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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말고 사람을 보라

여성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백소영 교수 인터뷰
등록 2019-04-24 01:43 수정 2020-05-02 19:29

삼위일체 하나님(하느님)과 독생자 예수를 믿는 개신교와 천주교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하나님(하느님)의 제1명령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강한 가부장제(전근대적 가부장제) 시대에 쓰인 성경을 현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여성 신학자들조차 ‘낙태죄 폐지’만큼은 드러내놓고 찬성하는 이가 많지 않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기독교학과)는 목사의 첫째 딸로 태어나 평생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아왔고 이화여대와 미국 보스턴대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여대와 강남대에서 강의하며 “하나의 ‘사는 방식’으로서 우리는 생물학적 엄마만이 아니라 (남녀) 모두 ‘엄마’여야 한다”고 외치는 학자다. 신간 을 포함해 등 ‘엄마 되기’를 시리즈로 출판할 정도로 성경에 기초한 모성론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교수는 ‘드물게’ 공론의 장에서 꾸준히 낙태죄 폐지를 설득해왔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뒤 백 교수를 찾는 이가 늘었다. 4월15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주최로 열린 긴급토론회에 패널로 참가했고, 인터뷰 요청도 잇따르고 있다. 백 교수는 4월16일 오후 서울 명동 서울YWCA에서 진행한 인터뷰 첫머리부터 “명료하게”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고 했다. 토론회 등에서 “낙태죄 폐지”를 언급하는 순간, “낙태 권장”으로 공격받은 전례가 너무 많았던 탓이다. “제가 낙태죄 폐지에 찬성한다는 것은 임신 중지를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국가가 낙태를 통제하고 징벌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이죠.”

‘모성’ 중시 신학자지만 낙태죄 폐지 찬성

“유럽에서 1960년대, 미국에서 1970년대 낙태가 논쟁이 됐어요. 낙태를 ‘형사법적인 죄’로 접근해 처벌하는 것은 대부분 선진국들이 폐기했다는 점부터 확인하고 시작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백 교수는 “세계적인 대세니까 따라가자는 말이 아니라, 한국보다 먼저 시민사회가 형성된 나라들의 논의를 살펴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사회가 성숙한 나라에서 ‘낙태를 국가가 관리·통제하고 형벌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으로 태아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여성 인권침해’라는 논의가 이뤄졌고,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 바로 낙태죄 폐지였다”는 설명이다. 백 교수는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의 낙태죄 폐지 논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여성을 재생산 도구나 가산 정도로 보던 가부장제의 문화적 전제가 사라지고, 본격적인 시민사회로 진입한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모르지 않는 기독교에서 여전히 낙태죄 폐지를 우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미국에서 낙태죄 폐지 논쟁이 첨예했을 때, 복음주의 계열에서 ‘프로 라이프(생명 우선) 대 프로 초이스(선택 우선)’를 내세우며 ‘엄마 좀 편하게 살자고 생명을 버리냐’는 식으로 접근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에서 ‘프로 초이스’라는 뜻은 출산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프로 크리에이티브 초이스’(재생산 선택권)였는데 한국에서는 태아를 죽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프리덤 투 추즈 어보션’(낙태 선택의 자유)인 것처럼 잘못 번역돼, 낙태죄 폐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다는 설명이다.

백 교수는 낙태죄 폐지 문제를 ‘생명권 대 선택권’이 아니라 ‘생명권 대 생명권’의 시각에서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인들을 설득할 때도 하나님의 제1명령이 ‘살아라’라는 점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제1명령은 ‘내가 나로 사는 것’이에요. 아이를 낳는 순간 엄마가 물리적·사회적·정신적·경제적으로 충분히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없을 때, 자기도 못 사는 엄마가 어떻게 아이를 살릴 수 있겠어요? 임신 중지는 엄마의 ‘통전적(사전적 낱말 뜻이 아니라 앞뒤 맥락을 살펴서 이해하는) 생명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결정일 수 있어요.”

“예수님은 (율법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안식일 정신을 잊고 안식법에만 몰두해 사람을 정죄한다’(누가복음 6장9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등)고 하셨어요. 안식일은 쉼을 허락하는 사회를 만들라는 명령이셨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정신을 잊은 채 안식일에 사람 살리는 일조차 정죄했거든요. 낙태죄 운운하며 남을 정죄하는 것도 똑같지 않을까요? 엄마들이 ‘아이를 낳아도 괜찮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지는 않으면서, 임신 중지를 정죄하기에 몰두하는 교회가 너무 안타까워요.”

‘생명권 대 선택권’ 아니라 ‘생명권 대 생명권’

백 교수는 낙태하는 여성을 처벌함으로써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징벌적 정의’ 대신, 여성이 출산을 선택했을 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돕는 ‘회복적·치유적 정의’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성에게만 ‘자궁의 역할’을 강요할 게 아니라, 교회와 나라를 비롯한 공동체가 함께 엄마를 품고 살리는 ‘사회적 자궁’, 은유로서 ‘친정엄마’가 돼줘야 한다는 취지다.

전통 세대(1G맘 시절)에 확대가족 공동체가 안전망이었고, 근현대 사회(2~3G맘 시절)에는 각종 연금과 보험 등 법제도가 안전망이었다. 이 두 안전망이 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후기 근대는 존재론적 위험이 가득한 위험 사회다. 교회는 ‘선교적 소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인 구성원과 조직과 재력도 있다. 교회 같은 공동체가 연대의 그물망을 만들고, 죽을 것 같을 때 “그냥 뛰어들어가면 살 것 같은” 친정 같은 4세대적 역할(4G맘 시절)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백 교수는 신간 에서 싱글맘을 품는 ‘사회적 자궁’ 역할을 하는 두리홈을 소개한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싱글맘 그룹홈이다. 두리홈에 오는 십 대들은 아기 아빠와 친정 부모에게서 버려진 뒤에도 아기를 버리지 않기로 선택한 싱글맘이다. 두리홈은 ‘공적인 친정엄마’로서, 임신 기간과 출산 이후 1년 총 2년간 엄마와 아기를 품는다. 백 교수 같은 인문학자는 아이를 기를 때와 입양 보낼 때 마주하는 상황을 강의하면서 엄마들 스스로 양육할지 입양 보낼지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돌본다. 엄마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50~60대 지역주민들이 돌아가며 아기를 봐주기도 한다. 지역사회의 ‘재능기부’로 이뤄지는 일종의 ‘친정엄마 군단’이다.

성경에는 창세기 1장28절 “생육하고 번성하라” 같은 창조 명령 외에, 임신 중지와 관련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백 교수에게 ‘만일 예수가 살아 계셨다면 낙태죄 폐지와 관련해 뭐라고 하셨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백 교수는 사견임을 강조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답했다.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으니 ‘유추’밖에 할 수 없는데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분을 내신 적이 딱 두 번 있어요. 한 번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걸 마음으로 정죄한 바리새인을 향해, 다른 한 번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집으로 만든 자들을 향해. 두 번 다 율법에 사로잡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을 내셨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4월13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프로라이프연합회 주최로 열린 ‘제3회 생명대행진’ 행사에 참가한 가톨릭 수녀들이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4월13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프로라이프연합회 주최로 열린 ‘제3회 생명대행진’ 행사에 참가한 가톨릭 수녀들이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낙태죄·혼전순결 아니라 ‘피임’ 교육해야

백 교수는 어느 12월에 있었던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언급했다. 너무 추운 날이었는데, 두리홈 어린 엄마들이 행사 참석을 위해 단체로 큰 차로 이동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엄마들이 하나같이 자기 외투를 벗어 띠로 맨 아기를 꼭 감싼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자기들도 아기인데, 아기를 감싸겠다고…’ 백 교수가 큰 감동을 받고 ‘울컥’ 하고 있을 때, 어린 미혼 엄마들을 쳐다보는 외부 사람들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들 뭐야…’ 하는 한겨울보다 더 차가운 시선이었다. “아무런 지지 기반도 없이 아기를 낳기로 한, 너무 훌륭한 결정을 한 엄마들이잖아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그런 천대를 받아요. ‘아,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이유가) 이거구나…’ 싶었어요.”

백 교수는 낙태죄 폐지 논란을 넘어 “더 이상 결혼과 성을 결부해 논의할 수 없는 시대, ‘성’이라는 부분을 신학적·실천적으로 어떻게 접근할지 공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기독교는 그동안 ‘혼전순결’ 원칙을 버리지 못해 피임 교육을 강조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백 교수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토론회에서 보수적인 남성 패널들조차 단 한 사람도 혼전순결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신학적·윤리적으로 입장이 다르지만,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결혼을 안 하기로 결정하는 인구가 느는 ‘현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백 교수는 결혼과 핵가족이라는 제도의 실효성이 다 했다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결혼해서 내 혈육을 많이 낳으라’는 뜻으로 좁게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대신 ‘결혼이든 동거든 무엇이든 서로 헌신적 관계 안에서 더 약한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라’는 취지로 확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불어 서로 함께, ‘카이 알렐론’

백 교수는 말했다. “이미 생긴 아이를 낳을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고 임신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교회가 힘을 쏟는 게 중요해요. 사도 바울이 가장 많이 쓴 말이 헬라어 ‘카이 알렐론’(Kai allelon·더불어, 서로 함께)이에요. 교회가 함께 모여서 할 일은 자기결정권을 부여받은 여성들이 스스로 아기를 낳기로 결정할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거예요. 임신 중지를 결정한 여성을 정죄하는 방식으로 가는 건 (엄마도 아기도) 다 잃어버리는 방식이죠.”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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