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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기업의 ‘남는 장사’를 막아라

‘기업은 죄를 범하지 못한다’는 원칙 아래 가벼운 벌금형만 받은 청해진해운… 노동계가 시작한 기업살인법 제정 움직임, 검찰·법무부도 입법 작업 돌입
등록 2015-04-18 07:58 수정 2020-05-02 19:27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해마다 산재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기업을 ‘살인기업’으로 발표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살인기업’ 선정식. 올해는 ‘10년간 최악의 시민·노동자 살인기업’을 발표할 예정인데, 그 명단에는 청해진해운도 포함돼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해마다 산재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기업을 ‘살인기업’으로 발표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살인기업’ 선정식. 올해는 ‘10년간 최악의 시민·노동자 살인기업’을 발표할 예정인데, 그 명단에는 청해진해운도 포함돼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벌금 1천만원.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죗값이다. 304명을 바다에 수장시킨 기업이 치러야 할 대가치고는 너무 가볍다. 더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기 위해, 그래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청해진해운이 선박을 무리하게 수직 증축한 뒤 화물 과적, 평형수 조작 등 세월호 침몰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일련의 과정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1심 재판부(광주지법 형사11부)는 청해진해운에 대해 바다에 기름을 유출한 혐의(해양환경관리법 제130조 위반)를 유죄로 인정해 벌금 1천만원을 선고했다.

청해진해운의 죗값 ‘1천만원’

물론 청해진해운의 경영진과 선장, 선원들은 줄줄이 형사처벌을 받았다. 청해진해운 임원 6명에게는 모두 형법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김한식 대표이사는 횡령·배임 혐의 추가 적용)됐다. 검찰의 먼지떨이식 수사에 힘입어,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도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다. 사실상 청해진해운은 문을 닫고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청해진해운이라는 기업의 책임은 온데간데없다.

왜일까? 현행법상 기업의 잘못으로 안전사고가 발생했더라도, 회사 임직원 개인이 아닌 기업(법인)은 벌금형 처벌에만 그치게 돼 있는 탓이다. ‘양심과 정신을 갖지 못한 법인(기업)은 죄를 범하지 못한다’는 게 우리나라 형사법의 대원칙이다. 대형 화재나 건물 붕괴 사고, 선박·철도 사고 등이 일어나더라도 ‘시설물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 ‘선박법’ 등 개별법에 명시된 벌칙 조항(양벌규정)에 의해서만 기업은 처벌된다. 그것도 임직원 개인에 대한 기업의 감독 소홀 책임이 입증될 때만 처벌이 가능하다. 청해진해운에 적용된 해양환경관리법의 경우, 법 위반시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애초 법에서 정한 죗값이 ‘1천만원밖에’ 안 됐던 셈이다. “(청해진해운에 대한 판결은) 결국 기업에 ‘단지 개인의 책임일 뿐 기업이 책임질 일은 없다’는 나쁜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김성룡·권창국, 대검찰청 학술지 2015년 3월호 ‘기업 법인의 형사책임법제 도입 가능성과 필요성’)

돌이켜보면, 다른 대형 참사 때도 비슷했다. 현장을 책임졌던 일부 임원만 처벌될 뿐, 기업의 소유주나 기업 자체가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14년 경북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10명 사망)로 형사처벌을 받은 최고책임자는 리조트 사업본부장, 2013년 전남 여수 산업단지 폭발사고(6명 사망)로 기소된 최고책임자는 대림산업의 공장장이었다. 기업의 최고경영진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처벌된 거의 유일한 사례는 502명의 생명을 앗아간 1995년 삼풍백화점 사고 때의 이준 삼풍건설 회장이다. 산업재해 사고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2천 명가량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지지만, 주로 현장 중간관리자가 처벌받고 그마저도 대부분 벌금형 선고에 그친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이제는 탐욕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기업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까닭이다.

살인기업 처벌, 난데없지 않다

일찍부터 이를 주장해왔던 한 축은 노동계다. 노동건강연대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은 2006년부터 해마다 ‘최악의 살인기업’을 선정해 발표해왔다.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가 많은 기업 명단을 공개하면서, 기업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해온 것이다. 이들은 산재 사망사고나 대형 참사를 일으킨 기업 또는 사업주를 처벌하는 ‘기업살인법’ 제정도 함께 주장해왔다. 실제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이미 비슷한 법이 시행되고 있다. 노동건강연대 관계자는 “산재 사망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기업을 제재하고 최고경영진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4월13일, 이들 단체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와 함께 ‘지난 10년간 최악의 살인기업’을 선정해 발표한다. 이에 앞서 4월6~12일 온라인 투표(worstcompany.net)가 진행됐는데, 청해진해운(세월호 참사)과 코오롱(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고), 옥시레킷벤키저(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 등이 ‘최악의 시민 살인기업’ 후보로 올랐다. ‘최악의 노동자 살인기업’ 후보는 삼성전자(백혈병 등 직업병), 우정사업본부(잦은 과로사), 현대건설(110명에 이르는 산재 사망 다발 사업장) 등이다. 2005~2014년 10년간 산재 사망자 수를 모두 합쳐 선정한 ‘가장 위험한 기업’ 50개 명단도 공개한다. 1위는 현대건설(110명 사망), 2~5위는 대우건설, GS건설, 우정사업본부, 현대중공업이 차례로 차지했다(표 참조).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는 기업살인법(가칭) 입법안을 준비 중이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산업재해 및 다중이용시설에서 발생하는 재해에 대해 기업 및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특례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은 물론이고 철도와 버스, 선박, 항공기, 위험물 제조·취급 업소, 다중이용시설 등에서 노동자나 일반 시민들이 생명과 신체상의 피해를 입을 경우 기업과 최고경영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벌금형 처벌 이외에도 기업에 대한 영업정지나 자금공모 금지, 공공계약 배제 등의 제재 방안도 법안에 포함시킬 예정이다. 이 교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기업과 최고경영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사회적으로 환기하자는 취지로, 입법 작업은 결국 여론과 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검찰도 기업의 형사책임을 묻는 ‘기업책임법’(가칭) 입법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대검과 법무부는 지난해 12월 한국형사소송법학회가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외국의 기업책임법제 및 도입 가능성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입법 작업에 들어갔다. 김성룡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권창국 전주대 경찰행정학과 부교수가 작성한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지난 3월 발간된 대검 학술지 에도 실렸다.

“기업은 모든 영역의 잠재적 위험원”

“이제 기업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신체 안전과 생명, 미래에 대한 모든 영역에서 잠재적 위험원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관점에서 형법의 과제도 변해야 한다. 한국의 현행법 체계로는, 기업의 이익을 위한 범죄행위에 대해 충분한 억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기업의 위법행위가 결국 ‘남는 장사’가 되는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업을 직접적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하는 법률이 도입되고 있다. 우리도 관련한 입법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보고서에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형법과 특별법이 소개돼 있다. 외국에서는 벌금형뿐만 아니라 법인 해산, 수표·증권 발행 금지, 자격 정지 등 기업을 강력하게 제재하는 다른 수단도 함께 법에 명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노동계가 10년 넘게 주장해왔던 ‘기업살인법’의 메아리가 뒤늦게 울려퍼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더디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도 한 발짝 떼었다. 304명의 죽음이 남긴 묵직한 울림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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