같은, 먼저 상처를 회복한 선배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후배들이 선배들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자존감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말했다. “처음 나무를 관찰해보니 나무가 홀로 잘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관찰해보니 나무는 홀로 자라지 않고 땅에 기대고 물에 기대고 바람에 기대어 산다는 걸 알게 됐다. 양육시설 아이들의 자립 지원도 ‘홀로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존재를 연결해주는 것’, 궁극적으로 그 아이들이 ‘(후배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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