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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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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참사 추모하는 일본의 양심

우키시마를 기억하는 일본인들…

추모제를 매년 지내는 주민들과 12년간 소송을 이끈 변호사
등록 2019-08-12 18:11 수정 2020-05-02 19:29
1954년 9월 당시 소련에서 철수한 일본인들을 태운 고안(興安)호가 마이즈루항에 입항하고 있다. 그 앞에 1945년 침몰한 우키시마호의 기관총과 레이더 잔해가 물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미우라 히데오가 찍은 것으로 현재 우키시마호 추모공원에 전시돼 있다.

1954년 9월 당시 소련에서 철수한 일본인들을 태운 고안(興安)호가 마이즈루항에 입항하고 있다. 그 앞에 1945년 침몰한 우키시마호의 기관총과 레이더 잔해가 물에 잠겨 있다. 이 사진은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미우라 히데오가 찍은 것으로 현재 우키시마호 추모공원에 전시돼 있다.

아베 정권의 경제보복으로 촉발된 최악의 한-일 관계는 미진한 과거사 청산에 그 원인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인권침해를 인권 관점에서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탓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인권을 무시한 졸속 합의가 한-일 관계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잘 보여준다. 가해자가 피해자인 양 큰소리치는 아베 정부의 태도나, ‘일본의 청구권 자금으로 한국 경제가 발전했다’는 국내 보수언론의 무지한 주장은 모두 잘못된 과거사 청산이 낳은 쌍생아다.
70여 년이 지나도록 사고 원인은커녕 희생자 유골조차 반환받지 못한 ‘우키시마호 참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유골 반환이라는 인도적 차원의 문제를 앞세워 일본 정부를 압박할 수 있다. 일본 정부도 과거 일본 법정에서 벌어진 소송에서 유골 반환을 약속한 바 있다. 따라서 한일청구권협정 뒤에 숨어 협상을 거부할 명분이 약하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유골 반환 협상을 적극 제안해야 한다. 진실을 인양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
한국 보수정권은 우키시마호 참사에 극도로 무관심했다. ‘1945년 8월15일’ 이후 피해자라는 이유로 보상 등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이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진상 규명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 과제를 이어받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한국 정부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부모 형제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는 유족들의 절규에 더 이상 귀를 막아선 안 된다. 우키시마호 침몰일인 8월24일 침몰 현장에서 40년 동안 추모제를 지내온 마이즈루 주민들은 말한다. “우키시마호 참사를 마이즈루의 역사로 남기려고 노력해왔다. 다시는 그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일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알아줬으면 고맙겠다.”
마이즈루·도쿄(일본)=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8월5일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항에 있는 우키시마호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추모모임 대표인 요에 가쓰히코(왼쪽)와 그의 부인 미호코(가운데), 사무국장 사카모토 리사코가 서 있다. 박승화 기자

8월5일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항에 있는 우키시마호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추모모임 대표인 요에 가쓰히코(왼쪽)와 그의 부인 미호코(가운데), 사무국장 사카모토 리사코가 서 있다. 박승화 기자

일본의 동해 진출 관문인 마이즈루(舞鶴·무학)항은 이름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굴곡진 해안과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학들의 군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천혜의 지형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육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해안은 동해의 거친 물살을 막아 호수처럼 잔잔한 수면을 만든다. 수심도 깊어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이곳은 일찌감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동아시아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활용됐다. 지금도 이지스함 등 최첨단 군함이 배치된 일본 해상자위대 기지가 들어서 있다. 이방인 처지에선 미항의 정취에 마냥 취할 수만은 없는 곳이다.

침몰 때는 필사적으로 부상자들 구조

더욱이 한국인에겐 슬픈 역사로 기억해야 할 곳이다. 일제 패망으로 귀향의 꿈에 부풀어 있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와 그 가족이 이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1945년 8월22일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조선인 3735명(일본 정부 발표)을 태운 우키시마호는 목적지인 부산으로 가지 못하고 8월24일 오후 5시20분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혹독한 강제노동을 견뎌낸 이들을 허망한 죽음으로 내몬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원통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희생자 유골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8월5일 취재진이 만난 요에 가쓰히코(78)는 이곳에서 우키시마호에 탔던 조선인 희생자의 한을 달래는 추모제를 주도하고 있다. 올해로 41회째를 맞는 추모제는 1978년부터 해마다 8월24일에 우키시마호 인양 장소에 세운 위령비 앞에서 마이즈루 주민들 주최로 치러졌다. “전쟁을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 온 일본 정부가 전쟁이 끝났음에도 무사히 귀국시키지 못한 것은 대단히 잘못한 짓이다. 이곳 주민들은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키시마호 참사를 마이즈루 역사로 남기려고 애쓰고 있다. 주민들이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는 이유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에 태어난 그는 마이즈루 주민들로 구성된 ‘우키시마호 순난자를 추모하는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요에 대표는 마이즈루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우키시마호는 저기 보이는 작은 섬 부근에서 폭발했다. 폭파된 배가 해안에서 300m 떨어진 곳까지 흘러오는 동안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당시 주민들이 배를 끌고 나와 부상자들을 구조하고 주검을 수습했다. 침몰한 배에서 엄청난 양의 기름이 흘러나와 노를 젓기가 힘들고 위험했지만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부상자들을 구조했다.”

주민들은 배에서 탈출한 조선인들에게 음식과 옷가지를 나눠주고 부상자들을 치료해줬다.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자신들도 곤궁한 처지였지만,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다치기까지 한 조선인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 참사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크게 달랐다. “우키시마호가 왜 폭발했는지를 포함해 의문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고 원인 등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 당시는 패전 직후 어수선한 때라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1950년과 54년 두 차례에 걸쳐 선체를 인양했을 때라도 제대로 조사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폭발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당시 524명의 조선인들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배가 폭발한 뒤 3㎞나 떠내려가는 동안 유실된 시신이 많았다. 따라서 희생자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조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조선인 가족을 모델로, 바닷바람 견디게

마이즈루항에는 전쟁이 끝난 뒤 옛소련과 중국 등에서 살던 일본인들을 태운 배가 많이 들어왔다. 귀국의 기쁨에 들뜬 일본인들을 태운 배들의 당당한 모습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우키시마호 잔해와 대비돼 주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1954년 이곳에서 사진관을 하던 미우라 히데오는 이처럼 희비가 엇갈린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 사진은 지금 추모공원에 전시돼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런 상상할 수도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지 않았다면 그 많은 조선인이 여기까지 와서 죽었을 이유가 없다. 우키시마호 참사는 일제의 식민지배 역사와 깊이 연결돼 있다.” 요에 대표가 취재진을 추모공원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추모공원은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가에 있다. 36℃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여성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고 있었다. 추모 모임의 사무국장 사카모토 리사코(69)와 요에 대표의 부인 미호코였다.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카모토 국장이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추모공원에 세운 위령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에 있는 조형물을 바로 이분이 만들었습니다.” 그의 손이 취재진을 안내했던 요에 대표를 가리켰다. 요에 대표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다. 조형물의 어린아이는 아내가 만들었다”

주민들이 추모제를 지내기로 결정한 것은 1978년 초였다. 중학교 미술 교사였던 요에 대표는 고향 선배에게서 추모제를 위한 조형물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선배도 미술을 전공한 분인데 심장 수술을 받는 바람에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선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선뜻 승낙했다. 어떤 조형물을 만들까 고민하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의 한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에 대표는 조선인 가족을 모델로 삼았다. “제일 높이 서 있는 어머니가 바라보는 곳은 부산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픔을 보여주려고 했다.” 어머니는 울부짖는 젖먹이를 왼팔로 안고 당당한 눈빛으로 부산을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요에 대표는 도예가인 한 학부모의 도움을 받아 조형물을 만들었다. 5월에 시작한 작업을 8월24일 추모제에 맞춰 끝내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학교 작업실에 모여 만들었다. 보통 10개월 정도 걸리는 작업인데 납기일을 맞추려면 3개월 안에 끝내야 했다. 그래서 주말에도 쉴 수가 없었다.” 제작비는 주민들의 모금으로 전액 충당했다. 십시일반으로 50만엔을 모았다. 지금 환율로는 572만원에 불과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돌이나 구리로 만들면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바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섬유강화플라스틱(FRP)을 사용했다.

무더위에 점심도 거르고 치르는 추모제

주민들은 추모제를 준비하며 하나의 원칙을 만들었다. “모든 비용은 모금으로 마련하고 행사 준비는 자원봉사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주민들의 순수한 의도가 왜곡되지 않고 또 추모제를 꾸준히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추모공원 터는 마이즈루시와 교토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을 받았다. 지금 같은 일본의 우경화 분위기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에 대표는 “당시 이곳에는 나를 비롯해 젊은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열정적으로 추모제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대부분 고령인 이곳 주민들에게 추모제는 ‘중노동’이다. “주민 30~40명이 아침 8시에 마이즈루 시내의 한 중학교에서 철제 천막과 의자, 앰프 등 집기를 빌려 추모공원까지 나른다. 총련과 민단 대표 등 한국과 북한 쪽 인사들은 물론 이 지역 출신 참의원과 마이즈루 시장 등 일본 정치인도 많이 참석하기 때문에 의자와 천막이 많이 필요하다.” 사카모토 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추모제는 오전 11시에 시작해서 12시에 끝나지만 뒷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일은 오후 4시까지 이어진다. 고령의 주민들이 무더위에 점심도 거르면서 추모제를 준비한다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카모토 국장은 취재진의 인사에 “지난해에는 한국에서 노총 사람들이 와서 뒷정리까지 도와줬다.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일이 아주 빨리 끝났다”고 웃으며 말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5년 전부터 추모제에 참석하고 있다.

요에 대표는 우키시마호 참사를 일본의 어린 세대에게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내가 교단에서 은퇴한 지 꽤 됐지만 지금도 이곳 중학생들한테 우키시마호 역사를 가르친다. 여기 교사들이 대부분 내 후배인데, 그들이 현장학습 시간에 나를 강사로 초청한다. 내일(6일)은 이곳 중학생들이 나가사키에 수학여행을 간다. 그들에게 나가사키의 비극과 우키시마호의 비극은 뿌리가 같다는 것을 설명해줬다. 전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존재하고, 가장 약한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또 우키시마호 참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연결됐기 때문에 일본인이 사고 원인 규명과 그 교훈을 후대에 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도 설명했다.”

그는 취재 말미에 ‘순난’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추모제에 참석했던 한국 쪽 인사들이 희생자를 순난자로 표현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순난은 ‘국가나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롭게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다. 그는 “순난이란 표현은 당시 조선인 희생자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 귀국하다 희생된 분들을 기린다는 취지다. 한국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줬으면 한다. 또 일본에는 아베 정부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주민들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려달라. 이곳 주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순수한 마음을 한국인들이 잘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마이즈루 주민들과 정반대였다. 일본 정부는 종전 직후 혼란기에 식민지배를 당한 조선인들이 대거 희생된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1992년 일본인 변호사들이 한국인 생존자와 유족들로 원고를 구성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정부는 전후 피해 보상에 야만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일본 사법부는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우키시마호 소송을 대리한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가 8월7일 과거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소송을 대리한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가 8월7일 과거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항소심은 “관련 소송 가운데 가장 문제 많아”

8월7일 도쿄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일본변호사회관에서 만난 야마모토 세이타(66) 변호사는 우키시마호 소송을 이끈 대표 변호사다. 그는 일본 정부의 태도보다 사법부의 판단에 더 실망했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특히 항소심 재판은 일제 과거사 관련 소송 가운데 가장 문제가 많은 판결이었다.” 다른 판결들은 ‘애석하지만 사고였다. 따라서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거나 ‘소송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입법으로 해결해라’는 식이었지만, 이 사건 항소심은 ‘당시 상황에서 조선인 몇 명이 죽었다고 해서 문제될 게 있느냐’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야마모토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1심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따졌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에 의해 모집, 알선, 징용 등의 방법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기 때문에 이들을 무사히 귀국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과 무관하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변호인단은 ‘만일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발시켰다면 그것은 학살이기 때문에 당연히 배상해야 하고, 당시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 하더라도 해군 관계자가 무리하게 출항 또는 입항을 강행했기 때문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조선인 사망자들과 일본 정부 간에 고용계약 내지 이에 준하는 법률 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더라도 계약 주체는 일본 기업들이었기 때문에 국가 책임이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교토지방재판소는 2001년 8월23일 “일본국에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안전 배려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80명의 원고 가운데 15명에게 일괄적으로 300만엔을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이었다. 이는 ‘국가와 조선인 희생자 개인’ 간의 계약 관계는 아니지만, ‘사인 간의 운송 계약’은 성립된다는, 일종의 타협책이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제이아르(JR·일본 철도회사)가 사고 나면 승객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하는 그런 개념의 판결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심 재판부가 최소한의 양심을 드러낸 판결”이라고 회상했다. 1심 재판 때는 일본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전후 책임 문제가 공론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국가 책임을 엉뚱하게 사인 간 계약으로 인정해서 엉터리 판결이라고 생각했는데, 10년 동안 항소심과 최고재판소 판결을 거치면서 1심 재판이 그나마 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심 재판에서 주심을 맡은 판사는 나중에 일본 시민단체가 제기한 원자력발전소의 안정성 관련 소송에서 원전 가동 중지를 명령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인 오사카고등재판소는 1심을 완전히 뒤집었다. 더욱이 항소심 재판부는 “비열한 모습”도 보였다. “재판부가 원고 쪽에 ‘사망자와 유족 간의 상속 관계를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우리는 1심 재판에서 부분 승소한 것을 전제로 재판을 진행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판결은 상속 관계를 따지기는커녕 1심 때 인정했던 것도 확 뒤집은 최악의 판결이었다.”

1945년 8월24일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당하기 전의 우키시마호 전경. 연합뉴스

1945년 8월24일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당하기 전의 우키시마호 전경. 연합뉴스

일일이 상속 자격 확인하며 12년간 소송에 매달려

변호단은 상속 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하기 위해 한국에 있는 유족들을 일일이 찾아가 상속 자격을 확인했다. 이 때문에 유골 반환 등 다른 쟁점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시 한국의 상속법이 여러 번 개정되는 바람에 상속 관계를 따지는 게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나와 같이 일했던 나가타 마사요시 변호사가 그 작업을 하느라 고생했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항소심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이중적 태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민이 미국이나 소련 등 연합국을 상대로 개인청구권을 행사하는 소송에서는 그 권리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한국과 중국인들의 개인청구권 행사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분도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4년 11월30일 원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12년 동안의 소송은 우키시마호 희생자 쪽의 패소로 끝났다.

당시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소송의 목적이 아니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원고가 폭침을 주장했다면 그 입증 책임이 원고에 있기 때문에 관련 증거를 찾아서 입증해야 했다. 하지만 사고 관련 증거는 대부분 일본 정부에 있기 때문에 변호단이 이를 입수해서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폭침이든 기뢰에 의한 폭발이든 상관없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재판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침몰 원인을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고 본다. “당시 변호단이 발굴한 자료 중 폭침을 입증할 만한 것은 없었다. 생존자 중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재판에 제출한 자료는 기뢰에 의한 폭발을 뒷받침하는 증거였다고 한다. 또 당시 우키시마호에는 일본인 승조원들도 타고 있었다.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출발할 때 일본 해군 255명이 승선했는데, 침몰 사고로 이 가운데 25명이 숨졌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당시 일본 군함은 매우 귀한 배였다. 전후 재건에 꼭 필요한 군함을 일본 해군이 고의로 폭파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변호사는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 반환에 아베 정부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다. “1심 재판부가 유골 반환과 관련해 당시 화해를 권고했다. 이 부분은 일본 정부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정부도 재판 말기에 유골 반환에 동의했다. 하지만 유족들이 ‘일본 정부의 사과가 없는 반환은 무의미하다’며 응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아베 정부는 유족들에게 예를 갖춰서 사과하고 유골 반환에 나서야 한다. 유골 소유권은 유족에게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야마모토 변호사는 1992년 ‘관부(부산-시모노세키)재판’으로 알려진 종군 ‘위안부’ 피해 배상 소송을 대리해 1심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일부 인정한 판결을 끌어내는 등 일제 과거사 관련 소송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반일 감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반감을 갖는 것은 두 나라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아베 정부가 상식을 파괴하는 인물들로 구성됐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일본에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 이들은 과거사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한국인이 이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줬으면 한다.” 인터뷰를 마친 뒤 작별 인사를 건네는 그의 얼굴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유텐지의 희생자 유골


민단과 총련 추모글이 나란히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은 일본 도쿄 메구로구 주택가에 있는 유텐지(사진)에 안치돼 있다. 일본 정부는 선체 인양 뒤 수습한 유골을 후생성에 보관하고 있다가 1971년과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유텐지에 안치했다. 현재 유텐지에는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골 280위가 안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텐지는 애초 일제강점기 조선인 군인·군무원 등의 유골이 보관돼 있다가 2008~2014년 여덟 차례 걸쳐 한국으로 대부분 봉환된 뒤 지금은 우키시마호 유골만 남았다. 또 북한 출신자 유골 425위도 보관돼 있다.
8월7일 방문한 유텐지는 무더위 탓인지 한산했다. 본당 뒤에 자리한 납골당은 산뜻하게 단장돼 있었다. 2014년에 시작한 내진공사가 최근 끝났다는 사찰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납골당 안으로 들어갔다. 왼편에 차려진 제단 뒤쪽에 우키시마호 유골이 안치돼 있었다. 제단 앞에서 절을 한 뒤 방명록을 살펴보니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고위 간부 직함이 적힌 추모글이 많이 있었다.
사찰 직원은 “아베 아키에 총리 부인도 이곳을 참배했다”고 귀띔했다. 우키시마호 유골은 희생자별로 구분되지 않고 ‘혼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유족들에게 반환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일본인 희생자 유골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골을 한꺼번에 한국으로 봉환하기도 쉽지 않다. 최봉태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나서서 일본과 유골 반환 문제를 적극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마이즈루(일본)=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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