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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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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으니 일하게 해달라’는 경비원을 위해

질병 산재 승인율 30~50대 60% 중반, 70대 44.4%…

일반적인 젊은 노동자에 맞춘 기준 달라져야
등록 2019-10-29 08:29 수정 2020-05-02 19:29
경인 지역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입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근로복지공단 산하 기구로, 노동자의 재해가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는지 판단한다. 류우종 기자

경인 지역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입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근로복지공단 산하 기구로, 노동자의 재해가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는지 판단한다. 류우종 기자

필자는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다. 병원에 소속돼 작업장 환경의 위험 요인을 살펴보고 노동자의 건강 상태를 검사하며 결과에 따라 업무의 적합 여부를 판정한다. 아픈 환자들에 비해 노동자 건강 상담은 담담하게 이뤄지지만, 예외도 있다. 진료실에 들어오는 순간 나에게 90도로 인사하는 고령 노동자들의 경우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 직장에서 혹시나 건강 문제로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상담에 임한다. 신체적으로 일할 나이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것도 억울한 상황에서 그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가 더 분통 터진다. 이런 상황은 좀더 극단적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건강이 좋지 않은 고령의 아파트 경비직 노동자에게 “야간근무는 건강을 악화하니 그 일은 피하는 게 좋겠다”고 권고한 적이 있다. 그분은 “죽어도 좋습니다.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했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해야 하지만 아파도 임금 보상이 안 되는

안타까운 상황은 진료실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일하다 아파서 산업재해를 신청하면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젊은 노동자에 비해 이런저런 이유로 불승인당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2018년 질병 산재 통계를 보면 30~50대의 산재 승인율은 60% 중반대에 이르지만 60대가 되면 57.8%로 떨어진다. 70대는 44.4%로 더 떨어진다. 일하고 싶지 않지만 일해야 하고, 일자리는 충분하지 않고, 일하다 아파도 건강보험에서 상병급여로 임금을 보상해주지도 않고, 유일한 희망인 산재를 신청하면 쉽게 불승인당하면서 노인들의 좌절은 깊어가고 있다.

박씨는 68살인데 유치원에 소속돼 주로 차량 운전을 했다. 유치원의 각종 교구와 교재를 운반했고 유치원 식당의 식자재를 옮기기 위해 무거운 물건을 들기도 했다. 쓰레기 정리와 운반도 박씨 몫이었다. 박씨는 약 4년을 근무한 뒤 어깨 통증을 느꼈다. 병원에서 회전근개 파열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했지만 산재로는 승인되지 않았다. 불승인된 이유는, 첫째 중량물 작업이 일부 있었지만 상시적이지 않았고, 둘째 업무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며, 셋째 사진 소견상 퇴행성 변화가 보여 노화에 따른 자연적인 질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씨뿐만 아니라 고령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 산재 심의에서 불승인되는 ‘흔한 이유’다.

오씨는 62살로 아파트 경비직으로 일했다. 입사 한 달 만인 어느 날, 24시간을 근무한 뒤 추운 날씨에 아파트 피트니스센터 문을 열다가 쓰러져 사망했다. 이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에서 산재는 불승인됐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오씨는 기저질환으로 당뇨·고혈압·심부전이 있어 본인의 질환이 사망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근무 시간이 길긴 했지만 업무 강도가 높지 않았다. 셋째, 추운 날씨에 오래 노출되지 않아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골격계 질환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들로 고령 노동자는 뇌심혈관 질환의 산재 심의에서 불승인된다. 오씨는 술·담배를 끊고 당뇨와 고혈압을 잘 관리하면서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헛되이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개인의 기저질환이 사망에 그렇게 크게 기여했다면, 우리 사회는 오씨에게 24시간 근무를 시키지 말아야 했다. 무언가가 잘못돼 있다.

한국 실정에 맞는 노인 산재제도 만들어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4조 4항에는 산재 심의 때 노동자의 성별, 연령, 건강 정도와 체질 등을 고려하라고 돼 있다. 하지만 이런 법의 정신을 뒷받침해줄 만한 기준이 없다. 모든 산재 기준은 일반적인 젊은 노동자에 맞춰 있고,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 노동자가 그 기준을 맞추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고령 노동자의 산재는 쉽게 불승인된다.

고령 노동자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기준은 분명 문제가 있다. 나이 들면 뼈의 질량이 줄고 근섬유의 수와 크기가 감소해 근육량이 줄어들며 관절 활막이 탄력을 잃는다. 이렇게 되면 낮은 강도의 작업에도 쉽게 근골격계 질환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심장박출량과 심박동수가 줄고 말초혈관내성이 늘며 심근섬유의 탄력성이 감소해 심장이 쉽게 손상받을 수 있다. 이처럼 특성이 다르니 기준도 달라야 한다.

한국이 본받을 만한 ‘노인을 위한 산재제도’는 없다. 산재제도를 잘 갖춘 유럽은 고령 노동자가 적어 그들을 위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실정에 맞는 노인 산재제도를 만들기엔 아직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청년층과 달리 고령 노동자들이 따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라 지금까지는 문제가 있지만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고 있다.

사업장과 산업보건의는 적합한 일을 하도록 지도해야

하지만 문제는 확실하고 앞으로 더 심화할 것이다. 2017년부터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60대 이상의 고용률이 늘고 있다. 당장 내년에는 베이비붐 세대가 시작되는 1955년생이 만 65살이 된다. 정년퇴직 뒤 새롭게 찾은 비정규직 일터에서 그들은 사투를 벌일 것이다. 한국은 2018년 65살 이상 인구가 14% 이상인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7년 후인 2026년에 65살 이상 인구가 20% 이상인 초고령사회가 되면 고령 노동자의 산재 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지금 같은 제도로 일관한다면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미래는 달라져야 한다. 고령 노동자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도록 복지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만약 일해야 한다면 사업장과 산업보건의가 그들의 신체적 능력에 적합한 일을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러다 산재가 생기면 고령 노동자의 특성을 반영한 기준으로 적절하게 보상해줘야 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 자살률은 모든 세대에 균등한 반면, 한국에선 60대 이상부터 급격하게 늘어난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노인에게 비정한지 알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약자인 노인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철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환경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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