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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증하라, 현장 지휘관의 집착

김경일 123정장의 첫 번째 지시는 홍보용 영상 만들기 위한 “채증을 준비하라”, 승객 퇴선 유도 지시 타이밍을 놓친 시점 해경 본청과 국가안보실 등은 여러 번 영상과 사진 요구
등록 2015-04-23 21:28 수정 2020-05-02 19:28

김경일(57·경위) 123정장은 세월호 참사 당일 현장지휘관이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2014년 4월16일 오전 9시16분 100t급 소형경비정인 123정을 현장지휘함으로 정했다. 하지만 김 정장이 오전 9시 현장 이동 직후 구조 작업을 하는 동안 내린 지시는 3차례에 불과하다. 해양경찰 36년 경력인 그는 왜 그랬을까?

세월호 참사 당일 서해지방해양경찰청 동영상 화면 갈무리.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세월호 참사 당일 서해지방해양경찰청 동영상 화면 갈무리.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9:00~9:09 전방만 바라본 지휘관

승조원 12명은 부족한 잠을 자거나 쉬고 있었다. 그날도 승조원들은 사흘째 전남 진도 연안에서 불법어선을 정기 순찰하는 중이었다. 123정은 길이 32m, 높이 15m, 폭 6m 크기로 최대 50명가량을 태울 수 있다. 김 정장과 해양경찰 9명, 의경 3명 등 총 13명이 순찰 중이었다.

아침 9시 목포해양경찰서 상황실로부터 세월호 침몰 사고를 접수한 김 정장은 선내 방송으로 부하들을 깨웠다. “여객선이 침몰 중이다. 승객은 300~40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준비하라.”

김아무개(52·경위) 부정장과 최아무개(53·경위) 기관장이 조타실로 올라왔다. 김 부정장은 사고 내용을 확인한 뒤 9시5분부터 어선공통망(SSB)을 통해 인근 어선과 교신을 시도했다. 최 기관장은 곧장 엔진 상태를 모니터로 확인하며 전속력으로 기관 조종을 했다. 박아무개(43·경사) 항해팀장은 9시2분부터 세월호와 초단파무선통신(VHF) 채널 16번으로 교신을 3차례 시도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는 교신 시도를 중단한 채 세월호 위치를 파악하고 항로를 설정했다. 그러고 나서 조타실 함정 휴대전화를 통해 목포해경 상황실에 이동 보고를 했다. 이아무개(48·경사) 정비팀장과 의경 중 막내인 박아무개 이경은 각각 기관실 당직 업무와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나머지 승조원들은 고무단정, 구명볼, 구명환 등 인명 구조 장비를 준비했다.

김 정장의 지시는 따로 없었다. 각자 알아서 움직였다. 당시 조타실에서 김 정장과 같이 있던 이들은 현장 도착 때까지 김 정장이 별다른 지시 없이 전방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정장은 당시 바삐 움직이지 않았고 조타실 내에 있었습니다. 고무단정 하강을 지시한 것 이외에는 특별히 저희들에게 지시한 사항은 없습니다.”(2014년 7월23일 최아무개 기관장 검찰 진술조서)

“김 정장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넋이 빠진 상태에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별다른 지시 없이 서 있었고 중간중간에 주파수공용무선통신(TRS) 교신만 두세 차례 했습니다.”(2014년 7월22일, 29일 박아무개 항해팀장 검찰 진술조서)

당시 상황에 대해 김 정장은 검찰에서 “(전속력으로 항해 중이어서) 스크루에 이물질이 걸릴까봐 조타실에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9:10~9:35 지시1 “채증을 준비하라”

김 정장의 첫 지시는 채증 작업이었다. 위생사 겸 영상 담당인 이아무개(30·순경) 행정팀장은 선내 방송을 듣고 산소호흡기와 전기충격기를 점검한 뒤 조타실로 올라갔다. 김 정장은 그에게 채증 작업 준비를 지시했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이 행정팀장은 9시10분 이아무개(37·경사) 병기팀장에게 휴대전화를 빌렸다. 이 행정팀장은 당시 채증 작업이 홍보용 영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검찰에서 설명했다.

“원래 대형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는 홍보용 동영상 및 사진을 촬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관 홍보를 위해 촬영을 한 것입니다. 홍보용 영상은 전송을 해야 되기 때문에 캠코더로 촬영하지 않은 것입니다.”(2014년 7월29일 이아무개 행정팀장 검찰 진술조서)

그가 빌려 쓴 이 병기팀장의 휴대전화는 9시5분부터 10시23분까지 인터넷에 12차례 접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채증 영상 전송 목적의 접속 내역인 것으로 보인다.

김 정장은 정작 가장 중요한 지시를 빠뜨렸다. 세월호와 교신해 침몰 상황을 파악하도록 해야 했다. 박아무개 항해팀장은 스스로 알아서 세월호를 호출한 뒤 응답이 없자 교신을 중단했다. 김 정장의 세월호 교신 시도 지시는 없었다. 서해해경 상황담당관이 TRS를 통해 그에게 9시18분과 28분 세월호 교신 여부를 묻자 “교신이 안 되고 있다”고 말하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세월호 1등 견습항해사인 신아무개씨가 9시26~28분에 123정을 호출했을 때도 답하지 않았다.

김 정장의 이런 ‘직무유기’를 바로잡아준 상급기관 지휘자도 없었다. 세월호와 교신을 유지하라고 지시한 지휘자는 없었다. 이미 파악한 세월호 침몰 상황을 알리고 구조 대책을 미리 준비하도록 지시하지도 않았다. 123정보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목포항공대 헬기 511호기가 9시27분 TRS를 통해 세월호 현장 상황을 알린 터였다. “현재 40도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고 승객은 대부분 선상과 배 안에 있음.” 하지만 해경 본청 이하 기관들은 이런 사정을 보고받고도, 123정에 도착 즉시 승객 탈출을 유도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그 무렵 9시20분 컨트롤타워인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은 해경 본청에 직통전화를 걸어 현장 영상을 찾고 있었다.

9:36~9:44 지시2 “고무단정을 내려라”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은 9시39분 또다시 영상과 구조 인원 보고를 요구했다. “여기 지금 VIP 보고 때문에 그런데 영상으로 받으신 거 핸드폰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까?”

김 정장은 현장 도착 직후 두 번째 지시를 내렸다. “고무단정을 내려라.” 박아무개(38·경장) 전기팀장과 이 병기팀장이 고무단정을 내렸다. 김아무개(36·경장) 보수팀장과 박아무개(37) 안전팀장 두 명이 고무단정에 탑승했다. 김 팀장이 조종하는 단정이 세월호 좌현을 향했다. 9시37분 기관실 당직 중이던 이 정비팀장도 인명 구조 작업을 위해 123정 갑판으로 올라왔다. 같은 시각 이 병기팀장은 조타실로 올라가 김 정장에게 먼저 제안했다. “정장님, 제가 (세월호) 구명벌 한번 터뜨려보겠습니다.” 김 정장은 “어, 그렇게 해”라고만 했다. 김 부정장과 최 기관장은 조타실에서 각각 조타기와 기관 조종을 맡았고, 통신 담당인 박 항해팀장은 조타실에서 구조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 정장은 9시38분 “현장 상황 빨리 보고하라”는 해경 본청 상황실에 “현재 TRS 무전통화가 잘 안 된다”고 답한 뒤 전방 구조 작업을 지켜봤다. 나머지 승조원들은 갑판에서 구조자들을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무단정이 9시39분 첫 구조자를 123정에 인계했다. 세월호 좌현 3층 갑판에서 구조된 기관부 선원 6명이었다. 123정 승조원 6명이 이들을 넘겨받았다. 이들을 넘겨준 고무단정이 9시40분 두 번째로 세월호를 향했다. 이번엔 김 보수팀장과 박 안전팀장과 함께 세월호 구명벌을 터뜨리겠다고 제안한 이 병기팀장이 탑승했다.

고무단정은 3분 만에 세월호 좌현 4층과 3층 선미, 그리고 바다에 있는 승객 6명을 구조했다. 이 병기팀장은 세월호 좌현 3층에 올라 구명벌이 있는 5층까지 갔다. 그가 오른 3층 바로 옆엔 세월호 안내데스크가 있었다. 비상버튼만 누르면 퇴선 방송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구명벌을 터뜨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퇴선 방송을 지시받은 적도 없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당시에는 그런 지시가 없어서 생각을 못했지만 지시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014년 8월3일 검찰 진술조서).

이때쯤엔 김 정장도 조금 다급해진 것 같다. 그는 9시37분 해경 본청 경비과장에게 전화를 해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지금”이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9시44분에도 목포해경 상황실에 TRS를 통해 “현재 승객이 안에 있는데 배가 기울어갖고 현재 못 나오고 있답니다. 그래서 일단 직원을 한 명을 배에 승선시켜가지고 안전 유도하게끔 유도하겠습니다, 이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승객 퇴선 유도 방송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승객이 배 안에 있다고 보고받은 해경 본청 이하 기관들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은 9시39분 해경 본청에 전화를 걸어 또다시 영상과 구조 인원 보고를 요구했다. “여기 지금 VIP(대통령) 보고 때문에 그런데 영상으로 받으신 거 핸드폰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까? 지금 현재까지 몇 명 구조됐는지 아십니까?”

9:45~10:17 지시3. “123정을 세월호에 갖다대라”

김 정장은 9시45분 123정을 세월호 선수에 접안하도록 지시했다. 123정을 세월호에 접안하자마자 세월호 조타실에 있던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0명이 123정으로 탈출했다. 고무단정도 세월호 4층 좌현 갑판에서 12명을 구조해 123정에 넘겼다. 세월호 5층 좌현에 도착해 있던 이 병기팀장은 9시47분 구명벌을 바다에 투하했다. 123정에서 구조자들을 넘겨받아온 박 전기팀장은 로프를 잡고 직접 세월호 조타실 쪽으로 올라갔다. 조타실 문틀까지 간 그는 9시48분, 60도 이상 기운 바닥 경사를 보고 도로 내려왔다. 그는 조타실 입구까지 가서도 퇴선 방송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지시한 이도 없었다.

김 정장은 9시51분 목포해경 상황실에 TRS를 통해 다급히 보고했다.

김 정장: “목포타워, 여기 123. 현재 승객이 절반 이상이 지금 안에 갇혀서 못 나온답니다. 빨리 122구조대가 와서 빨리 구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통신계장: “본청과 청 지시 사항임. 123 직원들이 안전 장구 갖추고 여객선 올라가가지고 승객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안정시키기 바람.”

승객 절반이 침몰하는 배에 갇혀 있는데 123정장과 해경 본청은 여전히 퇴선 유도 지시를 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고무단정은 바다에 빠진 4명을 구조해 123정에 넘겼다.

김문홍 목포해양경찰서장은 9시57분에 처음 퇴선 유도 지시를 했다. “근처에 어선들도 많고 하니까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고함치거나 마이크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나.” 하지만 이미 승조원들은 탈출하는 승객을 구조하는 작업에 매여 있었다. 승조원 3명은 승객을 구조해 123정에 인계하고 5명은 구조된 승객을 인수해 응급조치를 했으며, 나머지 5명은 조타실을 지키거나 채증 작업을 하고 있었다.

123정 갑판에서 승객을 인계받던 이 정비팀장도 10시6분 직접 승객 구조에 나섰다. 최 기관장에게 망치와 도끼를 넘겨받아 세월호 선수 쪽 3층 유리창을 깼다. 박 전기팀장과 함께 그 안에 있는 6명을 구조했다. 현장에 도착한 뒤 계속 고무단정을 타고 승객을 구조한 박 안전팀장은 당시 승조원들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동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앞에 쏟아져나오는 인원도 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2014년 7월14일 검찰 진술조서)

승객 퇴선 유도 지시 타이밍을 놓친 시간, 해경 본청은 목포해경에 10시4분 현장 사진을 요구했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10시9분와 15분 2차례 해경 본청에 영상과 사진을 요구했다. 123정장은 이런 지휘부에 서운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세월호 사고 때 제가 현장지휘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100t 함정에서는 위와 같은 현장지휘관 임무를 못합니다. 100t은 연안 경비정 아닙니까. 구조정이 아닙니다. 위에서는 저를 현장지휘관으로 지정해놓고 너희가 총책임이라고 하면서 나 몰라라 하는데 그런 지휘부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23정의 13명 가지고 뭘 어떻게 합니까. 경찰관 10명, 의경 3명이었습니다.”(2014년 7월28일 김경일 정장 검찰 1회 피의자 신문조서)

김 정장의 궁색한 변명일까, 합당한 지적일까. 수백 명을 구조하는 임무에 투입된 현장지휘관이 구조 필수 사항을 아래에 지시하지도, 위에 묻지도 않은 이유는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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