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광장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촛불을 함께 든 3대 모녀 송이순·이민주·윤정현씨…

‘박근혜 탄핵’에서 이젠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기 위해 거리로
등록 2017-03-14 11:32 수정 2020-05-02 19:28
촛불이 이겼다.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권력이 광장의 함성으로 무너졌다.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결정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공화국의 헌법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상식의 승리였다.
은 이 승리를 위해 가장 애써온 무명의 이름을 찾았다. 추운 날, 눈 오는 날, 진눈깨비 날리던 날 가리지 않고 상식이 이길 것이란 소박한 믿음으로 200여 일을 기꺼이 버텨낸 사람들. 거리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거리에 서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의 이웃들을 만났다.
취재 김선식·홍석재·김완·김효실 기자, 편집 허윤희·송채경화 기자, 디자인 장광석
3월10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에서 박근혜 파면 결정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얼싸안은 채 기쁨을 나누고 있다. 박승화 기자

3월10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에서 박근혜 파면 결정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얼싸안은 채 기쁨을 나누고 있다. 박승화 기자

할머니는 ‘너무나’ 속상했다. 자신의 78번째 생일 기념 제주도 여행을 가자는 제안이 마뜩지 않았다. 추진력이 강한 어머니는 이미 호텔 예약을 마쳤다. 할머니는 부모 생일상을 차려주려는 자식 마음은 고마웠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2016년 11월11일 금요일이 낀 주말이었다. 다음날 토요일 서울 광화문에선 제3차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범국민행동 촛불집회가 예정돼 있었다. 제1, 2차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할머니는 매 주말 집회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제주도 여행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촛불 개근 시민’

다음날 제주에서도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 5명은 여행 시간을 쪼개 집회에 갔다. 그날 처음 촛불집회에 참석한 할머니의 손녀는 “수능시험을 며칠 앞두고 시국 발언을 하러 나온 고3 여학생을 보고 뭉클했다”고 말했다. 집회에 못 가 속상했던 할머니는 제주 집회에서 새로운 풍경을 봤다. 누군가 집회 참가자들에게 제주 향토음식 오메기떡을 돌렸다. 누군진 모르지만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20대 초반 서울 동대문에서 목격한 모습이 스쳐갔다. 경찰서를 점령한 대학생들에게 시민들은 당시 귀했던 빵을 건네주었다. “이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기자와 통화한 전화기 너머에서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할머니 송이순(79)씨, 어머니 이민주(55)씨, 딸 윤정현(31)씨 3대가 모두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할머니 송씨와 어머니 이씨는 2016년 10월29일부터 2017년 3월4일까지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19차례 범국민행동 집회에 모두 참석한 ‘촛불 개근 시민’이다. 윤씨는 제주도 집회를 처음으로 5차례 참석했다.

어머니 이씨는 평일에도 거의 매일 촛불을 들었다. 2016년 10월29일부터 넉 달 반 동안 130차례 정도 참석했다. 할머니 송씨도 평일에만 평균 두 차례 촛불집회에 갔다. 딸 윤씨는 처음엔 촛불집회에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쌓였다. “가정이 우선 아니냐”고 따졌다가 어머니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 사태를 보고 처음 국가 시스템이 붕괴됐다”고 어머니 이민주씨는 느꼈다.

지난해 12월 어느 날,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윤씨의 여동생이 시험공부에 지쳐 독감·몸살로 링거를 맞았다. 여동생은 집회에 나간 어머니에게 “몸이 좀 나은 것 같으니 집회에 가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대뜸 “지하철역만 나오면 촛불집회 참가자 인원수로 집계되니까, 나와서 정 힘들면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있더라도 오라”고 말했다. 결국 집회에 간 여동생은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대뜸 오라고 한) 어머니한테 서운했다”고 했다.

어머니 이씨는 단호했다. “모든 사람은 사정이 있다. 모두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광장에 나오는 것이다. 나도 매일 집회에 나가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작년 10월25일 이후 한 번도 회사 회식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딸 윤씨는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집회에 나갔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이후 윤씨는 어머니가 집회에 간다고 하면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어머니 이씨도 지난해 가을 이전엔 촛불집회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2016년 10월25일, 검경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백남기 농민의 부검영장 2차 강제 집행을 시도한 날이다. 고 백남기 농민은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강제 진압하는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이듬해 9월25일 그가 숨지자 서울대병원은 그의 사망 원인을 ‘병사’로 기재했다. 둘째딸이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어머니 이씨는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 사태를 보고 처음 국가 시스템이 붕괴됐다”고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흘 뒤, 최순실씨의 태블릿PC 관련 보도가 터져나왔다. 어머니 이씨에겐 “(국가 시스템이 붕괴했다는) 심증이 확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여야 세상이 바뀐다”
2016년 11월12일 제주시청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촉구’ 범국민행동 촛불집회에 참석힌 이민주씨 가족. 오른쪽부터 세 명이 딸 윤정현씨, 어머니 이민주씨, 할머니 송이순씨. 이민주 제공

2016년 11월12일 제주시청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촉구’ 범국민행동 촛불집회에 참석힌 이민주씨 가족. 오른쪽부터 세 명이 딸 윤정현씨, 어머니 이민주씨, 할머니 송이순씨. 이민주 제공

어머니 이씨에겐 동료 시민들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대학 다니면서 사회활동을 전면에 나서서 하지 못한 마음의 빚”이었다. 그의 마음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빚도 쌓여 있다. 그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들어가지 못한다. “(제대로 진상 규명이 될 때까지) 희생자 얼굴을 대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딸 윤씨도 더 이상 방관자로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나서겠지 하면서 방관했다. 국정 농단 사태를 보면서 앞으로도 얼마든지 제2의 세월호, 제2의 최순실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여야 세상이 바뀔 것 같다.”

할머니 송씨는 “이런 썩은 정치를 후손에게 남겨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뿌리를 뽑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거의 매일 촛불집회에 나간 어머니 이씨에겐, 중년 남성 청소노동자의 투박한 발언이 머릿속에 남았다. 어느 평일 저녁,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천막 안에 촛불을 든 시민 몇 명이 모였다. 호텔에서 청소일을 한다고 소개한 50대 남성 참가자가 발언 기회를 얻었다.

그는 “정권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잘 이어가지 못했다. 평일 촛불집회에 조용히 나와 조리 없이 말하거나 무언가 잔뜩 미리 써와서 읽는 사람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말이 어머니 이씨는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

할머니 송씨는 자신이 보탬이 될 곳을 찾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에 항의하는 변호사, 교수들이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을 때다. 송씨는 법원 앞 집회에만 모두 6차례 다녀왔다. “그곳엔 변호사, 교수들만 주로 있고 일반인은 잘 안 오니까 사람이 적으면 외로울까봐 내가 참여하면 조금 보탬이 될까 해서 갔다.”

어느 날 오후 2시, 법원 앞 집회를 마치고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근처 아파트에서 다섯 가구가 창문을 열고 ‘박근혜 퇴진’ 현수막을 펼쳤다. 그들이 손을 흔들며 행진 대오를 응원하던 모습이 아직 할머니 송씨의 눈에 선하다. 길거리에서 집회를 응원하고 환영하는 시민들 덕에 그는 외롭지 않았다.

할머니 송씨는 2010년 72살 나이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이듬해 대전·충남 지역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는 송씨는 전공을 문예창작과로 선택했다. 요즘에도 불교대학, 독서클럽을 다니며 수필을 쓴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과오를 쉬운 언어로 설명했다.

“수돗물 한 방울에도 세금이 붙는다. 그런 돈을 가져다 엉뚱한 사람들에게 퍼준 걸 생각하면 절대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멘다. 나오라고도, 구하지도 않았다. 대기업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정권에 돈 바친 건 결국 노동자들 돈 조금 주고 물건 비싸게 파는 결과로 돌아오는 것 아닌가.”

“이번 기회에 적폐의 뿌리를 뽑아내자”

어머니 이씨는 또 다른 문제들을 지적한다. “대통령은 참모들 대면보고를 받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듣고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데 박근혜는 최순실의 아바타였다. 그런 박근혜를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박정희 프레임’ 덕을 보려고 박근혜를 대통령 후보로 세웠다. 새누리당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많은 젊은이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든 것, 대기업 세금을 깎아준 것, 사드 배치, 세월호 참사와 고 백남기 농민 사건 이후의 대처들도 용납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딸 윤씨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 사태를 보면서 내가 노력하면 과연 사는 게 나아질까, 국민연금은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3대 모녀는 최근 새 깃발을 하나 더 만들었다. ‘새로운 대한민국 우리가 만든다’

할머니 송씨는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한 날, 오전 9시 서울 노원구 집을 나섰다. 헌재 앞에서 탄핵 인용 결정 소식을 듣고 집회 참가자들과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집회엔 어르신이 많은데 우린 별로 없다”며 송씨를 행진 대오 맨 앞에 서도록 했다.

송씨는 태극기집회 참가자와 말다툼을 벌인 일을 떠올렸다. 지하철에서 태극기를 든 남성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송씨의 가방에 붙은 세월호 리본을 보고 시비 걸 듯 “이게 뭐냐”고 물었다. 송씨는 “아저씨 몰라서 물어요? 박근혜한테 충성하는 것만 보이고 이걸 아직도 몰라요?”라고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 남성은 아무 말 않고 자리를 떴다. 송씨는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을 보면) 저 후손은 그 가정에서 자라 저런 모습을 당연한 걸로 알까, 그들도 저렇게 자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 소식에 3대 모녀는 마냥 기뻐하진 않았다. 할머니 송씨는 “처음엔 탄핵 기각하는 줄 알고 그동안 추위에 촛불 들고 헛된 고생을 했나, 모두 권력의 시녀가 됐나 싶어서 속이 너무 상했는데, 결과를 보고 4남매 대학 보낼 때보다 더 기뻤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민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심어줘야 한다. 촛불은 계속 가야 한다. 박근혜 구속하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대기업들의 범죄를 제대로 파헤쳐야 한다. 친일파, 박정희, 박근혜로 이어온 적폐의 뿌리를 이번 기회에 뽑아내자. 이 기회에 권리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찾자”고 말했다.

아직 축배를 들 수 없는 무거운 현실

어머니 이씨는 “오늘 저녁 광화문에서 여러 시민들을 만나면 축제 분위기를 같이 즐기겠지만 앞으로 남은 일이 너무 험난하다는 생각에 담담해진다. 아직 축배를 들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무겁다. 1960년 4·19,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었던 역사를 보면 그 두려움에 잘 들뜨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정치권을 보면 (대선 이후) 또 다른 유형의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광장에서 계속 감시하고 압박해야 한다. 국민이 스스로 감수하겠다고 하면 국민 뜻을 받아들이면 좋겠다. 정권 교체를 위해 투표하겠지만 내가 뽑은 대통령 때문에 또 촛불을 들까봐 걱정이다. 어떤 일이 있으면 두 눈 부릅뜨고 언론을 무작정 믿지 않고 끝까지 살펴보는 게 국민의 의무다”라고 덧붙였다.

딸 윤씨는 “탄핵 선고 전까지 면접 보기 전처럼 두려웠는데 막상 결과를 듣고 나니 소리 지를 만큼 기쁘진 않았다”며 “나를 포함한 시민들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 규명돼야 할 문제를 계속 지켜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머니 이씨는 주말 촛불집회마다 커다란 노란 깃발을 들고 나갔다. 할머니 송씨는 행진하다 조금 뒤처지면, 노란 깃발을 보고 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노란 깃발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상식적인 나라에서 살고 싶다’

3대 모녀는 최근 새 깃발을 하나 더 만들었다. ‘새로운 대한민국 우리가 만든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드립니다. 탄핵/대선 특대호 1+1 바로 가기
▶http://bit.ly/2neDMOQ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