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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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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 초대형 사기극

양극화 떠밀려 경제민주화 약속해놓고 비례대표 공천에선 경제독점 강화할 인물 낙점…새누리당은 MB 노믹스 학자, ‘줄·푸·세’ 입안자 공천하고 민주당은 재벌개혁 핵심 유종일 공천 안 해
등록 2012-03-28 06:22 수정 2020-05-02 19:26

“시장경제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여 경제민주화를 구현한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경제세력의 불공정거래를 엄단하여 공정한 경쟁 풍토를 조성한다.”

“우리는 당면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공정한 시장경제의 확립이 필요하며,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공유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며, 부동산 투기 등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근절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실현한다.”

앞의 것은 새누리당이 지난 2월 새로 만든 ‘국민과의 약속(강령)’ 10대 약속 가운데 셋째 조항이다. 뒤의 것은 민주통합당 강령 24개 항 가운데 첫째 조항이다. 시장만능에 기초한 신

나성린 의원

나성린 의원

자유주의에 피폐해지고, ‘1 대 99’ 사회에 분노한 민심은 재벌 개혁을 요구했다. 총선이 코앞이다.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는 두 당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컸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강령을 전부 뜯어고쳤다. 경제민주화를 강령에 삽입했고, “경제민주화 가치를 정책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분들을 영입하려 노력하고 있다”(3월7일 관훈토론)고 밝혔다. 강철규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의 일성도 “재벌 개혁에 대한 생각을 갖고 정책을 만들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고 싶다”였다. “경제민주화를 구현할 인물을 뽑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공천이 마무리된 뒤 두 당에 똑같은 질문이 쏟아진다. “누가 실현할 건데요?”

강령은 고치고 사람은 안 바꾸고

새누리당은 완전 역주행했다.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경제독점화를 강화할 공천”(쇄신파 의원), “재벌만 좋아하게 생겼다”(수도권 재선 의원)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특히 친재벌 인사들이 당선이 확실한 비례대표 후보 순번에 낙점됐다. 10번을 받은 이만우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삼성전자 사외이사 출신으로,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 캠프에서 재정 분야 자문을 맡았다. 공기업 민영화를 강조하며, 대표적인 복지 경계론자로 꼽힌다. 새누리당 비대위가 “정강·정책에 맞지 않는다”며 공천위에 재의를 요구했으나 공천위는 표결로 공천을 확정했다.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경제학·12번)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 질서는 세운다) 공약을 만든 주역이다. 김현숙 숭실대 교수(경제학·13번)도 법인세 감세와 공기업 민영화를 강조해왔다.

지역구 공천도 마찬가지다. 당내 대표적인 감세론자인 나성린 비례대표 의원이 새누리당의 텃밭인 부산 진구갑에 배치됐고,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한 성장을 뼈대로 하는‘MB노믹스’를 주도한 윤진식 의원도 충북 충주에 다시 공천을 받았다.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적 경제통인 최경환 의원(경북 경산·청도), 이한구 의원(대구 수성갑), 유일호 의원(서울 송파을) 등도 텃밭에서 선거를 치르게 됐다.



새누리당은 완전 역주행했다.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경제독점화를 강화할 공천”(쇄신파 의원), “재벌만 좋아하게 생겼다”(수도권 재선 의원)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X맨 공천, 유종일 낙마

지역구에 발탁된 인사 가운데에서도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인물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추진한 류성걸 전 기획재정부 제2차관(대구 동구갑), ‘줄·푸·세’ 공약을 만든 이종훈 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경기 성남분당갑), 저서 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을 주장한 최홍재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서울 은평갑) 등이다. 새누리당은 서울 서초을에 공천한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를 경제민주화에 부응하는 인물이라고 내세우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중도보수 성향으로 평가한다. 헌법 119조 경제민주화 조항을 입안한 김종인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말로만 경제민주화를 얘기하지, 이를 실천할 사람들은 없는 거꾸로 된 공천”이라고 혹평했다.

민주당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사달이 났다. 민주당 ‘헌법 119조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경제민주화 공약의 틀을 잡아온 유종일 한국개발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공천에서 탈락했다. 유 교수는 애초 전북 전주덕진에

»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을 찾겠다던 약속은 말뿐이었다. 민주통합당은 유종일 ‘헌법 119조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위)을 공천에서 탈락시켰고, 재벌개혁론자인 홍종학 가천대 교수(아래)를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하는 데 그쳤다.

»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을 찾겠다던 약속은 말뿐이었다. 민주통합당은 유종일 ‘헌법 119조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위)을 공천에서 탈락시켰고, 재벌개혁론자인 홍종학 가천대 교수(아래)를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하는 데 그쳤다.

공천을 신청했다가 당 지도부의 전략공천 방침에 따라 서울로 차출됐는데, 어디에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반면 김진표 원내대표(경기 수원을) 등 ‘재벌 개혁 X맨’ ‘경제민주화 X맨’으로 꼽혀온 의원들은 대부분 공천을 받았다. 선대인 세금혁명당 대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자 우석훈씨 등이 지난 2월12일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의 대표적인 X맨’으로 지목한 김진표 원내대표는 정체성에 대한 공심위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원회가 공천을 관철했다. “경기도 선거 전체를 망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제민주화를 구현할 수 없는 인물로 지목된 박기춘 의원(경기 남양주을), 노영민 의원(충북 청주흥덕을), 조정식 의원(경기 시흥을)도 일찌감치 1차 공천에서 단수공천을 받았다. 당 안팎에서 X맨으로 꼽혀온(899호 표지이야기 ‘재벌의 X맨, 6인방+α 찾았다!’ 참조) 김성곤(전남 여수갑)·김동철(광주 광산갑) 의원도 경선을 거쳐 공천을 받았다. 공천에서 탈락한 이는 강봉균 의원 정도다. 선대인 대표는 3월20일 트위터에 “김진표·박기춘 등은 버젓이 공천하고 당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은 낙천하는 민주당. 민주당이 말과는 달리 재벌 개혁과 민생경제 살리기에 관심 없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챙겨주는 인사 없으면 탈락하는 구조

민주당이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공천은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을 지낸 홍종학 가천대 교수(경제학)를 비례대표 후보 4번에 배치한 것 정도다. 유종일 교수와 홍종학 교수의 ‘엇갈린 운명’에는 계파 나눠먹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홍 교수는 민주당과 통합한 시민통합당(혁신과통합) 정책위원장 출신으로 시민사회 몫으로 배려를 받은 반면, 유 교수는 서울로 차출해놓고 지역구를 챙겨주는 이가 없었던 탓이다. 유 교수 본인이 트위터에서 “초대형 사기극”이라고 강력 반발한 것은 물론, 박영선 최고위원도 3월20일 유 교수의 공천 탈락 등을 비판하며 최고위원직에서 사퇴했다. 박영선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유종일 교수에게) 반드시 지역구 공천을 줘야 한다고 수십 차례 이야기하고 건의를 했는데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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