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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용기를 가져도 되겠다”

작가기록단으로서 세월호 선원 재판 기록을 책 <세월호를 기록하다>로 엮어낸 오준호 작가
등록 2015-04-16 10:55 수정 2020-05-02 19:27

“엄마, 배가 출발해.”
이 문장을 읽는데, 눈이 뜨거워졌다. 이게 뭐라고, 가장 슬픈 문장이 되었다.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은 출항을 기다렸다. 배가 움직이자 저마다 소식을 알렸다. 누구에게는 세상에 마지막 전한 말이었다.
배가 가라앉고 수백 명이 죽었다. 죽은 학생들의 부모들은 가슴을 쳤다. 자신의 탓이라 했다. 왜 경기도 안산에 왔을까. 왜 하필 단원고에 보냈을까. 왜 시키는 대로 하도록 가르쳤을까. 우연을 한탄하는 부모들에게 그네들 잘못이 아니라 했다. 부모들은 물었다. 그럼 누구 책임인가요?

닿지 않는 진실에 닿기 위하여

진실은 선체 인양만큼이나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진실에 닿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오준호 작가는 자신의 책 속지에 ‘진실이 거짓을 이깁니다’라는 문구를 서명과 함께 썼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 안산 시민단체들은 시민기록단을 구성했다. 사건을 기록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의 눈을 모으자 한 것이다. 시민기록단 아래 작가기록단도 만들어졌다. 작가기록단과 함께한 오준호씨는 세월호 재판 과정을 눈여겨봤다.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이 열린 것은 2014년 6월10일. 5개월간 총 33차의 공판이 진행됐고, 그해 11월11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6월20일에는 청해진해운 및 관계자, 그리고 해경을 피고로 하는 재판이 시작돼 11월20일 1심 판결이 내렸다. 재판의 기록은 라는 책으로 정리됐다.

작가기록단으로 참여해 세월호 선원 재판을 참관한 오준호 작가. 그는 그 기록을 책 로 엮어냈다. 정용일 기자

작가기록단으로 참여해 세월호 선원 재판을 참관한 오준호 작가. 그는 그 기록을 책 로 엮어냈다. 정용일 기자

희정(이하 희) 뻔한 질문이지만, 세월호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준호(이하 오) 안산에 살았고, 자연스럽게 시민기록단 작업에 동참하게 됐어요. 굳이 이유를 대자면, 나부터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고 싶었어요. 배가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이해 못할 충격을 받은 거잖아요.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나라가 수백 명이 수장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다니. 사건이 너무 비상식적이니까 의혹은 무수히 터져나오고. 그래서 한계가 있더라도 검증 가능한 증거와 증언들이 모이는 법정이라는 공간을 출발점으로 삼아야겠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 사건이 이해가 됐나요. 법정 기록이 우리를 이해시킬 수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100%는 아니지만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게 됐어요. 일정한 깊이를 가진 ‘팩트’들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 세월호는 수많은 요소가 결합된 사고예요. 진실이라는 것은 복잡한 사회 맥락이 얽혀 있는 것인데 우리들은 명쾌한 서사가 드러나길 바라고 그게 아니면 시시한 거라 생각하잖아요. 그렇지만 그 시시한 부조리들을 만드는 제도와 시스템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피해를 보는 이들은 언제나 나오게 돼 있어요. 세월호에서는 그것이 수많은 학생들이었고요.

하지만 사회적 맥락을 읽기에는 법정이라는 공간이 한계가 있을 텐데요.

재판에서는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오가도, 검찰이 기소하는 테두리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어요. 한 예로 ‘오렌지맨’이 세간에 오르내렸잖아요. 법정에서는 오렌지맨이 선원인지 제3의 인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첨단 프로그램까지 동원해 일치 여부를 가렸어요. 사실은 밝혀졌죠. 하지만 그 공방 가운데 선원들을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게 만든 구조에 대한 물음과 답은 없는 거죠.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특별법이 만들어졌을 때,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좀더 구체적이고 추가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거라 여겼어요. 해경이 왜 구조를 안 했느냐를 넘어, 왜 출동 가능한 함정의 수는 적었으며, 그들의 명령 체계는 왜 구성원을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가 같은.

기록자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법정이라는 공간이 갖는 한계 말고도,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을 거 같아요.

저로서는 균형을 잡는 과정이 매 순간 스케이트를 타는 거 같았어요. 매초 균형을 잡으려다가 그게 맞나 되묻고. 한번은 검사가 선장에게 사형, 항해사에게 30년형을 선고하니까 유가족들이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화를 내는데, 보니까 스물 몇 살 여자 항해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면서 최후 변론조차 못해요. 설명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이 있었죠.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게 과연 맞나. 그럴 때마다 자문하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들과 다르게 행동했을까. 나조차 다를 게 없다고 해서 저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행동을 한 이는 분명 있거든요.

하지만 공고화된 구조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이 크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두고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한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선원이나 언딘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는 반성이겠죠. 세월호 관련자들은 자기 행동이 결과적으로 위험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알죠. 그렇지만 판단을 보류하거나 무시하거나 변명거리를 찾은 거죠. 자신이 속한 기업과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기 위해. 그렇게 하도록 압박받아온 거고. 우린 그간 이걸 능숙한 처세, 유능함이라 불렀어요.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본 거죠, 그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 이게 변화의 시작이지 않을까요?

변화라…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제가 느낀 것은 철저한 무력감이었어요. 유가족과 만나면서 이 느낌은 더 강렬해졌는데, 한 어머니가 말했어요. 팽목항에 가서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라. 부모만이 아니라 사건을 지켜본 시민들도 그런 무력함을 느꼈다고 생각해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거죠. 이 정도는 아닐 거다. 그 믿음이 깨졌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죠. 책임자 처벌이나 진상 규명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더 나아가 또다시 무력함을 반복하지 않게 우리를 각성시키는 문제죠. 무력감을 느끼는 상황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이 무력함을 절대 반복하지 않도록

대화라 하지만, 목적이 있고 시간을 정해둔 인터뷰라 마지막 질문은 뻔했다. 스스로에게 세월호 기록 작업은 어떤 의미였나. 그는 반문했다. “이 기록을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세월호는 무엇으로 남았을까요?”

그의 기록이 집약된 책은 말한다. “앞으로의 진실 규명은 이 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은 투쟁이 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팔이 꺾인 채 경찰에게 끌려갔다. 선체를 인양하고 제대로 된 특별법을 만들고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과정은 눈물겹지만, 불과 1년 전 우리에게 무력한 슬픔을 안겨주었던 세월호는 이제 진실에 한발 가닿기 위한 분투의 장이 되었다. 싸우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오준호씨가 해준 이야기를 덧붙인다.

“우리는 방송에 따라 가만있는 순종적인 모습의 학생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기록을 하다 본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용감하고 현명하게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이가 없었고 질서정연했으며 자신보다 어린 아이부터 구명정에 태웠다. 우리 용기를 가져도 되겠다. 오늘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진실에 닿기를 애쓰고 있다. 그렇게 세월호를 기억한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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