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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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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떠난 도시’ 울산 동구 ①도로 신입

불황을 모르던 울산 동구, 위기가 현실이 되다
등록 2019-07-16 02:19 수정 2022-12-10 01:42

서울에서 울산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울산 동구는 초행이었다. 4월23일 그 길에 나서면서 무엇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공장이 떠난 도시-울산 동구 편’을 준비한다고 말했더니 울산 동구청 일자리 정책 부서의 한 공무원이 되물었다. 현대중공업이 아직 남아 있지 않냐고. 공장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애써 희망을 찾으려는 흔적이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39년 동안 장사했다는 식당 주인도, 정규직 노동자 전환을 꿈꾸며 동구로 왔다는 하청 노동자도, 저마다 표현은 달랐지만 비슷하게 반응했다. 울산 동구 사람들은 객관적이 될 수 없었다. 바깥에서 어떻게 보든 조선 산업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2015년 1월 시작된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뒤흔들었다. 위기는 빠르게 46년간 세워 올린 산업도시의 질서를, 돌이킬 수 없도록 무너뜨렸다. 현대중공업 구조조정 뒤 조선소에서는 배도, 사람도 사라져갔다. 주요 언론은 인적이 끊긴 주택가와 식당, 술집에 대한 르포르타주(현지 보고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놓으며 울산 동구의 경기침체와 산업도시의 운명을 이야기했다. 한순간에 오랜 질서가 깨지고 삶의 형태가 바뀐 산업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기에는 틀에 박힌 조각의 기록들이었다.
<한겨레21>은 ‘공장이 떠난 도시-군산 편’(제1269호)에 이어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던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과 이웃한 이들이 구조조정 뒤 겪은 변화상과 충격파를 찬찬히 다시 되짚어봤다. 이 이야기는 조선소 노동자들과 울산 동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기반산업이 깊은 불황에 빠진 한국의 수많은 제조업 도시와 그곳에 뿌리박은 노동자와 그 가족, 자영업자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지난 4~5월 약 6주 동안 <한겨레21>은 울산 동구 한복판에 있었다. 동구에 사는 37명을 만났다.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들, 그들의 배우자, 자영업자들과 이야기했다. 그들 가운데 15명을 무대 위에 올렸다.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이 거둔 성취와 좌절의 기억을 더듬어 A4용지 190쪽 분량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재구성했다.
글은 4개 장으로 엮었다. 첫 장은 위기의 시작이다.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중산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계층 사다리 아래쪽으로 밀려나면서 벌어진 이야기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장은 연달아 추락한 하청 노동자와 그 가족, 자영업자의 기억이다. 마지막 장에는 현대중공업 본사의 서울 이전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 찾아온 위기에 산업도시의 정체성을 묻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울산 동구로 들어가는 길 가운데 하나인 울산대교에서 시작한다. 기사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목차
① 도로 신입: 불활을 모르던 울산 동구, 위기가 현실이 되다
② 개꿈: 처음부터 정규직과 하청이 꾸는 꿈은 달랐다
③ 동구 아줌마의 구직: 밀린 관리비 경고장이 아파트마다 나붙었다
④ 공장만 남은 도시: 현대중공업은 2개 회사로 쪼개져...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만화 이윤희, 인포그래픽 디자인주
울산대교를 지나 현대중공업이 들어선 산업도시 울산 동구로 들어갔다. 울산 사람들은 동구를 ‘섬 아닌 섬’이라 했다.

울산대교를 지나 현대중공업이 들어선 산업도시 울산 동구로 들어갔다. 울산 사람들은 동구를 ‘섬 아닌 섬’이라 했다.

프롤로그

‘끽!’ 울산대교를 달리던 택시 한 대가 난데없이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황강민(49)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택시의 뒷좌석 문이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다리 한가운데쯤에서 택시는 또다시 멈춰 섰다. ‘끽!’ 별안간 뒷좌석에 타고 있던 남자 승객이 나오더니 다리 난간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이었다. 택시 운전사도 쫓아나왔다. 황강민도 자신의 자동차 K5를 길가에 세우고 달려나갔다.
황강민은 남자의 팔과 어깨를 부여잡았다. “놔라. 내비도라!” 거칠게 빠져나가려는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잡지 마라, 더러운 세상 몬 살겠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남자는 완강했다. 황강민과 택시 운전사는 그의 바람막이 잠바와 배낭을 붙잡고 늘어졌다. 바람이 거칠었다. 잠바 한쪽을 놓치자 잠바가 황강민을 세차게 때렸다.
어디선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달려나왔다. 다리를 관리하던 민간 업체 직원들이었다. 한 직원이 다리 난간 밖으로 넘어가 남자를 끌어안았다. 둘 다 난간 밖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황강민은 112와 119에 신고했다. 다리 밑에 해양경찰들이 도착했다. 소방차와 경찰차도 뒤따랐다. 밧줄로 남자를 묶어 난간에 고정하자 잠잠해졌다. 경찰은 남자를 경찰차에 태웠다. 황강민은 다리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봤다. 어지러웠다.
황강민이 남자를 구한 2018년 한 해에만 울산대교에서 열 사람이 떨어졌다. 울산대교는 2015년 6월 개통했다. 같은 해 1월 현대중공업은 첫 번째 위기 신호를 보냈다. 1500명을 내보내는 희망퇴직이 시작됐다. 울산대교 개통 뒤 불과 5년도 안 된 사이 14명이 몸을 던졌다. 울산대교 저편 울산 동구의 10만 명당 자살률은 33.3명(2017년)으로 2년 새 11.6명이나 급증했다.
울산대교를 지나 10분 정도 내달리면 주택 밀집 지구가 다가온다. 그리고 스웨덴 말뫼조선소에서 ‘1달러’에 들여온 붉은색의 골리앗 크레인이, 선박이, 조선소가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산업도시가 펼쳐진다. 울산 동구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동남쪽은 동해와 닿아 있고 북서쪽은 산지로 둘러싸였다. 울산 사람들은 동구를 ‘섬 아닌 섬’으로 여겼다. 울산대교 개통 전만 해도 울산 동구로 가려면 현대자동차가 만든 ‘아산로’ 도로를 달려 20분쯤 에둘러 가야 했다. 아산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호다.
울산 동구 해변을 둘러싸고 들어선 조선소 울타리 안에서 산업도시의 시가지는 남북으로 길게 만들어졌다. 1997년 울산 동구의 유일한 백화점인 현대백화점이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에 문을 열었다. 1980년대부터 사원 아파트 단지들이 조선소 주변에 생겨났다. 1990년대 현대중공업이 지은 문화시설들은 조선소 노동자 자녀들의 놀이터가 됐다. 울산 동구의 골목에는 ‘현대’ 식당만 최근까지 130여 개가 있었다. 40년 넘게 조선소는 노동을 넘어서 울산 동구의 생활리듬을 규율해왔다.
하지만 2015년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이 시작된 뒤 4년에 걸쳐 조선소 노동자와 가족들은 예견할 수 없었던 경제적 재난 앞에서 급격한 삶의 추락과 생활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조선소가 지탱해온 울산 동구는 위기가 닥치자 남성 위주의 일자리, 원청과 하청 업체 사이의 불평등 등 가려져 있던 오랜 제조업 기반 도시의 모순도 드러냈다. 변화와 모순, 좌절에도 울산 동구의 삶들은 다시 꿈틀거린다.
현대중공업 정문 뒤편 건물에 적힌 표어,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는 공허한 이야기가 됐다.

현대중공업 정문 뒤편 건물에 적힌 표어,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는 공허한 이야기가 됐다.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2015년 12월,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안에 있는 전통 한옥인 영빈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지은 영빈관을 2009년 새로 고친 건물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50대 후반 남자들이 한 줄로 섰다. 그 사이에 정년퇴직자 강경남(62·당시 58살)도 서 있었다. 그의 배우자와 다른 동료들의 배우자들이 앞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싱그러운 꽃다발을 배우자들이 안고 있었다. 이들의 뒤쪽에 ‘현대중공업 정년퇴임식’이라는 펼침막이 내걸렸다.

강경남이 머릿속에 그리던 자신의 정년퇴임식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정년퇴임식을 맞지 못했다.

‘사오정’(45살 정년), ‘오륙도’(56살까지 직장을 다니면 월급 도둑)같이 짧아진 정년을 빗댄 신조어가 나오며 한국의 평생직장 신화는 ‘아이엠에프’(IMF·외환위기 사태) 때 무너졌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에서는 이 신화가 10여 년 더 유효했다. 아니, 오래된 신화는 2010년에 와서야 더 빛났다. 2010년 12월9일부터 보름 동안 열린 정년퇴임식을 950명이 한꺼번에 치렀다. 현대중공업 창사 이래 최대 규모였다.

‘만 세대’ 아파트, 수출 10억불, 한국 최고의 직장…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강경남의 삶 대부분은 현대중공업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974년 부산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강경남은 스무 살에 ‘고졸 1기생’으로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1972년 문을 연 현대중공업 훈련원 10기생이기도 했다.

1980년 현대중공업은 일본의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가 선정한 조선 분야 세계 10위 조선소로 올라섰다. 현대중공업 명찰은 강경남에게 훈장이 됐다. 술집에 가면 현대중공업 작업복만 보고도 딸을 둔 어른들은 “우리 딸 시집보내겠다”며 술잔을 건넸다. 강경남은 퇴근하고도 일부러 작업복을 입고 다녔다. 강경남은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 동구에서 아내를 만났다. 같은 부서 사무보조였던 아내는 동구 토박이였다. 아내가 살던 바닷가 마을 집은 현대중공업에 터를 내줬다. 1981년 현대중공업은 일산 현대 1단지 아파트 610세대를 첫 분양 했다. 1만 세대가 산다고 붙여진 ‘만 세대’ 아파트 단지들의 시작이었다.

현대중공업은 수출의날 ‘수출 10억불 탑’을 수상했다(1983년). 수출 1억불 탑을 받은 지 불과 9년 만이었다. 1985년 현대중공업은 일본 <다이아몬드>가 선정한 생산고 기준 세계 1위 조선업체가 됐다. 2년 뒤 노동자 대투쟁 때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1990년대 울산 동구에 아파트 단지가 대거 생겼다. 현대패밀리명덕아파트(1990년), 현대패밀리동부아파트(1992년), 서부 2차·명덕 2차 아파트(1993년)가 첫 삽을 떴다. 시중 가격보다 저렴하게 사원 아파트에 들어간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중산층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은 문화·교육·예술 시설을 울산 동구에 지었다. ‘복지국가’는 몰라도 ‘복지 동구’는 손에 잡히는 말이었다. 한마음회관(1991년), 국내 최초 사계절 푸른 잔디 축구장인 서부구장(1996년), 현대예술공원·방어진체육공원(2001년), 현대스포츠클럽(2002년)이 잇달아 생겼다. 2001년 현대중공업은 글로벌 인사 컨설팅 회사인 휴잇어소시에이츠가 선정한 ‘한국 최고 직장’이 됐다. 10억불 탑을 받은 지 24년 만인 2007년에 수출 100억불 탑을 받았다.

사라진 정년퇴임식

강경남은 성장하는 회사와 한몸이었다. 2009년 강경남은 첫 드릴십(Drill ship)을 독자적인 공법으로 설계해 만들었다. 깊은 바다에 있는 원유를 찾아내는 선박 형태의 시추 설비였다. 높이 111.3m의 아파트만 한 드릴십을 바다에 처음 띄웠을 때, 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강경남이 정년퇴직을 앞둔 2015년, 퇴직 앞에 ‘희망’이 붙은 이상한 단어가 떠돌았다. 그러나 ‘위기’는 너무나 흔한 소문일 뿐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를 휩쓸 때 오히려 현대중공업은 서해안에 군산조선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엠에프도, 글로벌 금융위기도 울산 동구에서는 먼 나라, 타인의 고통이었다. 그러던 현대중공업은 2014년 회사 창립 이후 처음으로 1조원 넘는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2013년 3분기 이후 3분기 내리 적자에 같은 해 7월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다. 실적 부진의 주된 원인은 조선과 해양플랜트(해저에 매장된 석유 등을 탐사·시추·생산하는 장비) 부문 대형 공사의 공정 지연과 비용 증가로 인한 손실 확대였다.

260여 명 모든 임원이 사직서를 내고 재신임을 받았다. ‘【속보】 현대중공업, 대대적 희망퇴직에 구조조정’. 2015년 1월14일 뉴스 포털에서 울산 동구 뉴스가 속보로 쏟아졌다. 현대중공업은 “전체 직원 2만8천 명의 5%를 웃도는 1500명을 상대로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동료들은 뉴스에 소문을 덧붙였다. “근무성적이 나쁜 사람이 희망퇴직 대상자라고 하더라.” “고등학교 졸업자를 먼저 내보낸다더라.” 과거와 달리 소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강경남은 마음을 비웠다. 정년퇴직을 10여 개월 앞두고 희망퇴직원을 제출하고 2014년 설립된 ㅇ자회사행을 택했다. ‘부장까지 지낸 선배들이 빠져야 후배들이라도 살아남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년이 된 해, 강경남은 현대중공업 첫 정규직 희망퇴직자가 됐다. 마지막 퇴근을 하고, 강경남은 입었던 작업복을 장롱 한구석에 걸었다. 정년퇴직은 못했지만 40년을 다닌 조선소였다. 강경남은 작업복 한 벌쯤은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사라진 정년퇴임식처럼.

울산 동구 사람들은 예견할 수 없었던 경제적 재난 앞에서 급격한 삶의 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울산 동구 사람들은 예견할 수 없었던 경제적 재난 앞에서 급격한 삶의 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도면을 그리다 희망퇴직원 제출하고

혼돈, 분열. 희망퇴직의 기준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근속 햇수 기준이라더니 젊은이가 희망퇴직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 직급 기준이라더니 여성 사무직에게도 희망퇴직원을 받았다. 작업장과 사무실은 뒤숭숭해졌다. 박보성(57)과 동갑내기 김형식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퇴직한 강경남과 선배들을 보며 희망퇴직은 ‘절망퇴직’이라고 생각했다. 첫 정규직 희망퇴직자의 헌신에도 추가 희생은 막을 수 없었다. 둘 역시 2016년 발표된 희망퇴직 대상자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

둘의 나이 54살이었다. 돈 들어 갈 일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김형식의 아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아빠가 바로 재취업 못하면 둘 다 백수 되겠네.” 김형식의 진담 섞인 농담에 아들은 웃었다. 박보성의 대학생 아들은 졸업 뒤 유학을 가고 싶어 했다. 박보성은 아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유학 가라. 대신 경비를 줄여보자. 유학 가려고 넌 뭘 준비했는데?” “일단 가서 부딪히려고요. 어학연수는 3년 잡고 있어요.” 박보성은 철이 없는 아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런 유학은 못 보낸다. 아빠가 옛날 같지도 않은데 손 벌릴 궁리만 하냐.” 며칠 뒤 아들이 말했다. “유학 갔다 온 애들 보니까 별거 없더라. 유학 안 가도 돼요.” 박보성은 미안했지만 잘됐다는 마음이 컸다.

희망퇴직 대상자 명단이 발표된 날, 그는 설계 도면을 그리던 작업을 하다가 희망퇴직원을 냈다. ‘희망퇴직’ 압박에 그가 느낀 상실감과 배신감은 컸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희망퇴직원을 내고 박보성은 2016년 6월 퇴사 예정일까지 한 달을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34년간 사무직으로 살았는데 회사와 관계는 이렇게 끝났다. 결국 그가 그리던 설계 도면이 완성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울산의 월간 실업률은 2016년 2월 4.6%로, 3개월 새 두 배 이상 치솟았다. 고용노동부는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했다. 문화시설이던 미포복지회관 5층에는 조선업희망센터가 들어섰다. 경남 창원, 전남 목포, 경남 거제 등 전국 조선업희망센터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체불임금 청산, 실업급여 신청 등 조선업종 퇴·실직자 가정의 생계 안정부터 재취업 지원까지 돕는 기관이었다.

조선업 실직자를 위한 직업훈련 지원 사업들도 생겼다. 현대중공업은 구조조정을 시작하면서 퇴직 대상자를 위한 전직지원센터를 운영했다. 박보성도 희망퇴직원을 내기 전 전직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았다. 강사는 “눈높이를 낮춰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교육을 받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훈련비를 지원해주는 요리학원도 있었다.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서 식당을 내는 것은 쉬워 보였다. 박보성은 이내 머리를 저었다. 라면도 겨우 끓이는데 새로 시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소에서 하던 일을 빼면 모든 일이 서툴렀다. 열심히 자격증을 따고 빚을 내 가게를 내도 “그럭저럭 산다”는 이야기를 듣기 어려웠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동료는 빈 복덕방에서 손가락만 빨다가 1년 뒤에 접었다. 산업기사, 중장비기사,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쌓아둔 동료는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퇴직한 뒤에야 가본 작업장

김형식에게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절로 눈이 떠졌다. 아침의 일상이 몸에 남아 있었다. 부서장 조찬회가 있는 날에는 아침 6시20분까지 출근했다. 이제는 5시에 눈을 떠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갈 데가 없었다. 날마다 등산을 가기 시작했다. 구립도서관에 가 손에 걸리는 책들을 뽑아 읽었다. 그러고는 난생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다.

채용 누리집에 접속해 이력서를 내려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7년 동안 현대중공업 경영지원 부서에서 원가를 계산했던 김형식은 또래보다 컴퓨터를 곧잘 했다. 하지만 이력서에 채울 경력은 ‘현대중공업’ 단 한 줄뿐이었다. 좀더 약삭빠르게 살걸 후회가 됐다. 그의 지원서를 받은 중소기업들 가운데 어느 곳도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대기업 부장까지 했던 사람을 누가 경리사무로 써주겠어….’ 김형식은 퇴직 후 자신이 새롭게 서 있는 위치와 신분을 받아들여야 했다.

김형식은 길게 보자고 생각하며,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에서 개설한 전기설비 과정 첫 수업을 받았다. 고등학생 때 전기기사 자격증을 땄지만 졸업 후 실무 경험이 없었다. 4개월 동안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취업을 연계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일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재취업은 고스란히 개인들의 몫이었다. 쉴 새도 없이 그는 같은 해 현대중공업과 울산시가 같이 만든 조선업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번엔 교육생 60명 가운데 30명을 계약직으로 채용한다는 조건부였다.

희망퇴직 후 반년 만에 김형식은 현대중공업 ㅇ자회사에서 겨우 일자리를 얻었다. 안전관리 대행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조선소 작업장을 돌면서 안전 관리·감독을 하는 일이었다. 사무실 안에만 있던 그는 27년 만에 사무실 밖 모습을 목격했다. 노동자들은 배 밑바닥으로 들어가 위태롭게 일했다. 기름때에 찌든 조선소 노동자들은 탄내를 뒤집어쓴 탄광 노동자들 같았다.

ㅇ자회사는 김형식이 일했던 건물의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같이 일했던 후배들과 종종 마주쳤다. 후배들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과거의 그와 닮아 있었다. 매케한 먼지와 페인트 가루를 뒤집어쓴 지금의 그와 달랐다. 땀 냄새마저 자신하고는 다르게 느껴졌다. “밥 한 끼 먹어요, 선배.” “그래그래…, 언제 한번 봐야지….” 김형식은 끝내 후배와 약속을 잡지 못했다. 계약이 끝나고 그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안전관리자로 반년을 더 일했다. 구직 반년, ㅇ자회사 비정규직 1년, 하청 노동자 반년, 그 역시 이전 27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통과했다.

컴퓨터 앞에 다시 앉은 김형식은 고용노동부 고용정보시스템인 ‘워크넷’ 누리집에 들어갔다. 워크넷에 올라오는 일자리 중에는 40∼50대 중장년층이 조선소의 경력을 살릴 만한 일은 없었다. 주상복합건물 건설 현장 산업안전관리자 일자리가 눈에 띄었다. 주상복합건물 건설 현장의 소장들은 김형식의 이력서에서 그의 모든 과거를 짐작했다. “대기업 부장까지 하다가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겠어요?” “대기업 복지가 좋은데, 다닐 수 있겠어요?” 소장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단정을 했다. 김형식이 답했다. “다 내려놓고 새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현장 소장들은 여전히 그의 결심을 믿지 못했다. “며칠 하다가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다 내려놓았습니다”

역시나 주상복합건물 건설 현장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 같아도 젊은 사람 쓰지.’ 김형식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다시 워크넷 누리집에 들어가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석유화학 공업단지 안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 이력서를 넣었다. 현장 노동자들이 안전 규칙을 지키면서 일하는지 작업장을 돌아다니면서 관리, 감독하는 일이었다. 면접에 김형식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대답했다. “사무직으로 오래 일했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며칠 뒤 중소기업 쪽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김형식은 또다시 신입사원이 됐다. 출근 첫날, 그는 왜 자신이 합격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조선소도 아닌데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마땅한 작업복이 없어 조선소에서 입었던 작업복을 다시 꺼내 입은 것이었다. ‘우리 모두 신입사원이 됐구나.’ 김형식은 생각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만화 이윤희, 인포그래픽 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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