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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판을 뒤집어엎은 여성들의, ‘낙태죄 폐지’까지 여섯 장면
등록 2019-04-22 09:06 수정 2020-05-02 19:29
2018년 9월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등 269명이 만든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 사진 공동취재,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2018년 9월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등 269명이 만든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 사진 공동취재,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지금도 이 나라에서는 임신중절수술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수천 수만의 태아가 햇빛도 보기 전에 차디찬 수술기구에 의해 부서지고 찢겨진 채 쓰레기와 함께 버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무덤도 없습니다. 그들에겐 죽음을 슬퍼해주는 부모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생명이 시작된 생명체를 아무런 가책 없이 살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94년 MBC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M)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대사다. 드라마는 당시 ‘임신중지(낙태)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다’는 극찬을 받았다.
1953년 낙태죄가 제정된 이래, 국가는 여성의 몸을 인구정책으로 바라봐왔다. 인구억제책을 쓸 땐 정부가 임신중절을 지원했다가, 저출산 정국에선 수술을 단속했다. 산아제한을 할 때는 보건소에서 소파수술(긁어냄술)을 했고, 정부는 임신중절을 원하는 임신 초기 여성들에게 월경조절술 비용도 지급했다. 2003년 12월에 나온 논문 ‘해방 이후 우리나라 낙태의 실태와 과제’(전효숙·서홍관)를 보면, 1963년 5월9일자 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행한 조사에서 1058명의 유부녀 대상자 중 33. 2%가 낙태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보도했다. 임신중절은 내 어머니가, 할머니가, 옆집 언니가 쉽게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저출산 문제가 불거지자 인구억제책을 펴온 국가는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은 가부장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열악한 여성노동 환경에 집중하느라 ‘낙태죄’에까지 역량을 쏟지 못했다.
임신중절 장면을 성교육이라고 보여주며 여성에게 죄책감과 금기를 심었던 세월은 지났고, 대중의 인식은 달라졌다. 여성들은 이제 ‘생명권 대 선택권’이라는 틀을 넘어서 국가에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드라마 이 방송된 지 25년이 지나 헌법재판소는 “임신, 출산 및 육아가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임신한 여성이 임신 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제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66년 만에 여성들은 ‘죄인의 몸’에서 해방됐다.
낙태에서 ‘죄’가 떨어지긴 했지만 논란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헌재 결정문이 마르기도 전에 주수(임신 기간) 제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도 몸을 사린다. 의사들은 수술 거부권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이미 낙태죄 폐지는 시대의 상식이 되었고, 조만간, 머지않아 법이 마련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백영경, ) “(백영경 교수의 이야기처럼) 낙태죄 폐지는 현실화됐다. 여성들은 성취를 경험했고, 뒤로 가지 않는다. 같이 싸울 사람이 더 많아질 테니까 더 크게 싸울 거다.”(제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가족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혹은 ‘우생학적’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통제해온 국가. 그 국가 정책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으로 여성들을 주물러왔던 낙태죄. 1953년 태어난 낙태죄는 2020년 비로소 사망한다. 합헌이 헌법 불합치가 되기까지 6년8개월, 2423일이 걸렸다.
여성들은 2019년 4월11일에야 ‘낙태죄 합헌’이 일으킨 분노에서 해방됐다. 문란한 여성과 조신한 여성으로 나뉘고, 재생산 권리를 박탈당하면서 응축된 여성들의 분노가 터져나와 7년의 싸움이 가능했다. 싸움은 때론 더디기도, 때론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멈추거나 후퇴하진 않았다. ‘낙태죄 폐지’ 결정을 이끈 건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수많은 여성과 ‘생명권 대 선택권’으로 고착된 판을 뒤집어엎은 여성들이다.
2010년 ‘낙태 고발 정국’에서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의 비범죄화를 외롭게 외쳤던 여성단체부터,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을 증언한 여성들, 헌법재판소(헌재) 앞에서 1인시위를 한 여성들, 그리고 헌재의 ‘낙태죄 폐지’ 결정을 환영하는 목소리까지, 이 여섯 이야기를 ‘승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끊임없이 내온 목소리들 덕분에 비로소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여성들에게 고할 수 있게 됐다. “당신은 범죄자가 아니다.”


장면1) 2016년 10월17일,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 기자회견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임신중지’가 죄로서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 의료법 개정안에서 해당 항목이 삭제된다 하더라도 이미 형법상 낙태죄가 존재하고 있으며, 낙태죄가 존재하는 이상 법과 현실의 모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 구호가 여성운동 전면에 등장한 건 2016년이다. 시작은 보건복지부(복지부)였다. 2016년 9월 복지부가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개정령(안)’을 내놓으면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촉발했다. 임신중절수술 허용 사유를 다룬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을 위반해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를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적발시 최대 1년간 의사 자격을 정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낙태 수술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타리(활동가 이름)는 복지부가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내놓은 날을 떠올리며 “기쁨과 설렘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기대했던 낙태죄가 폐지되는 날이 당겨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낙태죄 폐지’ 구호를 꺼낼지 준비하고 있었는데, 복지부가 의료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바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타리는 장애 여성들의 인권운동을 하는 ‘장애여성공감’에서 활동하면서, 2015년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심 있는 연구자·활동가·변호사·의사들과 함께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이하 기획단)을 구성했다. 이 모임은 2016년 성과재생산포럼(이하 포럼)으로 전환됐다. 포럼 안에서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형법상 낙태죄 폐지 없이 모자보건법만 뜯어고쳐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이 모였다.
“포럼을 하면서 (모성권 중심의) 임부 정책을 어떻게 뒤집을지, 소수자 관점에서 어떻게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이야기할지 논의하던 차에 복지부 개정안이 떴다. 당시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대결 구도가 있었는데, 이걸 뒤집고 국가책임을 드러내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타리)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 행동강령에 따르면 재생산권은 “모든 커플과 개인이 자녀의 수, 터울 시기를 자유롭고 책임 있게 결정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정보와 수단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성적·재생산적 건강을 누릴 권리”를 말한다.
복지부의 ‘헛발질’에 여성들은 바로 움직였다.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불법화하는 데 반대한 폴란드 여성들의 ‘검은 시위’를 본뜬 한국판 ‘검은 시위’가 열렸다. 그리고 이틀 뒤인 2016년 10월17일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라는 제목의 기자회견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이 기자회견에서 유명한 구호가 만들어졌다.
이 기자회견의 사회를 본 여성학·인류학연구활동가 이유림은 이날을 “신내림받은 날”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기자회견 사회를 보는 날이었다. 조미경 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 소장이 ‘국가가 여성의 몸에 대해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 지금까지 누가 낙태죄를 저질렀냐’고 했다. 그래서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를, 그다음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가 ‘호주제가 폐지되는 순간을 기억한다’고 말해서 ‘호주제도 폐지됐다, 낙태죄도 폐지하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두 구호가 지금까지 왔다.” “그날 신내림받았지.”(타리)

장면2) 2017년 9월28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발족식
“인터넷 검색으로 어렵게 찾아간 병원에서였습니다.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의 수술 방법으로, 달라는 대로의 금액을 주고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수술대 의자와 수술 도구에 바로 전 사람이 수술할 때 묻은 것 같은 피가 보였습니다. 순간, ‘소독 한번 해달라고 부탁할까?’ ‘애 지우러 온 주제에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할까?’ ‘이런 비위생적인 병원에서 왜 내가 내 돈 주고 수술을 받아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어렵게 찾은 병원인데 수술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결국 아무것도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타리와 유림이 활동하는 포럼은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 장애 운동 등의 관점으로 성과 재생산 권리를 확장하는 운동을 해오고” 있다. 포럼은 본격적으로 ‘낙태죄 폐지’를 위한 ‘배틀그라운드’를 만들었다. 2017년 7월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와 함께 ‘낙태죄 폐지를 위한 공동대응 연대체 구성’을 진행했다.
“2017년 여름 민우회 사무실에서 낙태죄 폐지 연대체 첫 모임을 했다.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재생산권 침해와 성과 재생산의 권리 차별은 단지 여성뿐만이 아니라 전 사회 시민들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지향점을 논의했다.”(제이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 이로써 여성뿐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이라는, ‘낙태죄 폐지’ 구호를 전면에 내세운 연대체가 만들어졌다.
뒷배는 대중이었다.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여성들은 “너는 나다”라고 외치며 공감했다. 또 같은 해 한국 여성의 실사를 보여주는 책, 이 나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문단내_성폭력 같은 해시태그가 번졌다. 2017년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청원에 23만여 명이 동의했다. 2018년엔 #미투 운동이 확산됐다. 대중의 역동에 ‘낙태죄 폐지’ 구호가 더해졌다.
“순풍이 있었다. 개개인들이 내 권리라는 인식이 생기고, 청원도 올라가고, 검은 시위에 대한 반응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운동을 얹을 수 있었다.”(제이)
국내 분위기가 낙태죄 폐지를 끌었다면 국외에선 밀었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선 2018년 5월 국민투표로 낙태죄를 폐지했다. 아일랜드는 157년간 임신중지를 강력하게 규제해왔다.

장면3) 2019년 4월10일, 헌재 앞 1인시위
“저는 이 시위가 낙태죄 폐지를 위한 마지막 시위이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낙태죄의 마지막을 보고 싶습니다.”

여성들은 여성에게 온전히 임신중지의 책임을 지우는 사회구조에 불만을 터뜨렸다. 2018년 9월29일 269명이 모여 형법 제269조를 지우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269명이 검은색과 흰색 피켓을 들고 숫자 269를 만들고, 그 위 빨간색 천으로 줄을 긋는 식이었다. 인터넷에서 퍼포먼스 참여자 신청을 받았는데 금세 마감됐다. 심지어 대기조까지 있었다. 더운 날씨였는데 약 3시간 동안 헤쳐 모여를 반복했다.
유림은 “그 일사불란함에 놀랐다. 외국에서 보면 단결력이 너무 좋아 이게 사우스코리아(남한)인지, 노스코리아(북한)인지 모를 정도였다. 테이크를 10번쯤 진행했는데,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그날을 회상했다. 문설희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2018년 7월7일 광화문광장에서 있었던 ‘낙태죄 위헌 촉구’ 집회를 잊지 못한다. “낙태라는 이름을 걸고 연 집회인데 누가 얼마나 올까 긴장됐다. 하지만 수천 명이 모였다. 긴 시간 진행된 집회를 끝까지 지켜보던 여성들, 위헌 촉구 서명을 하려고 긴 줄을 섰던 여성들, 그 긍정적 기운과 에너지에 힘을 받았다.”

장면4) 2010년 8월31일, 임신출산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
“임신중지(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을 처벌하지 말라. 임신중지(낙태)한 여성은 죄인이 아니다. 본인 요청에 의한 임신중지(낙태)를 허용하라.”

모낙폐의 전신은 ‘임신출산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임출넷)다. 산부인과 의사 모임인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2010년 2월 “불법 낙태수술을 한다”며 병원과 의사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프로라이프’라는 이름은 1970년대 미국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프로라이프’(pro-life)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프로초이스’(pro-choice) 간의 논쟁에서 나왔다. 의사가 의사를 고발하면서, ‘낙태 논쟁’이 한국 사회에서 물 위로 떠올랐다. 이른바 ‘2010 낙태 고발 정국’이다.
이후 이에 대응해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들이 참여한 임출넷이 생긴다. 임출넷은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을 처벌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며 비범죄화에 나섰지만 ‘낙태죄 폐지’라는 구호까지는 닿지 못했다. 임출넷에서 활동했던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지금과 달라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주장까지는 하지 못했다.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절수술 허용 사유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프로라이프의 고발 뒤 정부가 단속과 처벌을 하면서 산부인과 의사들의 임신중절수술 거부가 늘었다. 이 때문에 수술 비용은 몇백만원까지 치솟았다. 인근 국가로 원정 수술을 떠나는 사례까지 생겼다. “임신중지를 알선해주겠다고 유인해 성폭행한 사건, 브로커들이 인터넷으로 가짜 유산유도약을 유통한 일, 인터넷에 근거 없는 임신중절 정보들이 난무하는 것을 목도한 적 있다. 단지 의료 기술의 낙후 때문만이 아니라, 법과 현실의 부조리, 빈부 격차,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좌지우지되는 임신중지의 불평등에 대해, 정의와 건강 추구로서의 임신중지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필요하다.”(윤정원, )
“프로라이프 고발 이후 민우회에 임신중지 관련 문의 전화가 굉장히 많이 왔다고 한다. 파혼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성이 있었는데, 의사한테 무릎 꿇고 빌어서 수술했다더라.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남성이 여성을 고발한 사건도 있었다.”(제이)
장면5) 2012년 11월15일, 임출넷 사망 여고생 기자회견
“수많은 여성이 터무니없이 치솟은 비용과 확인할 수 없는 정보, 안전하지 못한 수술에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심지어 원정 낙태까지 감행해야 하는 현실이 2010년 이후 심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낙태죄가 처음 헌재 심판대에 오른 건 2010년. 임신 6주 된 여성에게 임신중절수술을 한 혐의로 2009년 기소된 조산사 송아무개씨가 처벌 조항인 형법 제270조 1항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을 때다. 헌재는 2012년 4 대 4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낙태죄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보다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헌재의 합헌 결정이 난 지 3개월 만인 그해 11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여고생이 23주째에 임신중절수술을 받다가 과다 출혈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 사건은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고,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는 내용보다 ‘여고생이 낙태했다’는 자극적인 이슈로 흘러갔다. 윤정원 과장은 “당시 레지던트 1년차였는데, 사건을 나중에 알게 됐다. (임신 상태에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유산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임신중절수술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병원이 수술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한) 아일랜드 사비타 사건처럼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는데, 사회적 낙인이나 인식 때문에 그렇지 못했다. 나중에 이 사건을 알고 나서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4월11일 헌재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2012년, 헌재도 정부 부처도 언론도 여론도 심지어 프로라이프도 낙태죄 폐지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인식이 일천하던 그때는 언론(기자)도 별로 없이 우리끼리 기자회견을 했다. 그렇게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린 그해 겨울, 19세 청소년이 어렵게 찾아간 병원에서 수술 도중 처벌이 두려웠던 의사 때문에 이송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사회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타살.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5년 뒤 임신중절수술을 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 정아무개씨가 형법 제269조 1항, 형법 제270조 1항에 대해 2017년 2월 헌법 소원 심판 청구를 하면서 두 번째 위헌소송이 진행됐다. 청구인 공동대리인단에 합류한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2012년 헌재 결정에서는 마치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 두 권리가 충돌하고 양자택일해야 하는 구조였다면, 이번에 준비할 땐 여성의 선택을 존중할 때 생명 보호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여성의 목소리를 서면에 많이 넣어서 앙상한 이론적인 법리 차원이 아니라,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헌재가 듣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지난 4월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껴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껴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면6) 2019년 4월11일, 헌법 불합치 결정 뒤 헌법재판소 앞
“임신중지가 66년 만에 임신할 수 있는 사람의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여성은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시작된다, 낙태죄 없는 세상! 우리가 낙태죄 사망의 날을 기념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고양이 바리깡을 챙겨야 하나 했다.” 유림은 4월11일 헌재 앞으로 출발하기 전 고민했다. 만약 헌재가 낙태죄에 합헌 결정을 한다면,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 현실화된다면, “합헌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밀 생각이었다. 수술 처치를 하는 의사들이 있으니까 잘 밀겠지’ 생각했다.” 설희는 네 살배기 아들에게 “엄마 오늘 늦을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려움은 이내 걷혔다. “헌재 앞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쁜 결정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타리)
이날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자고 논쟁을 벌였던 모낙폐 활동가들은 두세 시간만 자고 헌재 앞으로 모였다. 헌재 결정 전까지 이날 5시간30분 동안 릴레이 기자회견이 열렸다. “낙태죄 폐지 반대 쪽에서 출력이 좋은 앰프를 가져와서 ‘생명은 소중해요’라고 소리치는데 괴롭더라.”(타리)
2016년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구호가 나온 날처럼 이날도 사회를 맡은 유림은 헌재 결정 뒤 최대한 표정에 신경 썼다. “웃어야지, 저들에게 우리가 승리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기자회견에서 나영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던 타리는 “유림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봤다. 나도 사진을 보고서야 유림의 표정이 좋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제이는 그날 저녁 서울 종로구 안국역 앞 도로에서 열린 헌재 결정 환영 집회 뒤 열린 뒤풀이 장소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서 봤던 여성이었다. “그분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그의 인생 전환점이었다.” 유림은 안전한 임신중절을 돕는 단체 위민헬프위민으로부터 ‘You are my shero’(당신은 나의 영웅입니다)라는 메일을 받았다. “hero 앞에 s를 붙였더라.”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경제적·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다.” -2019년 4월11일, 헌재 헌법 불합치 결정문

헌재 결정 뒤 이정미 정의당 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 10명은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내놨다. 임신 14주 이내는 여성의 요청만으로, 14~22주까지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절수술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골자다. 즉각 여성계는 반발했다. “여성이 주수(기간)와 관계없이, 좀더 건강한 이른 주수에 수술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뭘 할지, 뭘 보장해야 할지 논의하는 게 아니라, 주수를 토대로 제한하겠다는 관점이 잘못됐다.”(유림)
헌재 결정 이후에도 이들은 맘 편히 쉬지 못한다. 헌재가 법개정 시기로 둔 2020년 12월31일 사이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유산유도약 합법화를 위해서, 그리고 의사들의 수술 거부 움직임과도 싸워야 한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제 우리는 좋은 출발점에 섰다.”(설희)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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