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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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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특수하게 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개인사업자 신분 탓 폭염 대책 사각지대
등록 2019-08-21 02:04 수정 2020-05-02 19:29
박대희씨를 비롯한 위탁배달원들은 넓은 공간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일하지만, 선풍기 바람은 채 10m를 가지 못했다. 박승화 기자

박대희씨를 비롯한 위탁배달원들은 넓은 공간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일하지만, 선풍기 바람은 채 10m를 가지 못했다. 박승화 기자

7월30일 새벽 5시,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집중국.

밤새 내린 장맛비가 그치고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온도계를 보니 29.5℃, 가만히 서 있어도 등에 땀이 흘렀다. 우체국을 상징하는 빨간 제비가 그려진 1t 화물차가 잇따라 모여들었다. 밤사이 동서울우편집중국에 모인 택배물을 서울 중·동부 지역으로 실어 나를 차량 행렬이다.

박대희(38)씨는 강남구 논현동으로 택배물을 배달하는 위탁배달원이다. 그는 우체국 로고가 박힌 화물차에 우체국 택배물을 싣고 달리지만, 우체국 직원은 아니다. 우정사업본부(우체국) 산하 공공기관인 우체국 물류지원단과 도급계약을 한 개인사업자다. 배달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이른바 특수고용 노동자다. 이날 각자 화물차 1대씩 몰고 동서울우편집중국에 모인 270여 명도 마찬가지 신분이다.

위탁배달원 배달원 늘어 작업환경 더 열악

모든 노동자에게 여름은 힘들지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특수하게 힘든 점이 있다. 폭염에 작업 중지를 요청하거나 냉방시설을 개선해달라고 따질 사업주가 없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이 사업주이기 때문이다.

위탁배달원들은 이른 아침마다 집중국에 모여 서너 시간 택배물 분류 작업을 한 뒤 화물차에 싣고 각자 맡은 지역으로 출발한다. 박씨는 집중국에서 논현동을 담당하는 다른 위탁배달원 10명과 함께 택배물을 동별로, 번지별로 분류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논현동팀에 주어진 냉방시설은 키가 1m 남짓한 산업용 선풍기 한 대와 벽걸이 선풍기 한 대. 팰릿(화물을 쌓는 대)을 끌고 택배 상자를 들어 나르는 동안 선풍기 바람은 산들바람처럼 잠시 스쳐갔다.

땀을 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위탁배달원들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이 젖어갔다. 박씨는 팔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다. “아침부터 지치니까 배달 나가서 친절히 하기가 힘들어요.” 5시40분, 그의 목에 걸린 온도기록계는 30.9℃를 알렸다. 쉴 자리도 마땅치 않아 자판기에서 냉커피를 뽑아 계단에 앉아서 마셨다.

그나마 선풍기라도 있는 곳은 운이 좋다. 논현동팀 옆에서 일하는 개포동팀이나 신사·압구정동팀은 선풍기도 없었다. 강남구를 맡은 위탁배달원 76명에게 배정된 선풍기는 총 5대. 지하 2층 주차장에서 먼지와 매연을 그대로 마시며 일하는 팀과 야외주차장 땡볕 아래에서 일하는 팀도 있었다.

위탁배달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분류 작업을 하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택배 물량과 위탁배달원 수가 점점 늘어 공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전국 소포우편 물량은 2014년 1억9655만 통에서 2018년 2억7130만 통으로 늘어났다. 전국 소포위탁배달원은 2018년 4월 2354명에서 2019년 4월 3134명으로 늘었다(현재 750명 추가 구인 공고 중).

더워서 쉬면 수입이 줄어

물량과 인원은 늘었지만 시설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화물차를 건물에 붙일 수 있는 ‘도크’는 67곳뿐이다. 반면 위탁배달원 화물차는 270여 대나 됐다. 도크가 턱없이 부족해 도크 한 곳에 차를 2대씩 댄 경우도 많고 주차장에서 짐을 싣기도 했다. 그래도 모자라 일부 위탁배달원은 한두 시간씩 기다려야 했다. 이날 만난 한 택배노동자는 “도크를 먼저 차지하려고 우리끼리 싸울 때도 많다”며 “드론 택배가 나온다는 마당에 이런 작업 환경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위탁배달원은 개인사업자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이 일하는 시설을 개선할 수 없다. 시설 개선을 할 수 있는 우정사업본부는 “동서울우편집중국은 구조적으로 증축이 어렵다”고 한다. 우체국 물류지원단 관계자는 “2018년 여름 동서울우편집중국에 선풍기 17대를 설치했고, 올여름 16대를 추가로 주문했다”고 했다. 또 “동서울우편집중국에서 자체 설치한 벽걸이 선풍기도 있으며, 낮에는 작업자들을 위해 도크를 닫고 에어컨을 켠다”고 밝혔다.

위탁배달원은 개인사업자지만 쉬고 싶다고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쉬면 주변 동료들이 그 일을 떠안아야 한다. 폭염이나 폭우로 일하기 힘든 날은 동료들 눈치가 보여 쉬기 어렵다고 위탁배달원들은 말한다.

또한 유급휴가가 없어서 쉬는 만큼 수입은 줄어든다. 박대희씨는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5일 하루 10~12시간씩 일한다. 6월에 총 3596개의 택배물을 배달해 421만9736원의 수수료 수입이 생겼다. 이 중 화물차 임대료 36만원, 부가세 35만원, 기름값 30만원, 식대 14만원 등을 빼면 실제로는 300만원 정도가 손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우체국 물류지원단 위탁배달원 평균에 거의 근접한다.

서준원 택배연대노조 조직국장은 “우체국은 그나마 선풍기라도 있어서 상황이 좋은 편이다. 다른 택배 사업장은 시설이 더 열악해 실내 온도가 40℃에 이르는 곳에서 분류 작업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최원준씨 같은 음식 배달기사들은 보통 주 72시간씩 일한다. 폭염과 폭우가 닥치면 업무 강도가 1.5배 늘어난다. 변지민 기자

최원준씨 같은 음식 배달기사들은 보통 주 72시간씩 일한다. 폭염과 폭우가 닥치면 업무 강도가 1.5배 늘어난다. 변지민 기자

배달 라이더 강제 배차·페널티 탓, 열 식힐 시간 없어

음식 배달기사는 상황이 한층 나쁘다. ‘폭염 대책은 개인사업자가 알아서, 일은 관리자가 시키는 대로’다. 배달기사들은 바로고, 생각대로, 부릉, 배민라이더스, 요기요플러스 등 배달대행업체와 계약해 건당 수수료를 받는 특수고용 노동자다.

8월6일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만난 최원준(29)씨는 “폭염이나 폭우가 닥쳤을 때 배달량이 1.5배 이상 늘어난다”고 했다. 이런 날 더욱 속도를 내서 배달할 수밖에 없다보니 사고가 많이 난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배달기사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의 대변인이다.

최씨는 “라이더들이 폭염·폭우에 힘들다고 하면 ‘수입이 그만큼 늘지 않냐’ ‘정 힘들면 쉬엄쉬엄하면 되지 않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간단치 않다.

먼저 ‘강제 배차’를 하는 경우가 많다. 기사가 배달 건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배달대행업체 관리자가 기사들에게 특정 배달 건을 강제로 배정하는 것이다. 개인사업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업무를 실시간으로 통제받는다. 당연히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라이더유니온은 지난 6월 서울 서부지역 배달대행업체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고 19곳의 결과를 공개했는데, 그중 17곳에서 ‘강제 배차’를 한 적이 있었다.

한 걸음 더 나가 ‘배정 수 제한’(한 번에 선택할 수 있는 배달 건수 제한), ‘관리자 오더 조절’(관리자가 전체 배달 코스 결정), ‘초지연’(배달 건을 잡기 힘들게 수초 늦게 화면에 게시) 등 불이익 제도를 둬 배달기사를 적극 통제하는 곳도 15군데나 됐다. 페널티(벌칙)는 배달기사가 관리자와 약속한 시각보다 늦게 출근하거나 나오지 않을 경우, 또는 배달기사들이 아무도 ‘똥콜’(비선호 배달)을 처리하지 않아 쌓일 때 준다.

그리고 택배 위탁배달원과 마찬가지로 폭염·폭우에 누군가 쉬면 동료들이 그만큼 일이 늘어나는 구조다. 최씨는 이렇게 말했다. “배달업계에선 폭염시 작업 중지라는 말이 의미가 없죠. 배달할 기사가 정해지고 조리를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음식이 한창 준비되면서 기사가 배정돼요. 음식 나오면 무조건 처리해야 해요.”

배달기사들이 일을 많이 한 만큼 수입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다. 반대로 일을 쉰 만큼 수입이 줄어든다. 상당수 기사가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하고 한 달에 300만~350만원을 순수입으로 가져간다. 주 72시간이나 일하는 이유는 수수료가 1건당 3천원 정도로 낮고 오토바이 임대료와 보험료, 유류비 등이 고정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유급휴가가 없어서 쉬는 만큼 그대로 수입이 줄어든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7월25일 서울 광화문광장 기자회견에서 ‘폭염·폭우시 안전배달료 도입’을 주장했다. “배달료가 너무 낮아서 최저임금보다 높게 가져가려면 1시간에 5개씩 배달해야 합니다.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있더라도 계단을 뛰어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하게 쉬엄쉬엄 일하려면 ‘천천히 일해라’는 말이 아니라 배달 한 건당 4천~5천원씩 줘서 실제로 1시간에 3~4개 정도만 해도 최저임금 이상 벌 수 있는 노동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방송 스태프 동시녹음 탓 선풍기도 꺼야

또 다른 특수고용 노동자인 방송 스태프들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는 조명·동시녹음 등 팀 단위로 용역 계약을 해서 팀장급 스태프가 인건비 등을 책임지는 ‘턴키(일괄) 계약’이 많다. 명목상 팀장이 사업주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건 방송사·제작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중구조에서 폭염 대책은 그림의 떡이다.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은 “촬영에 들어가면 동시녹음 때문에 야외는 물론 실내에서조차 에어컨과 선풍기를 끈다”고 했다. 냉방시설 요구는 엄두도 못 내고 일단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집중한다. 김 지부장은 “방송 스태프는 하루 최대 18시간씩 일하는데, 노조가 생기기 전보다 2시간 정도 준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8월1일 드라마 스태프였던 30살 남성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카메라 촬영 담당이던 그는 7월25일부터 29일까지 5일 동안 야외에서 총 76시간 일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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