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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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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난 할 수 있는데

일자리를 갖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애인 노동자 6명
등록 2019-09-24 01:21 수정 2020-05-09 02:25
8월19일 경기도 김포에 있는 중증장애인 직업재활시설 ‘밀알꿈씨’에서 장애인 노동자가 형광등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8월19일 경기도 김포에 있는 중증장애인 직업재활시설 ‘밀알꿈씨’에서 장애인 노동자가 형광등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장애인도 사람이다!” “장애인도 국민이다!”
모든 소수자 운동이 그렇지만 장애인이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지위를 얻으려면 사람임에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외쳐야 했고, 국민임에도 “우리도 국민이다”라고 부르짖어야 했다. 자신들을 ‘투명인간’으로 대하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하나씩 뜯어고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사람이, 국민이 될 수 있었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집과 시설에 갇혀 있던 장애인이 하나둘 거리로 나왔다. 이들의 끈질긴 싸움으로 지난 30여 년 동안 교육, 이동, 사회서비스, 주거 등에서 장애인의 시민권이 조금씩 확보됐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중증장애인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일상생활에서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부지만 대학 교육 기회를 얻었다. 장애인들이 ‘정육점 고기’ 같다고 자조해온 장애등급제(장애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만들어 정부 지원을 차등화)도 지난 7월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된다. 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벽돌을 하나씩 쌓는 과정이었다.
튼튼한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벽돌은 무엇이 남았을까? 자유롭게 이동하고, 교육을 받고, 사회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에게 필요한 것, ‘노동’이다. 헌법 제32조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중략)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고 말한다. 현재 장애인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장애인일반노동조합 준비위원회’가 6월 발족해, 11월 정식 출범을 앞두고 있다.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노동 의지와 능력이 없다며 노동 현장에서 ‘유령’으로 취급받아온 장애인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장애인도 노동자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장애인도 자신의 장애 유형에 맞춰 일하는 노동자다. 중증장애인 박정혁씨가 장애인이 쓰는 인터넷 매체 <한결> 기자로 집회 현장을 취재하는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장애인도 자신의 장애 유형에 맞춰 일하는 노동자다. 중증장애인 박정혁씨가 장애인이 쓰는 인터넷 매체 <한결> 기자로 집회 현장을 취재하는 모습.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8년 장애인경제활동 실태조사(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를 보면, 장애인 실업률(15살 이상)은 6.6%로 집계된다. 전체 인구의 실업률 4.0%보다 1.5배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정부 통계의 ‘실업자’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장애인 단체들은 같은 통계에서 15살 이상 157만2146명의 비경제활동인구와 고용률(취업자/15살 이상 장애인 인구) 수치(34.5%)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시장 진입에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해고나 퇴사 뒤 재진입을 포기한 수많은 장애인이 실업률 통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계가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장애인 실업자’ ‘장애인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할까. 한 번이라도 일자리를 가진 경험이 있는 장애인 6명을 8~9월 서울, 인천, 경북 구미에서 만났다. 그들에게 노동이란 무엇일까.

주 5일 일하고 12만원을 손에 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투명인간’으로 취급받던 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투쟁으로 1990년 ‘장애인 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현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 제정되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현 장애인고용공단)이 설립됐다. 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민간기업에 장애인 고용을 의무화하고 정부가 장애인 고용을 위해 여러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인천에 살던 20살 박철영(현재 46살·가명·뇌병변장애)씨는 이런 사회적 흐름을 알 수도, 알지도 못했다. 1993년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 장애인직업재활시설에 취직했다. 뜰채를 만드는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휠체어를 타고 두 팔의 사용이 부자연스러운 중증장애인(뇌병변장애)에게 선택지는 없다. 공장은 특수학교 선배가 일하던 곳이다. 지금도 많은 중증장애인이 장애인 복지관이나 특수학교 선배의 소개로 일자리를 갖는다

박씨는 작업환경은 열악했지만 “이게 어디냐”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열심히 다녔다. 월급은 2만원이 안 됐다. 시설 담당자가 그를 좋게 봤는지 10만원까지 올랐다. 2000년 일터를 옮겼다. 40명이 일하는 작은 공장인데 커터칼 등 사무용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간단한 조립과 포장을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 5일을 일했다. 해마다 한 번씩 근로계약서를 썼다. 최저임금이 뭔지, 노동자 권리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2013년 일을 그만두기 전 월급명세서에는 60만원이 찍혔다. 실수령액이 20만원인데, 점심값을 내고 나면 12만원을 손에 쥐었다. 2013년 최저임금은 시급 4860원으로 하루(8시간) 3만8880원이었지만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 작업환경은 열악했고, 시설 담당 직원들은 박씨를 비롯한 장애인 노동자들에게 “빨리빨리 하라”고 혼냈다. 그는 ‘비장애인과 우리는 속도가 다른데’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참았다. 그만두겠다고 할 때마다 “이만한 데가 어딨느냐. 월급도 주잖아. 네가 어디로 갈 수 있겠냐”고 하는 어머니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시설을 다니는 동료 부모들의 마음도 그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빤한 형편에 그들을 온종일 돌볼 여력이 부모들에겐 없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었다. 퇴근하고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집에 가던 날, 저상버스 기사가 한소리를 했다. “장애인이 술 처먹고 이렇게 늦게 다녀도 되겠어?” ‘장애인은 늦게 다니면 안 돼요? 장애인은 출퇴근하면 안 돼요?’라고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삼켰다. 그가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생활을 끝낸 2013년, 전국에 511곳(근로사업장·보호작업장) 시설에 1만4739명(보건복지부 집계)의 ‘박철영’이 있었다. 직업재활시설은 중증장애인이 직무능력을 높여 ‘경쟁적인 고용시장’(비장애인과 일하는 일반 기업 등)으로 옮겨가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시설이 장애인의 노동력을 헐값에 착취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설에서 20년을 일한 박철영씨처럼 많은 중증장애인이 20대에 시설에 발을 들인 뒤 젊음을 고스란히 그곳에서 보낸다. ‘경쟁적인 고용시장’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철영씨는 현재 인천의 한 장애인 인권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한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기를 바란다. “비장애인보다 느릴 뿐 우리가 움직이는 것도 노동입니다. 느린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우리를 노동자로, 국민으로 보지 않는 게 잘못된 거 아닌가요.”

이미지 제고를 위해 고용되기도

민간기업들이 장애인 고용을 마냥 외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혜’ 차원이나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도구로 장애인 노동자를 찾았다. 박철영씨가 첫 일자리를 가졌던 1993년, 서울에 살던 강세하(49·가명·근육장애)씨는 대학 전공을 살려 건축설계사무소에 다녔다. 근육장애는 나이가 들면서 진행된다. 지금은 휠체어 없이 밖을 나가지 못하지만, 당시 그는 비장애인과 업무능력에 차이가 없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일자리를 잃었고, 몸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2001년 대한항공이 장애인고용촉진공단(현재 장애인고용공단)에 의뢰해 두 차례 항공예약 접수 업무(재택근무)를 할 장애인 60여 명을 뽑았다. 강세하씨도 그중 한 명이 됐다. 그는 당시 대한항공이 크고 작은 항공 사고로 위기에 몰렸고, 기업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장애인을 뽑은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 1991년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항공은 오너 경영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사례)다”라고 했고, 고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은 곧바로 경영에서 물러났다. 물론 그런 건 강씨에게 전혀 중요치 않았다. 괜찮은 일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6개월~1년마다 계약을 갱신했지만 최저임금보다 많은 돈을 받았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2007년은 “비정규직 근로자를 2년 이상 고용할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된 해다. 법을 악용한 일부 기업에 다니는 비장애인 노동자도 2년이 되기 전에 해고되는 일이 많았다. 회사는 국내선 접수를 맡던 그와 동료들에게 조건부 정규직화를 제시했다. 국제선 접수 업무로 전환하고 별도의 테스트(시험)를 거쳐 일정 점수를 넘어야 정규직이 될 수 있었다. 그는 테스트에 떨어졌다. 당시 3명 정도 회사에 남고 나머지는 다 어쩔 수 없이 그만둔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무직 상태라는 긴 터널에서 올해 빠져나왔다. 공공일자리인 장애인인식개선 강사(2018년 도입)가 돼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에서 강의하고 있다. “(무직 상태인) 지난 10년 동안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자는 의미 없는 생활만 반복했는데, 인제야 사는 재미가 다시 생기네요.”

박철영, 강세하씨의 청춘이 지나가는 동안 교육권, 이동권 등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이 조금씩 낮아졌다. 조금 더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삶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젊은 장애인들’의 욕구가, 꿈이 그만큼 커졌다. 하지만 노동시장 앞에서 그들은 선배 세대와 마찬가지로 무력했다.

8월13일 경북 구미 장애인 체육관에서 만난 중증장애인 정하송(29)씨. 이승준 기자

8월13일 경북 구미 장애인 체육관에서 만난 중증장애인 정하송(29)씨. 이승준 기자

월급 미지급에 항의했더니 “우리 회사 직원 아니다”

경북 구미에 사는 정하송(29·뇌병변장애)씨는 2년제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2011년 취업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휠체어를 타지만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장애인용 특수 마우스를 다루고 느리지만 키보드도 쓸 수 있다. ‘장애인 채용’ 공고를 보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안 뽑는다”는 답을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어눌한 말투 때문일까 싶어 매번 자책했지만, ‘장애인 채용’이라는 문구가 ‘심하지 않은 장애’를 가진 이들만 오라는 뜻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장애인 의무고용을 이행하려는 기업들은 ‘경증’장애인부터 찾는다. 한번은 면접을 보러 갔는데 이력서와 그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인사담당자도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2013년 여름 작은 회사의 사무보조로 취직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지만 6개월을 넘지 못했다. 허드렛일만 하던 그는 6개월 동안 월급을 거의 받지 못했다. 노동청을 찾았지만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다”라는 회사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그 뒤로 겁이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보통의 회사’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비록 장애인이지만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쓴 이력서는 여전히 그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다.

정하송씨와 같은 대학을 다닌 고동구(28·가명·지적장애)씨는 일자리를 쉽게 찾았다. 신체적 능력은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고, 기본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2011년 2월 졸업 뒤 장애인 복지관에서 소개한 요양병원 몇 군데에서 1~2년씩 일했다. 중증환자인 어르신들을 병실 휠체어에 태워 치료실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최저임금에 준해서 월급을 받았다. 문제는 언제나 요양병원 선생님들과 ‘트러블’(문제)을 겪고 해고되는 것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융통성’이다. 고동구씨는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어르신을 병원 휠체어에 태워야 하는데, 지정 장소에 휠체어가 없으면 휠체어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매번 어르신들을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치료실로 데려갔고, 선생님들에게 “변명만 한다, 거짓말을 한다”고 혼났다. 그의 꿈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휠체어 소리 좀 내지 마라” 소리 듣기도

인천에 사는 서미현(31·가명·뇌병변장애)씨는 드라마 작가를 꿈꾼다. 일주일에 한 번 서울 여의도에 있는 드라마 작가 양성 과정 수업을 듣는다. 웹하드 불법 복제물을 단속하는 한국저작권보호원의 단기계약 일자리(재택근무)로 수업료와 용돈을 번다. 휠체어를 이용하지만 두 팔과 두 손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어 행정 업무를 하는 데 지장은 없는 편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불법 복제물을 찾고 월 88만원을 받는데 그가 그동안 해온 일에 견줘 ‘꿀’ 업무다.

서미현씨는 2년제 대학에서 재활복지를 전공하고, 2010년 2월 졸업 뒤 장애인 복지관이나 민간 병원에서 6개월~1년씩 일했다. “큰 차별은 없었다”고 하지만 복지관에선 20만원 안팎의 급여를 받으면서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왜 저런 애를 쓰냐”는 어르신들의 호통을 들었고, 환자 등록 업무를 하던 병원에선 상사에게 “휠체어 소리 좀 내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나마 서씨는 다른 장애여성보다 나은 형편이다. 고용노동부 조사를 보면 장애여성은 고용률이 장애남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드라마 작가가 꿈이지만 서씨는 계속 일자리를 찾을 생각이다. 수업료를 내고 커피도 마시고 친구들과 만나고 싶지만 부모에게 손 벌리기는 싫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못돼처먹은 장애인’이 주인공인 드라마 대본을 쓰고 있다. “장애인은 왜 매번 착하게만 묘사되죠?”

지자체 공무원 예선우(29·가명·시각장애)씨는 3~4살 때부터 시력이 나빠졌고, 대학 때 실명했다. 하지만 현재 비교적 만족한다. 사회에서 말하는 ‘명문대’에 장애인 전형으로 합격했다. 기자직을 꿈꿨지만 ‘시각장애인 기자’는 들어본 적이 없어 포기했다. 대신 중증장애인 공무원 채용에 도전해 졸업할 즈음인 2015년에 합격했다. 그는 텍스트(활자)를 음성으로 전환하는 시각장애 보조 프로그램을 이용해 업무를 한다. 그는 보조 프로그램만 잘 활용하면 자신의 업무능력이 비장애인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증장애인도 일터에서 직장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인사이동 뒤 새 상사가 초기에 업무를 잘 주지 않는 것도 장애인 동료를 낯설어해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고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정부 내부망’이다. 일반 누리집은 웹 접근성 표준을 준수하기 때문에 음성 변환 프로그램이 작동하지만, 정부 내부 시스템에 접속하면 잘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주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중증장애인 공무원 특별 채용이 10년이 조금 넘었더라고요(2008년 시행). 나 같은 사람이 계속 부딪히다보면 조직에 경험이 쌓이고 뭔가 달라지겠죠.”

여전히 부담금 내는 게 유리하다

박철영씨가 첫 일자리를 가졌던 1993년 장애인의무고용 이행률(300명 이상 사업장)은 22%였다. 당시 신문은 “의무고용 대상 업체의 78%가 장애인 고용 대신 부담금을 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부담금 납부로 대체 이행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경향신문> 1993년 4월20일치)고 보도했다. 정하송·고동구·서미현씨가 취업시장에서 분투하던 2018년 의무고용 이행률(50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은 45.5%였다. 여전히 “기업들이 부담금을 내는 게 유리하다”는 분석이 따른다. 2018년 장애인경제활동 실태조사를 보면 장애인 임금노동자의 68.7%는 50명 미만 업체에서 일했다. 대부분의 장애인 구직자와 노동자(특히 중증장애인)는 규모가 작은 회사의 계약직 일자리 주변을 맴돌며 불안정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비장애인 중심 일터에서 유·무형의 차별과 혐오라는 벽을 마주한다.

여전히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꿈꾸는 정하송씨는 2010년부터 블로그에 꾸준히 시를 쓰고 있다. 그는 2016년 ‘느려도 난 할 수 있는데…’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난 할 수는 있지만/ 단지, 부족한 점은 느리다/ 난 할 수 있는데/ 나도 해보고 싶은데/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빨리빨리 하라는 소리에/ 겁이 나고 (중략)/ 느려도 난 할 수 있는데…” ‘정하송들’의 마음을 우리 사회는 언제쯤 제대로 받아안을 수 있을까.

구미·인천=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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