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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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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북소리 “역사를 탈환하라”

교과서 둘러싼 뉴라이트의 역사 전쟁, 10여 년의 전리품으로 등장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고등학교 한국사>
등록 2013-09-18 06:04 수정 2020-05-02 19:27

“대한민국 진영은 ‘방송 탈환’ 투쟁에 이어 ‘교과서 탈환’ 투쟁으로 돌입해야 한다. ‘촛불’에 겁먹은 이명박 정부가 ‘역사 탈환’을 결행할 수밖에 없게끔.”(2008년 8월19일치 류근일 칼럼 ‘교육부 편수팀을 교체하라’)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뜻 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 -2008년 5월8일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진격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그리고 노골적이었다. 류근일(75) 전 주필은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이렇게 역사 탈환을 부추겼다. “지금의 교육부 교과서 편수 담당팀을 대폭 갈아치워야 한다. 지금의 팀은 노무현 시대의 팀 그대로다. 이들을 놔두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편수 담당팀을 교체해 새 교과서를 검인정하기까지 “적어도 2년이 필요하다”며 “‘제8차 교육과정’ 결정을 뒤로 미뤄야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언급했다. 5년 뒤, 그의 ‘탈환 매뉴얼’은 현실이 됐다. 게다가 그가 고문으로 있는 ‘한국현대사학회’의 (교학사) 교과서가 진격의 포문을 열었다는 점은, 이들의 ‘교과서 탈환 작전’이 결코 빈껍데기가 아니란 것을 뜻한다.

의 ‘경고’ ‘귀하의 자녀들은 위험한…’

지난 8월30일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통과한 교학사의 에는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의 ‘오래된 꿈’이 녹아 있다. 자학사관(일제강점·남북분단·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역사 과정 속에서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와 권력관계를 비판하는 관점으로 서술하는 역사 해석)을 배척하고, 북한의 존재를 부정한 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강조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반영한 첫 공식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검정 심의 과정에서 꼭꼭 숨겨뒀던 교과서 내용이 9월 초부터 국회·학계를 통해 알려지자 곧장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다(자세한 내용은 32~34쪽 기사 참조). 서남수 교육부 장관도 지난 9월11일 뒤늦게 교학사의 가 “내가 보기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와 검정 심의를 통과한 다른 한국사 교과서 7종을 함께 수정·보완하겠다고 밝혔지만, 역사 왜곡 논란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을 것 같다. 역사 전쟁의 뇌관이 이미 터졌기 때문이다.

지난 8월30일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통과한 8개 출판사의 교과서 가운데 7종의 표지 모습. 사진 맨 앞에 있는 교과서가 한국현대사학회 학자들이 집필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이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지난 8월30일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통과한 8개 출판사의 교과서 가운데 7종의 표지 모습. 사진 맨 앞에 있는 교과서가 한국현대사학회 학자들이 집필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이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뉴라이트 세력의 ‘교과서 탈환 작전’은 참여정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 전쟁의 흐름은 뉴라이트 세력이 대중화와도 관계가 깊다. 그 시작은 참여정부가 본격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나서면서부터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식민통치를 앞장서 대변했던 친일 행위가 여전히 역사의 뒤안에 묻혀 있다”고 말했다. 그해 국회에서는 친일진상규명법 등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특별법 4건이 통과됐다.

과거사 청산의 칼날을 피할 수 없던 보수 진영도 칼을 빼들었다. 그 포문은 2004년 11월 뉴라이트 단체 가운데 가장 먼저 출범한 ‘자유주의연대’의 창립 선언문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자학사관을 퍼트리며 지배세력 교체와 기존 질서 해체를 위한 ‘과거와의 전쟁’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있다.” 곧바로 보수 진영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시작했다. 우선 보수언론과 정치권은 2002년 검정 심의를 통과한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현대사를 편향된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은 2004년 4월호에 ‘경고! 귀하의 자녀들은 위험한 교과서에 노출돼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다른 보수언론으로 이어진 ‘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 논란’은 그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계속됐다. 역사 영역에서 참여정부·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의 충돌은 뉴라이트 세력의 결집을 불러왔다.

교과서포럼, 금성출판사판에 수정작업 요구

역사 바로 세우기는 “기존의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는 임무로 이어졌다. 그 역할은 2005년 1월 출범한 ‘교과서포럼’이 이어받았다. 이들의 목적은 뚜렷했다. “뉴라이트 세력의 시각을 담은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뉴라이트 진영의 대표 학자였던 박효종 서울대 교수(국민윤리교육)가 준비위원장을 맡고, 일제시대에 근대화의 초석이 닦였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해온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학) 등이 참여했다. “대한민국은 잘못 태어난 국가인가, 대한민국은 정상국가가 아닌 장애국가인가, 광복 60주년을 맞는 현시점에서도 우리가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교과서포럼의 창립 선언문)

교과서포럼의 본격적인 활약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됐다. 뉴라이트 세력을 뼈대로 탄생한 이 대통령은 ‘지원 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민주화·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써놓았다. 오히려 북한의 사회주의가 정통성 있는 것 같이 돼 있는 교과서를 바로잡아놓고 (근·현대사 역사를) 바로 평가하겠다.”(2008년 10월8일 재향군인회 회장단 청와대 오찬간담회) 뉴라이트 진영에서는 교과서 논란의 기폭제가 된 금성출판사의 에 대한 본격적인 수정 작업도 요구했다. 아예 국방부·통일부·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에 구체적으로 교과서 내용 수정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공문으로 보냈다. 대부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을 집중 부각하거나, 제주 4·3 사건을 ‘좌익 반란’으로 재규정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교과서포럼은 정식 교과서를 만들지 못했다. 포럼 안에는 정식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의 근·현대사 전문가가 없었다. 대신 2008년 5월 기존 교과서의 현대사·경제사 등의 내용을 수정한 (기파랑)를 내놓았다. 2008년 5월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에는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했다. 그는 행사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며 “뜻 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했다.


류근일 전 주필은 편수 담당팀을 교체해 새 교과서를 검인정하기까지 “적어도 2년이 필요하다”며 “‘제8차 교육과정’ 결정을 뒤로 미뤄야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언급했다. 5년 뒤, 그의 ‘탈환 매뉴얼’은 현실이 됐다.

교과서포럼이 못 이룬 교과서 출간의 꿈은 ‘한국현대사학회’가 이어받았다. 2011년 5월 창립한 한국현대사학회는 준비 단계부터 외연 확장에 집중했다. 설립 취지도 “한국 현대사 연구의 학문적 폐쇄성과 이념적 편향성을 극복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출범 뒤 교육과학기술부와 국사편찬위원회를 압박해 ‘2009 교육과정’ 개정안의 역사 교과 교육과정 집필 기준에 등장하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도록 요구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학계에서는 한국현대사학회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봉건국가에서 민주정으로 바뀌는 민주주의 과정을 뜻하는 게 아닌,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와 대립하는 반공의 의미가 강한 ‘자유민주주의’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정안을 연구한 ‘역사교육과정 개발정책 연구위원회’ 위원들이 변경에 반대하는 성명까지 발표하면서 결국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 고집 한국현대사학회

현재 한국현대사학회는 뉴라이트 진영과 연관성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성명을 내 “개인적으로 뉴라이트에 참여했던 사람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본 학회는 뉴라이트 계열도 아니고, 그 세력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창립 당시 와 에 공개된 고문·창립준비위원·발기인 명단(72명) 가운데 박효종 서울대 교수, 이영훈 서울대 교수, 강규형 명지대 교수 등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포럼에 고문·운영위원·필진으로 참여한 인사가 16명이나 있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지난 9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와 다른 교과서의 내용을 비교하는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지난 9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교학사의 <고등학교 한국사>와 다른 교과서의 내용을 비교하는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실제로 교학사의 집필에 참여한 필진을 봐도 그렇다. 한국현대사학회에서 참여한 대표 필진은 이명희(53·역사교육)) 공주대 교수와 권희영(57·한국근대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 6명이다. 이들은 각각 한국현대사학회의 전·현직 회장이다. 나머지 4명은 현직 초등학교·고등학교 교사다. 이 가운데 이 교수는 뉴라이트 교육운동 시민단체인 ‘자유교육연합’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으며, 교과서포럼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교육부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개발 공동연구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민주화·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써놓았고 오히려 북한의 사회주의가 정통성 있는 것 같이 돼 있는 교과서를 바로잡아놓고 바로 평가하겠다.”- 이명박 전 대통령, 2008년 10월8일 재향군인회 회장단 청와대 오찬간담회

교과서포럼→한국현대사학회로 이어지는 뉴라이트 세력의 ‘교과서 탈환’ 시도는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움직임이 식민지근대화론을 통해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고, 건국과 산업화를 과대평가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역사 바로 세우기’의 끝이 보수 진영 전체의 역사적 정당성 확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이러한 교과서의 등장은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수구세력과 뉴라이트 세력이 결합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국민에게 탄압을 가했던 수구세력은 자유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옹호할 명분이 없는데, 과거 역사의 채무가 없는 뉴라이트 세력이 이들을 대신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안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그 증거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역사교육)는 “선진국에서도 사용하는 검정 교과서에는 사관이 드러나기 마련이며, 좌우를 떠나 역사 교과서가 자기 관점을 반영하면서 객관적인 선을 유지하면 학생들에게 다양한 사고력과 토론을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교학사의 는 기본적인 사실도 없고 학계에서 보편적이지 않은 내용을 쓰고 있어서, ‘교과서로서의 기본’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10년 내 한국 사회가 전복될 수도”

현재 집필진들은 교과서를 향해 쏟아지는 지적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없는 비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최근 교과서 논란을 두고 쏟아내는 말은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한다. 권희영 교수는 9월11일 에 쓴 글에서 “기존의 좌편향 교과서를 지지하는 세력은 ‘민주화’와 ‘북한과의 평화’를 내세우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제외한 시기의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를 어둡게 색칠하려는 집단이다”라고 밝혔다. 이명희 교수가 같은 날,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연 ‘새누리당 근·현대 역사교실’에서 밝힌 내용은 더 놀랍다. “학문·교육, 언론, 문화 등 이념 관련 분야에서는 좌파가 이미 절대적 다수를 형성했다. 현 국면이 유지되면 10년 내 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전복될 수도 있다.” ‘과거의 망령’을 등에 업은 이들의 진격에 속도가 붙고 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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