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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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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얻은 것은 잃은 것보다 아름답다

‘암 자격증 있는 사람’ 박피디와 ‘암센터의 아이돌’ 황배우의 팟캐스트
등록 2019-07-20 06:10 수정 2020-05-02 19:29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암 경험담과 위로는 암환자에게! 박피디, 황배우의 .”

마이크 앞에 앉은 두 사람의 호흡이 척척 맞는다. 유쾌한 목소리에 발랄한 목소리가 얹힌다. 7월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사무실. 이들은 암 경험자를 위한 팟캐스트 의 진행자 박피디(44·가명)와 황배우인 황서윤(37·사진)씨다. 그들 역시 유방암 투병을 했던 암 경험자다. 암 투병을 하면서 직접 겪었던 일, 암 치료 이후 건강관리, 암 경험자들의 사연 등을 방송한다. 10년 전 뮤지컬 작품을 같이했던 그들은 암 경험자가 되어 다시 만났다. “전우회보다 더 끈끈한 게 환우회”라는 박피디의 말처럼, 같은 병을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이 웃고 같이 울며 서로의 손을 잡아줬다.

모든 인생 계획에 장벽 생겨

뮤지컬 배우 출신인 황씨는 2016년 10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몇몇 사람에게만 병을 알렸지만 소문이 확 퍼졌다. 그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 암환자다”라고 ‘암밍아웃’(암과 커밍아웃의 합성어)을 했다. 홧김에 공개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없는 데서 내 얘기를 가십거리로 하는 게 싫었어요. ‘어차피 다 알게 됐으니 공개하자’라는 마음으로 저질렀죠.”

갑자기 30대 초반에 암환자가 된 황씨는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제가 암센터에서 ‘아이돌’이었어요. 거기에 계신 분들 중에서 제일 어렸거든요. 주변 분들이 와서 무슨 병이냐, 결혼은 했냐, 남자친구는 있냐 물었어요. 그러면서 혀를 쯧쯧 차요. 제가 안쓰러웠나봐요.” 암 투병으로 일과 결혼 등 모든 계획에 장벽이 생겼다. “내 병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모자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감이 떨어졌죠.”

일도 다시 하기 힘들었다. 배우 활동과 연기 지도를 했던 황씨는 그 일을 못하게 되니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다.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동료 배우들이 TV에 나와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친구들의 이야기,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누리는 주변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 것이 너무 괴로웠어요.” 그 친구들과 비교해 자기 삶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올해 대한암협회에서 진행한 ‘암 경험자 사회 복귀 수기 공모전’에 입상한 황씨 글에는 그때의 절망이 담겨 있다. “한창 사회에서 일해야 할 젊은 나이에 부딪힌 암 치료로 인한 경력 단절, 미혼인 내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결혼과 호르몬 치료로 인한 출산의 어려움, 모든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1인 가구의 압박감을 느꼈다. 현실적인 문제는 암 진단만큼이나 암담했다. 나는 사회에서 패배자였고 낙오자였다.”(황서윤씨 수기 ‘암 투병 경험자를 위한 제2의 인생’ 중에서)

어머니한테는 아직 비밀

박피디는 황씨보다 1년 먼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황씨에게 조언을 해줬다. 꼼꼼한 성격의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한 증상, 약 종류와 부작용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유방암에 대한 의학 서적, 논문 등을 찾아 읽으며 공부했다. 그걸 바탕으로 암환자 자조모임에서 멘토 강의도 하게 됐다.

박피디는 자신을 “암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암 경험이 이제는 누구도 쉽게 딸 수 없는 자격증이 되어서 암 경험자를 위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황씨와 2018년 5월 시작한 팟캐스트는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일 중에 자신과 같은 암 경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서 시작했다. 방송사 피디 출신인 박피디와 뮤지컬 배우 출신인 황씨의 재능을 살린 거다. “우리 방송이 밝아요. 우린 (우울한) 다큐가 안 돼요. 까불까불해요. 우리도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했어요. 체력도 떨어지고 우울했죠. 팟캐스트를 하며 많이 밝아졌어요.”

박피디는 암 경험자에 대한 사회 편견을 깨는 것도 그들의 일이라고 한다. “암 겪은 이들을 자기 관리 못한 사람, 집안 내력이라는 식으로 바라보는 게 문제예요. 암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이에요. 교통사고처럼 운이 없어서 겪는 거니까요.” 그런 그도 박피디로 사회활동을 하지만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암에 걸렸던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다. “남들이 딸이 약하다 그러면 ‘나 닮아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인데 제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차마 못하겠더군요. 어머니가 자기 탓으로 생각하며 힘들어하실까봐요.”

그들은 암환자와 암을 겪은 이를 돕는 암 경험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암 경험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모임 ‘온랩’에 참여하고, 미혼 유방암 환우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암 경험자의 일상 복귀를 응원하는 ‘나와, 함께’ 캠페인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유방암 환자의 림프부종(림프계통의 문제나 변화로 몸이 붓는 것)을 예방하는 ‘암 세이브(ARM SAVE) 팔찌’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온라인에서 대중에게 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새로운 모든 하루에 인사를

그들은 박피디와 황배우라는 이름을 달고 사회적기업가로 첫발을 떼고 있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에서 진행하는 ‘2019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의 창업팀으로 선정됐다. “사회에 유쾌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요.”(박피디) “암 경험자들이 눈치 안 보고 병원 검사 받으러 가고 맘 편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고 싶어요. 암 경험자들의 일자리 마련이 앞으로의 과제예요.”(황서윤)

새로운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그들이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황씨가 그것이 적힌 글자판을 보여준다. “우리가 얻은 것은 잃은 것보다 아름답다.” 그들이 얻은 건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젊은 나이에 암을 겪은 만큼 조금 더 일찍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날에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나의 하루.”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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