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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칼 빼 드나

수세적으로 대응하던 국가보훈처, 표준정관 개정 등 강도 높은 개혁 의지
등록 2019-05-01 01:50 수정 2020-05-02 19:29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4월24일 서울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에서 열린 상이군경회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앞줄 오른쪽 둘째가 김덕남 상이군경회장이다. 류우종 기자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4월24일 서울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에서 열린 상이군경회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앞줄 오른쪽 둘째가 김덕남 상이군경회장이다. 류우종 기자

칼집만 만지작거리던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목소리 데시벨을 확 끌어올렸다. 피 처장은 4월24일 서울 영등포구 중앙보훈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제69차 정기총회에 참석해, 강도 높은 보훈단체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그동안 보훈단체와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공격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던 보훈처가 공세로 전환한 것이다.

4개 보훈단체 피 처장 파면 촉구 탄원서

국가보훈처와 보훈단체 사이에는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올 들어서는 국가보훈처 위법·부당 행위 재발방지위원회의 1월 발표 이후 급랭 전선이 형성됐다. 보훈처가 상이군경회 등의 불법적인 ‘명의 대여 사업’과 회장 1인 중심의 단체 운영에 대해 재발 방지 이행 방안을 만들어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자 상이군경회와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등 4개 보훈단체는 20만 회원의 서명을 받아 피 처장 파면 촉구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는 맞불을 놓기에 이르렀다.

피 처장의 상이군경회 정기총회 참석 여부를 놓고도, 보훈처 쪽은 마지막 날까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이군경회의 잔치 자리에 보훈처장이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고, 혹시 참석했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다행히 피 처장과 상이군경회는 정기총회 자리에서 서로 박수와 격려로 덕담을 나누는 예의를 갖추었다.

피 처장은 축사에서 상이군경회원들의 용기와 희생을 예우하면서도, “보훈단체의 불법적 수익사업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메시지를 직접 육성으로 전달했다. 이날 피 처장의 발언이 겨냥하는 목표는 두 개다. 하나는, 불법적인 명의 대여 방식의 수익사업에 단호히 대처한다는 것, 또 하나는 보훈단체 수익사업의 혜택이 일부 운영진, 더 분명하게는 회장 1인에게 돌아가는 폐단을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훈처는 이미 지난해 1월 상이군경회 폐기물사업소의 폐식용유 품목에 대한 사업 승인을 취소했다. 올 상반기 중 상이군경회 폐기물사업소의 고철, 폐전선, 폐변압기 등에 대한 사업 승인을 취소하겠다는 방침도 예고했다. 지난 2월 국회에 제출한 국가유공자단체법 등 5개 단체 관련 법률개정안 내용도 강조했다. 명의 대여 때 수익사업 승인 취소를 의무화하고, 수익사업 승인 유효기간을 3년으로 설정하며, 수익사업 현황 공개를 강화해 투명성을 확보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50% 이상 반드시 회원 복리·복지에

무엇보다, 보훈처가 날카롭게 갈고 있는 비장의 무기는 ‘보훈단체 표준정관(안)’이다. 보훈처 쪽은 지난해 말 표준정관안을 만든 뒤 올해 초 보훈단체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쳤다. 이제 공식 발표와 시행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표준정관안 내용을 보면, 수익사업으로 얻은 이익의 50% 이상을 반드시 회원들의 복리·복지에 사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눈에 띈다. 단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지금은 1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수익금 절반 이상을 회원 복지에 쓸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할 수만 있다면, 회장의 1인 치부를 막고 회원 복지를 향상시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이번 기회에 수익사업을 전면 폐지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총회에서 회장·이사·감사를 직접선거로 뽑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관리를 위탁하는 안도 마련됐다. 감사는 2명 중 1명을 회계사 등 외부 전문가를 임명하고, 상임감사 인건비가 마련되는 대로 반드시 총회에서 선출한다는 방침이다. 회장의 장기집권으로 발생하는 1인 독재를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광역시·도 조직을 이끄는 지부장들도 지부총회에서 직접선거로 뽑도록 표준정관안을 마련했다. 또, 대의원을 지부총회에서 선거로 선출하되, 대의원 수를 정수로 규정하도록 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선관위 위탁 방안에 대해 “지금은 선거관리위원을 회장이 직접 임명하기 때문에 독립성을 해칠뿐더러 내부 갈등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단체 임원이 될 수 없다는 표준정관안도 마련했다. 이 표준정관안이 도입되면, 제2의 김덕남 회장은 생겨날 수 없다. 김 회장은 2006년과 20대 젊은 시절, 세 차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금융기관 채무 내용을 총회 의결 사항으로 규정하고, 임원 보수와 업무추진비를 공개한다는 내용도 담기로 했다. 단체의 보조금과 수익금 등 수입 내용 공개도 의무화하기로 했다. 애초, 회장과 회계 관련 임원의 재산을 등록한다는 안도 들어 있었으나, 의견 수렴 과정에서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준정관 도입 않을 땐 보조금 감축”

보훈처 관계자는 “보훈단체가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신뢰를 먼저 회복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보훈단체의 민주화와 투명화를 촉진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공감대를 담았다”고 표준정관안 마련 취지를 설명했다. 보훈처 쪽은 보훈단체에 표준정관안 채택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단체 설립 취소나 보조금 지급 감축 등 강력한 제재 수단을 강구해 표준정관안 도입을 확산시킬 방침이다.

한편, 상이군경회가 최근 청와대에 제출한 피 처장 파면 촉구 탄원서의 일부 명단이 조작된 것으로 의심된다는 제보가 에 들어왔다. 제보에 따르면, 15명 이름이 들어간 서명지 1장의 15명 필체가 똑같거나, 2~3명의 필체로 작성된 서명지가 다수 포함됐다. 다만 조작 의심 서명지가 전체 2만여 장 중 일부에 그친 것으로 확인된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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