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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계절 청춘을 놓아버린 때가 있다

2011~2019년 D공고 자동차과 졸업생 20명 연대기

제1279호
등록 : 2019-09-09 02:13 수정 : 2019-09-1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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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공고 자동차과 실습실의 모습. 3년 동안 32명이 울고 웃은 곳이다. 류우종 기자

2011년 2월 <한겨레21> 제849호에 6쪽짜리 기사가 실렸다. ‘어느 전문계고 졸업생 32명의 폐기된 꿈’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2019년 8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종만(가명)이 기사를 넘겨본다. “폐기, 폐기라…” 읊조리며 웃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동차 전문가의 꿈을 안고 2008년 D공고 자동차과에 32명이 입학했다. 학과 정원이 딱 한 반 규모라, 3년 내내 한 교실에서 정을 보태며 지냈다. 기사가 나왔던 졸업 즈음, 자동차과(3학년 1반) 32명은 다른 진로를 찾거나 자동차 정비업체 직원 정도로 꿈을 낮췄다. 가명으로 기사에 적힌 한 사람, 한 사람을 추측해보며 즐거워하던 종만이 묻는다. “그런데, 다들 잘 살고 있겠죠?”

다들 잘 살고 있을까? 졸업식이 끝나고, 서로의 안부는 아스라이 소문을 타고 친구들 사이를 띄엄띄엄 번질 뿐이었다. 갈린 채, 세상에 나와 2010년대를 20대로 버티는 동안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줄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그사이, 전문계고는 특성화고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정부는 ‘고졸 취업’의 성공 사례를 전파하느라 분주했다. 한쪽에서는 특성화고를 졸업한 후배들의 죽음이 전해졌다. 준비 안 된 현장 실습에 무리하게 내몰렸다고 했다. 고졸 취업 활성화 대책을 뜯어볼 여유도, 후배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여유도 D공고 졸업생들에게는 없었다. 그저 흘러흘러, 때와 상황에 맞춰 일감을 찾아 떠돌거나,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 쉬었다. 그렇게 청년과 청춘을 향한 우려, 찬양, 주장, 대책의 수혜자였고 때로 피해자였다. 고맙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애초 세상이 말하는 ‘청년’이라는 단어에 자신들이 포함되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D공고 졸업생 서른두 명 가운데 스무 명을 다시 만났다. 대화는 때로 2시간 가까이 이어졌지만 질문은 사실 별게 없었다. ‘잘 살고 있었나요?’

세상이 좀처럼 해주지 않던 질문을 받아들고, 졸업생들은 조심조심 말을 골랐다. 첫 일자리를 거쳐, 전문대를 거쳐, 군대 시절을 지나, 다시 새 일자리, 그리고 또다시 새 일자리, 그 사이사이 아르바이트,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가족의 불행… 8년을 채우는 사건의 목록은 막상 말해놓고 보니 끝없이 길었다. 특성화고를 졸업해서, 90년대생이라서, 부모님이 부유하지 못해서 겪은 일인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내 운명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긴 시간 나누지 못했던 2011년 D공고 졸업생 스무 명의 안부를 전한다.


하어영·방준호 기자 haha@hani.co.kr

2011년 <한겨레21>은 D공고 자동차과 졸업생 32명을 만났다(제849호 ‘어느 전문계고 졸업생 32명의 폐기된 꿈’ 참조). 입학 때 장래희망이 졸업식을 앞둔 시점에 어떻게 남았는지 물었다. 32명이 품었던 꿈은 3년 만에 뭉개져 희미해졌다. ‘자동차’가 좋아서, 그것만 바라봐도 먹고살 수 있다는 말에 들어선 길이었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자동차 만드는 대기업에서 고졸 생산직은 필요하지 않다고 한 지가 꽤 오래됐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남은 것은 수리, 정비였다. 현장실습 대부분이 공업사(카센터)였다. 그마저도 최저임금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25명이 자동차에 대한 꿈을 살리려 대학에 갔다(2011년 대학 입학 기준). 이들은 당시 연일 들려오는 국내 자동차업계 활황 소식에 기대를 걸었다. 대기업이 (전문)대졸 중 특기(차 도색 등)에 따라 일부 생산직을 뽑을 수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당시 특성화고 특별전형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전문대학 진학은 어렵지 않았다. 대학 정원에 비해 지원자 수가 줄어 경쟁률도 높지 않았다. 일부 대학에서는 진학설명회를 올 만큼 학생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취업을 택한 것은 5명이다. 그나마 자동차 쪽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상덕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무대설비업체로, 기계조립업체로, 공원관리업체로, 휴대전화를 만드는 대기업 하청업체로 전공과 무관하게 흩어졌다. 32명 중 2명은 결국 취업도 진학도 결정하지 못했다. 친구들 사이에는 그들이 군 입대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다.

8년이 흘렀다. 지난 8월 D공고를 다시 찾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이들이 살아낸 2010년대가 궁금했다. 32명 가운데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20명이다. 이름은 공개를 원치 않아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2011년

얼차려 받아서, 눈이 부어서

설레는 대학 교정마다 꽃이 피었다. 울긋불긋한 꽃 옆에서 방황하고 갈등하고 때로는 유보한다. 포기도 허락된다. 젊으니 더욱 그렇다. 32명 중 25명이 대학생이 된 D공고 출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그 규모와 속도다.

우선 1학기를 넘기지 못한 게 4명이다. 사실상 대학생활을 하지 못한 우철을 포함하면 5명으로 늘어난다. 자동차 전공이 2명, 나머지는 항공, 호텔조리, 회계 등이다. 군에서의 사고로 이탈한 사례 하나를 더하면 넷 중 하나는 대학을 그만둔 셈이다.

각각의 이유를 묶어보지만 이를 온전하게 드러낼 보편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시시하거나 두렵거나, 다 제각각이다.

예비후보였다가 뒤늦게 4년제 지방대학에 합격한 성준의 경우 합격하고 보니 ‘인서울’(서울 소재 대학) 욕심이 생겼다. 자동차 실습 시간에는 조교보다 한 수 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강의실에서 듣는 수업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란스러웠다. ‘인서울’ 대학을 가고 싶은 욕망과 지방대 강의도 버거운 자신의 처지가 뒤섞였다. 대학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회계를 전공한 우철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4년제 대학 합격자인 주영과 달리 고등학교 시절 사교육의 경험이 없었다. 주영은 대학 합격 뒤 학원을 그만두지 않고 인문계 수준에 맞추기 위해 공부(수학)를 계속했다(결국 주영은 대학 졸업에 성공했다).

일부는 돌발 상황에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영남은 첫날, 수업 대신 얼차려를 받았다.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됐다. 등록금이 아까웠다. 돈이 아까우니 참고 다니는 게 순리였을 것이다. 결론은 ‘때려치우자’였다. 현수는 더 즉흥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부어 ‘그냥’ 가지 않았다. 그날로 대학은 끝이었다.

고등학교였다면 학교와 가정이 나설 수 있었을까. 하지만 새내기의 방황을 책임져주는 대학은 사실상 없다. 가정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모두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이거나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 둘 다 공장에서 야근하며 생계를 이어온 영남이나 병주, 성용, 탈북자로 가정을 힘겹게 꾸려가는 우철의 부모는 이들이 방에 처박히거나 거리를 배회할 때 함께 머리를 맞댈 여력이 없었다.

2012년

군대, 평생을 걸어도 될 곳

20명 가운데 병역 면제를 받은 2명을 제외하고 18명이 정비병(또는 운전병)이 됐다. 누군가에게 지옥 같은 군 시절이 이들에게는 일만 하면 인정받는 호시절이었다. 이들에게 군대라는 공간은 졸업 뒤 인정욕구가 충족되는 경험 그 이상이다. 사고를 당해 꿈이 좌절되거나 진로를 바꾼 이들조차 군 시절을 후회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성용은 전역 6개월을 남기고 정비하던 군용차에 깔렸다. 차가 등 쪽으로 내려앉는 순간 피했지만 팔이 깔렸다. 몇 달 동안 손가락을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남은 군 생활을 병원에서 보내고 국가유공자가 돼 한 달에 45만원을 받는다. “차는 꼴도 보기 싫지만” 군대를 떠올릴 때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봉주는 제대를 한 달 앞두고 후임병이 찬 축구공에 머리를 맞았다. 뇌진탕 판정을 받고 군 병원에서 전역했다. 결국 부사관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는 “영화처럼 쓰러졌다”거나 “웃으면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 든다”면서 웃었다.

군은 일부에게는 평생을 걸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장래희망으로 직업군인을 쓴 사람이 3명(정수·병관·준기), 졸업 뒤 부사관이 되겠다고 결심한 게 2명(병주·봉주)이다. 이 가운데 두 사람이 뜻을 이뤘다.

2013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얻은 일자리

처음으로 대학(전문대)을 졸업한 동기가 나왔다. 성배는 아동양육시설에 살면서 군 면제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정도로 아르바이트에 몰두했다.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모르는 성배에게 세상에 나간다는 의미는 반 친구들과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설에서 나와 학비, 생활비를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시설에서 나올 때 손에 쥔 돈이 1천만원. 그 돈으로 전문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취업도 급했다. 세세히 따지지 않고 중소 규모 건설업체에 들어갔다. 철야는 기본, 일이 고됐다. 야근수당은 없었지만 항의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 달에 120만원을 손에 쥐었다.

부모와 함께 탈북한 우철도 군 면제였다. 경기도 파주의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일했다. 대표가 대기업 쪽의 친척이라 일이 몰렸다. 주야 2교대에 퇴근 시간은 들쭉날쭉했다. 2주 야간근무 뒤 휴식일은 딱 하루였다. 라인에 들어가면 눈 돌릴 틈도 없었다. 특성화고에서 배운 손재주 덕에 일머리가 있어 6개월 만에 정규직이 됐고, 3년을 더 다녔다.

첫 번째로 제대한 친구도 나왔다. 입학식도 치르기 전에 대학을 ‘그냥’ 그만둔 현수다. 대학은 이미 마음에서 지웠다. 돈벌이를 찾았고 마침 친구네 집에서 차린 치킨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수완이 좋아 지점도 운영해봤고, 여기서 3년을 더 일했다.

현수는 친구와 함께 맥줏집을 차렸다. 언젠가 자기만의 가게를 낼 계획이다. 현수 제공

2014년

아르바이트는 해도 공무원 시험은 안 봐요

썰물처럼 입대한 이들이 밀물처럼 밀려나와 취업 출발선에 다시 섰다. 2년 만이다. 대학을 이탈하거나 고졸 상태로 군대를 간 9명(2013년 전역한 현수 제외)이다.

이들 가운데 3명이 자동차 전공을 살려 취업했다. 각각 지엠(GM), 르노삼성, 기아차 등 국내에 생산 기지를 둔 대기업이다. 하지만 이들이 들어간 곳은 모두 정비업소다. 그나마 이들 모두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른 업체로 옮겼다. 군 입대 전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급여는 최저임금이거나 이에 미치지 못했다.

영남은 주 6일 야근수당 없이 밤까지 일하고, 첫 달 80만원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수입만도 못한 상황을 버티기 힘들었다. 친구 소개로 술집에서 일을 찾았다. 홀 서빙은 월 170만원을 받았다.

성준(140만원)도, 상덕(150만원)도 근무환경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버텨냈다. 이들이 말하는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간명했다. 하고 싶었던 일이고, 다른 일은 할 자신도 없었다. 영남이와 달랐던 점은 또 있다. 부모와의 관계다. 성준은 D공고 입학 때 “나를 설득해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상덕이네는 어머니의 병환으로 형편은 어렵지만 불화 없이 생활했다. 결국 경력을 쌓은 두 사람은 경쟁업체에서 먼저 이직을 제안해와 연봉을 올려 이직했다. 자동차 꿈을 접은 성용은 결국 인테리어와 관련한 일을 성실히 찾아다녔다. 1년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인 캐드(CAD) 자격증, 시내 건축기능사·전산 운용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14명은 전역 뒤 대학으로 복귀했다. 물론 4년제에 입학한 주영을 제외하면 20대 복학생의 전형처럼 묘사되는 공무원 시험이나 토익을 공부하는 모습을 이들에게서 찾기는 어렵다. 교집합이라면 아르바이트 정도다. D공고 시절 4년제 자동차 전공 학과를 목표로 3년을 공부한 주영은 달랐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님의 수입이 줄었지만 복학을 유예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동차 전공 공부와 함께 영어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원에도 다녔다.

진학과 취업 모두 유보된 경우도 있다. 봉주가 제대한 뒤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는 전라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책임지고 아들 셋은 아내에게 맡겨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이제 가족이 병 간호를 맡아야 했다. 두 형은 구직 중이었다. 막내 봉주 말고는 나설 형편이 안 됐다. 아버지 곁을 지켰다.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까지 1년이 걸렸다. 입대 전 모아놓은 1천만원이 다 없어질 즈음이었다.

2015년

마지막 계층 사다리, 비정규직 첫차

D공고 동창생 같은 반 가운데 대기업 정규직이 나왔다. 홍철을 시작으로 자동차보상과를 간 인규, 석영 등이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양복쟁이가 됐다. 졸업 당시를 기준으로 치면 세 사람은 모두 차상위계층 이하의 삶이었다. 300만원 중반대 월급을 받게 되면서 계층 사다리를 오를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입사 2년 뒤부터 홍철은 매달 200만원씩 적금을 넣었고, 이듬해 평수를 늘려 이사를 갔다. 홍철의 적금액은 같은 반 출신 중 이례적으로 많은 편이다. 집 규모를 늘린 것은 인규네도 마찬가지였다. 석영 또한 여자친구와 결혼을 떠올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이들은 서로에게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신설된 자동차보상학과 1기생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때마침 고용노동부와 교육부가 나서서 전문대 졸업자 취업 활성화 대책을 잇따라 내놨다. 이 모든 것이 이들에게는 운으로 보였을 수 있다. 이후 D공고에서 이들의 경로를 밟아 대기업에 들어간 사례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자동차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 빠르게 양복쟁이가 된 3명과 달리 성준, 상덕, 범수처럼 고집스럽게 ‘정비’를 업으로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3명은 자동차 ‘만지는’ 일을 하겠다는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 이들에게 기회가 열렸다. 자동차 시장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다. 세 사람 모두 수입차 업체로 자리를 잡은 것은 시장 흐름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었다. 2010년 9만 대이던 수입차의 총판매량은 2014년 19만 대로 두 배 이상 늘어나더니, 2015년에는 20만 대를 훌쩍 넘어섰다. 성준은 4년제 지방대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르노삼성 정비소에서 일한 지 1년 만에 벤츠코리아로 옮겼다. 상덕도 국내 최대 자동차업체 정비소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BMW코리아로 자리를 바꿨다. 범수가 전문대를 졸업하자마자 자리를 잡은 곳도 벤츠코리아다. 이들의 업무가 단순 정비에서 부품관리(범수), 수리시 고객 상담(상덕) 등으로 분화한 것도 폭증한 서비스 수요 덕분이다. 세 사람 모두 정규직으로 200만원 중반대 급여를 받았다.

D공고 자동차과 졸업생들의 구직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원용은 D공고 자동차과 출신 대개가 그렇듯, 국내 대기업 자동차 생산직이 되고 싶었다. 막상 전문대 졸업이 다가왔지만 국내 대기업 생산라인에 원용이 들어갈 자리는 나지 않았다. 궤도 수정이 필요할 즈음 교수가 원용에게 오스트레일리아 취업을 권했다. 해외취업 ‘케이무브’(K-Move)였다. 한 해 전 고용노동부, 국토부, 산업부 등 관계 기관이 공동으로 내놓은 청년 일자리 대책의 하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연일 “한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청년들이 지금이라도 빨리 해외에서라도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면 한다”며 독려했다.

원용에게 자동차 회사라면 울산이든 오스트레일리아든 상관없었다. 문제는 영어였다. 원용은 낮에 차량 도색 연습, 밤에는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면접에서 탈락했지만 이유를 알기 어려워 재도전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일을 찾아야 했지만 대학교가 있는 경북에서 서울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모색할 상황도 아니었다. 군 복무 때 부모가 이혼해 서울로 돌아가도 살 집이 마땅치 않았다.

원용이 참가한 ‘케이무브’가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일자리 사업이라면, 용래가 합격한 공기업 청년인턴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표 사업이었다. 한국교통안전공단 검사소에서 인턴을 마친 용래는 공단에 정규직으로 돌아오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시험(필기-면접)이란 문턱이 있었다. 시험 준비를 위해 당장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일단 급한 대로 국내 업체의 정비소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면서 돈을 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200만원이 채 안 되는 급여지만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2년을 일하면서 공부했다. 하지만 필기시험 합격부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 등 주변의 지원을 얻지는 못했다. 선배들은 자동차업계에 불황이 올 것이라며 자동차보다 다른 일을 찾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의 참변

이 시기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만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 일자리의 효율을 따져 없애거나 외주화한 것도 이때다. 보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동차가 아닌 설비 관리 일을 시작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기계조립업체라 안정성으로 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200만원 조금 넘는 급여도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군 제대 뒤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복직 몇 달 만에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가 외주화되면서 신분이 시 산하기관 공무직에서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바뀌었다. 공공부문에 외주화 물결이 밀려든 것이다. 보경이 근무하는 곳만 아니라 산하기관 곳곳의 유지·보수 부문이 외주화됐다.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사람들은 갈 곳을 찾아 이직했다. 보경은 일단 더 근무하기로 했다. 방송통신대를 나오면 고졸인 현재 상태에서 옮기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외주화된 설비, 안전 부문에서 탈이 난 것은 이듬해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특성화고 출신인 김아무개씨가 2인1조 작업을 혼자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보경보다 5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보경은 처음으로 이직을 생각했다.

2016년

골프와 소길댁, 먼 듯 가까운 그들

스물네 살, 여전히 젊다. 4년제 대학 남학생이라면 취업 준비에 골몰할 때다. D공고 출신들에게 이 나이면 취업은 막차다. 이직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선택은 점점 더 쉽고 빨라졌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삶이 바뀌기도 할 만큼.

스물네 살 병주가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

4월 박근혜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왔다. 활짝 웃으며 “골프 치시라는데 왜 안 치시냐. 내수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정부의 골프 활성화 방안이 쏟아진 것은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지역의 골프장들은 호황을 맞았다. 골프 인구가 늘어나자 골프장 인력 수요도 늘어났다. 자동차(기계) 쪽 일을 하던 정수와 용래는 이 흐름에 올라탔다. 정수는 전역한 뒤 (자동차)기계부품 업체에서 일했다. 골프장에서 일하는 여자친구를 만났고, 급여 수준을 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표를 썼다. 어렵지 않게 충청권의 한 골프장에서 캐디가 됐다. 200만원이 조금 안 되던 월수입이 두 배 이상 올랐다.

용래도 자동차 정비소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다가 이듬해인 2017년 캐디가 됐다. 집 근처 경기도의 한 골프장 채용 공고를 보고서다. 수입이나 근무조건은 정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저녁 8시(비수기 1시)에 퇴근하는 일이니, 시간당 수입으로 치면 대단한 고소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비수기에는 수입이 줄었다. 그것을 고려해도 당장 손에 쥐는 돈이 이전보다 많으니 후회는 없었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었다. 정수도, 용래도 캐디만으로는 길어야 30대 후반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정수는 골프 관련 업체 등에서 ‘투잡’을 뛰기 시작했다. 용래도 제대 직후 잠시 인턴으로 일했던 교통안전공단 검사소의 정규직이 되기 위해 다시 책을 펼쳤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출제하는 국가직무능력표준시험(NCS)과 자동차 관련 과목을 공부했다. 수입이 지금보다 많이 줄더라도 그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바람을 탄 건 정수와 용래만이 아니다. 2013년부터 제주도 유입 인구가 1만 명을 넘더니 2년 만인 2015년에는 1만5천 명에 육박했다. 가수 이효리씨는 ‘소길댁’이란 별명을 얻으며 제주 이주의 상징이 됐다. 사람이 느니 주거시설부터 휴양시설까지 건설 붐이 일었다. 전문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다음 120만원을 받고 중소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던 성배가 직장을 제주도로 옮긴 것도 이때다. 먼저 내려간 옛 직장 동료가 성배에게 제주 취업을 제안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꿈꾸던 설계를 할 기회라고 했다. 연봉도 2천만원대에서 3천만원대로 올릴 수 있었다. 성배는 아동양육시설 출신 친구들과 시작한 온라인 의류사업이 망해 빚 수천만원을 떠안은 상태였다. 서울에서 월세를 내면서 대출을 갚기는 벅찼다.

같은 반 동창이 처음으로 결혼했다. 중학교 친구와 결혼한 병주다. 부사관 임관 3년차였다. 스스로 “도박”이라며 웃었지만, 2천만원이 갓 넘는 박봉에 홑벌이임에도 병주가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군에서 사들여 살게 해준 관사 아파트 덕분이다.

범수는 출근하자마자 작업장을 정리한다. 평생직장이길 바란다. 범수 제공

2017년

이력서를 채워가는 방식

유일하게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주영은 졸업 전 취업에 성공했다. 전공을 살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중견기업 정규직으로 들어갔다. 주영의 6년은 미디어에 흔한 전형적인 20대의 삶이었다. 자영업을 하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됐다. 걱정 없이 사교육을 받았다. 주영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고, 어학 점수를 따기 위해 준비했다. 공대 출신인데다 대기업을 고집하지 않으니 취업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입사해보니 현장 분위기가 예상과 달랐다. 취업이 4년제 대학을 다닌 또래보다 너무 빨랐다. 그렇다고 빠른 취업으로 경력을 쌓는 것이 유리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스펙을 쌓고 들어와 제구실을 하는 두세 살 위 동기들이 인정을 받았다. 대학 시절에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면서 ‘차라리 기술을 배워 일찍 취업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가끔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세상에 나와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과 특성화고를 졸업한(이어 전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그려가는 삶의 궤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또래가 다른 세상을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친상에서 만난 친구들

주영의 고민 맞은편 어딘가에 봉주가 있었다. 돈이든 근무환경이든 조건만 맞으면 일터를 옮겼다. 세 번째 직장에서 1년5개월이 지났을 즈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봉주는 주저 없이 사표를 썼다. 어차피 공장 일이니 전문성이나 경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병간호로 석 달이 지날 무렵, 아버지가 회복하는 듯했다.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경력을 쌓을 만한 안정된 곳을 가고 싶었다. 평생 농사만 짓다 몸이 망가진 아버지처럼, 몸을 혹사하는 공장 일만 할 수는 없었다.

고향 친구를 통해 건물 안전관리 업체를 소개받았다. 계약직이라는 게 걸렸지만 경력이 쌓이면 공기업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들었다. 일이 ‘빡세지’ 않아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출근할까 망설이던 때, 회복하는 듯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자동차보상을 전공해 대기업에 취직한 홍철, 창민, 군인이 된 병주가 문상을 왔다. 모두 안정된 직장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부친상을 치르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공장과 대형 아파트 단지 내 시설 관리를 주로 하는 업체였다. 보경의 회사처럼 중소기업이나 대형 아파트 단지에서 시설 관리를 외주화해 생겨난 회사다. 안전 업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당 최대 96시간씩 일하기도 했다. 24시간 맞교대임을 고려하면 꼭 급여가 많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취미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 친구의 말이 진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9급 기능직 공무원이 어떨까, 다시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8년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정규직 경험 없이 단기 아르바이트나 파견근로를 전전한 경진과, 자동차 업종을 떠나 이직을 거듭하던 우철과 영남이 돌고 돌아 정박한 곳은 반도체 업계였다. 이들이 전공한 자동차산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이, 반도체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2017년 반도체 수출은 979억달러(약 117조원)로 사상 처음 단일 품목 연간 수출액 900억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7%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경진은 지난 3년 동안 건설 일용직부터 전단지 돌리기, 음식 배달, 미니바를 채우는 호텔 잡무 등 번번이 몸 쓰는 일을 택했다. 취업이 안 됐다기보다 경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전문대에서 자동차보상과를 택한 D공고 출신 6명 중 유일하게 다른 직종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D공고 출신 친구들과 함께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보험사 인턴을 했고,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다른 업체 지원은 하지 않았다. 보험 일을 계속하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3년을 방황한 끝에 직원 30명 정도의 소규모 반도체 설비업체에 들어갔다. 매일 아침 7시20분까지 경기도 한 지역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출근해 반도체 라인에 진공배관을 설치했다. 3년쯤 지나면 현재의 보조 업무에서 벗어나 기술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일도, 함께하는 사람도 만족스럽다.

우철도 삼성에 반도체 설비를 납품하는 업체에 취직했다. 네 번째 이직이었다. 경기도 오산으로 거주지도 옮겼다. 우철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삼시 세끼를 회사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출근 뒤 갖는 여유 시간도 좋았다. 아침 6시면 눈을 떠 출근을 서둘렀고, 회사 체력 단련장에서 운동한 뒤 아침밥을 먹었다. 이번에는 되도록 오래 다닐 생각이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교육비 80만원으로 서울에서 반도체 관련 교육을 받고 있다.

한나절 수리하고 나면 녹초

자동차 쪽 일을 포기하고 술집에서 일하던 영남이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여자친구 덕이다. 2년 전까지 여자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모터 부품 업체에서 1년여 일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타워크레인 정비 기술을 배웠다. 때마침 한 건설업체에서 타워크레인 정비 보조 업무를 제안했다. 경기도 쪽에 반도체 생산 공장을 대규모로 증설하면서 타워크레인 수요가 대폭 늘었다. 당연히 이를 정비하는 인력이 필요했다. 연봉이 4천만원이 넘었고, 2년 뒤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다시 한번 이직을 결심했다. 이번에는 돈을 모아 여자친구와 결혼하고 싶었다.

물론 일은 쉽지 않았다. 여름 무더위에 달궈진 몇십m 고철덩어리 타워크레인에 올라 한나절 수리하고 나면 녹초가 됐다. 동료들과 술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힘들어도 견뎌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상에서 반지하로, 방 세 개에서 두 개로, 밑으로 줄어드는 삶이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dum spiro spero’. 그때 팔뚝에 새긴 글귀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영남이는 힘들 때마다 이 글귀를 본다. ‘Dum spiro spero’(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영남 제공

2019년

씀씀이를 줄이자!

피자·치킨 먹은 지 오래

1년 만이다. 경진은 갑작스럽게 닥친 반도체업계의 불황을 체감하고 있다. 일감이 없어 주 5일을 채우지 못하는 때가 많다. 최근 회사에서는 무급휴가를 권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도 단단하던 경진은 지금이 위기의 순간이라고 느낀다. 같은 업계에 있지만 우철 쪽도 불황의 기운이 감지된다. 수주 물량이 여전하니 당장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불안할 만도 한데 우철은 금요일 근무가 끝나는 대로 서울로 가 주말을 보낸다.

5일 150만원 학원비 엄두가 안 나

원용은 오스트레일리아 취업에 실패한 뒤 지방의 한 건축회사에 들어가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 돈으로 해외 취업을 알선하는 학원에 등록했다. 일본취업반을 거쳐 지금은 일본 교토 인근 시가현에 있는 반도체업체에 다닌다. 해외 취업에 성공한 셈이다. 일본어가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취업해, 일단 목표는 버티기다. 아침에 출근해 일본어로 된 근무일지를 읽기도 벅차다. 더듬더듬 읽고 작업에 들어간다. 일본에 오자마자 사귄 일본인 여자친구는 방탄소년단을 좋아해 한국에 가자고 조른다. 하지만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은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

봉주는 24시간 맞교대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예전보다는 집에 갈 맛이 난다. 중소기업청년대출로 4천만원을 빌려 원룸에 들어갔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혼자 살 만한 크기다. 1.2% 금리로 상환 부담도 크지 않다. 문제는 자신의 처지다. 비정규직이니 계약이 해지되면 그 돈을 바로 갚아야 한다. 방을 뺀 뒤 보증금을 돌려받으면 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출상환금 100만원 외에 해고에 대비해 140만원을 따로 저축하고 있다. 240만원이 주거비로 들어가는 셈이다. 이 직장에서 2년만 더 버티면 대출금이 거의 해결된다. 씀씀이를 더 줄이고 있다. 피자와 치킨을 먹은 지 오래다.

여전히 기계조립업체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일하는 보경은 결혼의 꿈을 이뤘다. 혼인신고를 한 상태로 살림을 차렸고, 결혼식은 내년에 할 생각이다. 최근에는 LH(한국토지주택공사) 대출로 1억2천만원을 빌려 방 세 개짜리 빌라로 들어갔다. 데이트 비용이 줄어 돈도 모이기 시작했다. 다만 휴일이 주중에 있는 자신과 주 5일 정상 근무를 하는 아내가 쉬는 날이 엇갈리는 점이 아쉽다. “일주일 내내 저녁에만 애틋하다”며 웃는다. 방송통신대 공부는 곧 마무리할 예정이다.

영남은 동료들과 반도체 쪽 불황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나눈다. 한-일 관계도 일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래도 당장은 타워크레인 운전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7월에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9월 중 실기시험을 본다. 퇴근하면 타워크레인 관련 유튜브를 보면서 운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따라해본다. 시험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하루 1시간, 5일 150만원 하는 학원비는 엄두가 안 난다. 그런데 못된 버릇이 생겼다. 현장에서 업체에 마련해준 기숙사에 들어갈 때 피자, 햄버거, 치킨까지 양손 가득 다 먹지 못할 만큼 샀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혼자 먹었다. 대개는 먹다가 버렸고, 어떤 때는 토했다. 그래도 먹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먹다가 토하거나 버리거나

성용은 서울시 뉴딜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인테리어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경력이 쌓이는 대로 개인 사업을 하고 싶다. 현수는 자영업 쪽으로 목표를 세웠다. 아르바이트로 6천만원을 모아 친구와 함께 맥줏집을 차렸다. 언젠가 자신만의 가게를 낼 계획이다.

주영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어학연수를 갔다. 누나도 취업을 못했지만 집에서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연수하면서 아르바이트로 150만원 이상을 번다. 간단한 목공 일이다. D공고 시절 배운 기술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써먹는다. 내년쯤 한국에 들어오면 해외영업 부문에 도전할 생각이다.

취재 노트를 꺼내며

32개의 설렘 그리고 3년

2011년 2월 D공고 자동차과를 찾았다. 졸업식을 앞두고였다. 32명을 만나며 지난 3년의 시간을 물었다. 이들이 소환하는 추억은 투박하고 날카로웠다. 흔한 미사여구를 듣기 힘들었다. 인터뷰 중 학교 축제가 열리지 않은 지 3년이 넘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나마 체육대회는 축구 한 종목만 했다. 농구와 배구는 아예 지원자가 없었다. 태희는 “이게 내 학교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그 짓도 하는 거죠”라며 툭 내뱉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폄훼해버리는 위악이 도드라져 보였다. 태희는 현장실습을 음향업체로 나갈 정도로 아이돌 음악을 즐기는 평범한 10대였다.

입학 당시 작성한 진로카드를 찾았다. 32개의 설렘은 거기에 살아 있었다. 장래희망을 보니 자동차 업종(설계사, 디자이너, 엔지니어, 현대자동차 취직 등)이 23명이었다. 희망에 자동차를 쓰지 않은 아이들도 취미나 특기로 자동차 모형 조립, 자동차 이름 외우기, 자동차 사진 모으기 등을 써넣었다. 자동차는 이들에게 꿈이었다. 절망은 첫 실습 시간부터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90년에 나온 엘란트라라는 차에 수십 명이 붙어 실습하더라고요.”

무심한 듯 꺼낸 상덕의 기억은 수없이 덧난 상처로 느껴졌다. 상덕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3년 내내 ‘안 될 것 같다’ ‘어렵겠다’는 생각을 뒤집을 만한 계기를 찾지 못했다. 용래는 기능올림픽 준비반에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돼 “시시하다”며 뛰쳐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자동차과 선배가 찾아와 “공고 나와서는 우리 회사 못 온다”고 말하고 떠났다. 또래의 절망은 금세 퍼졌다. 3학년 때 진로카드는 같은 반인가 싶을 정도로 변했다. 자동차 업종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친구가 반도 안 남았다(8명). 이마저도 정비사가 7명이었다.

기자는 졸업식 날 학교를 다시 찾았다. 졸업식장은 흔한 소란이나 잡담도 없이 조용했다. 32명의 가정환경, 가족 형태, 부모 직업 등을 취재해 지면으로 드러냈다. 졸업식 분위기를 갈무리하면서 취재를 마쳤다. 제목에 ‘어느 전문계고 졸업생 32명의 폐기된 꿈’이라고 썼다. 이로 드러나는 현실이 또다른 낙인일까 싶어 마음에 걸렸다. 이들의 삶을 응원했다. 훗날, 기사 제목부터 내용까지 기자가 창피해질 정도로 어긋나길 간절히 바랐다. 2015년 기자가 탐사보도팀에 있게 돼 보도 당시의 담임교사를 만났다. 2011년 졸업 당시 대학에 진학한 21명과 취업한 5명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확인했다. 다만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이가 많아 취재를 미뤘다. 2019년 8월, 취재 기록의 먼지를 털어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2019년 현재 졸업생 32명 중 접촉하지 못한 이는 재영, 연기, 순호, 태호다. 친구들도 4명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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