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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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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소비자

노동·환경 친화 제품을 고르거나, 반인권·반환경 상품을 사지 않거나…
인권경영 압박하는 윤리적 소비의 두 방법
등록 2010-09-02 14:00 수정 2020-05-02 19:26
#1. 간병·의료 서비스 사회적 기업인 다솜이재단(dasomi.org)의 박정희 사무국장은 요즘 마음이 바쁘다. 전국에 있는 협력 병원에 보낼 추석 선물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쇼핑 장소는 조금 특별하다. 사회적 기업이 생산한 물건을 홍보하는 한국사회적기업협의회(ikose.or.kr), 자연드림(naturaldream.co.kr), 이로운몰(erounmall.com) 등 ‘착한 소비’를 권장하는 온라인 사이트를 방문한다.
2008년에는 쿠키 세트를 구입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위캔(wecanshop.co.kr, 031-969-3533)에서 만든 쿠키였다. 지난해에는 한과 세트를 선택했다. 전북 진안 지역자활센터가 운영하는 나눔푸드(진안자활.com, 063-432-9005)의 상품이다. 선물을 보낸 뒤 “맛도 좋고 뜻도 좋다”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박 사무국장은 “사회적 기업과 착한 소비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추석에 꼭 선물을 한다”고 말했다.
올 추석에는 청년들이 나섰다. 사회적 기업의 미래를 연구하는 비영리단체인 씨즈(theseeds.asia)의 청년캠페인단이 “추석에는 착한 선물을 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30대 대학생과 직장인들로 구성된 캠페인단은 주로 공공기관이나 기업, 비영리단체 등의 선물 구매 담당자에게 ‘윤리적 소비 한가위 선물 제안서’를 보내고 있다. 박 사무국장은 이들이 보낸 선물 목록도 꼼꼼히 체크하는 중이다.

#2. 대학생 이창현씨는 리바이스 청바지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지난해 한 공모전에 입상해 부상으로 영국 탐방에 나선 길이었다.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던 중 리바이스 청바지를 대폭 할인하는 매장을 만났다. 한국에서는 고가인 청바지를 선물로 안겨줄 생각을 하니 뿌듯했다. 하지만 그는 청바지를 사지 않고 돌아섰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로 본 ‘레소토의 청색 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싸인 아프리카 내륙국가 레소토가 리바이스·갭 같은 청바지 공장이 배출하는 염색약품 등 유해 폐기물로 오염돼간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레소토의 강은 청바지 색깔로 변한 지 오래다. 하지만 가난한 주민들은 여전히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청바지가 자꾸 청색 강으로 보였다.
이씨는 청바지 대신 수익금으로 캄보디아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보내준다는 이가 만든 ‘걱정인형’을 구매했다. 과테말라 전설의 인형으로, 인형에게 자기 걱정을 이야기한 뒤 베개 밑에 넣고 자면 걱정이 사라진다는 설명과 함께 친구들에게 건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지갑을 연다면 세상이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경험을 글로 적어 아이쿱생협연구소와 한겨레경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한 ‘윤리적 소비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윤리적 소비’는 크게 위의 두 사례로 구분된다. ‘구매운동’과 ‘불매운동’이다. ‘구매운동’은 소비자가 녹색 상품, 공정무역 상품, 사회적 기업 상품 등 윤리적으로 생산된 제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방식이다. ‘불매운동’은 생산·유통 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등 비윤리적으로 생산된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운동이다. ‘인권경영’을 외면하는 기업엔 한없이 불리한 소비 행태다.
‘착한 소비’ 돕는 표지들

‘착한 소비’ 돕는 표지들

생협 가입자 폭발적 증가

‘구매운동’은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다. 구매 운동의 중심에 자리한 것이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소비자와 생산자가 연계된 윤리적 소비를 하는 것이 생협의 이념이다. 스위스의 경우 전체 유통시장의 70%를 생협이 차지한다. 이탈리아에는 볼로냐시에만 400개가 넘는 생협 조직이 있고 시민 절반이 조합원이다. 한국에는 2008년 말 기준으로 전국에 250개의 생협이 존재하고 회원 수는 47만 명이 달한다.

현재 한국에서 윤리적 소비를 이끄는 주요 기관은 공동육아협동조합(gongdong.or.kr), 두레생협연합회(dure.coop), 아이쿱생협과 여성민우회생협이 공동 출자해 운영하는 자연드림,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한 한살림(hansalim.or.kr), 착한 쇼핑몰을 지향하는 이로운몰, 공정무역 쇼핑몰인 페어트레이드코리아(fairtradegru.com) 등이다. 아이쿱생협의 경우 지난해 상반기에만 전년 대비 회원 수가 200% 이상 늘었다. 2008년에 문을 연 이로운몰의 매출은 올 상반기에 지난해 대비 34% 상승했다.

‘불매운동’은 ‘보이콧’이라 불린다. 1890년대 아일랜드의 한 대지주에 속한 재산관리인이었던 찰스 보이콧이 세입자를 부당하게 쫓아내자 지역 주민들이 그와 거래를 중단한 사건에서 유래했다. 당시 농장 노동자들까지 작업을 중단했고 결국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보이콧은 마을에서 추방됐다.

현대의 대표적인 보이콧 사례는 나이키다. 1996년 6월 미국 잡지 가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축구공을 꿰매고 있는 12살짜리 파키스탄 소년의 사진을 실었다. 하루 종일 축구공을 만들어 60센트를 벌었다. 순식간에 북미 지역과 유럽 각지로 나이키 불매운동이 퍼져나갔다. 1997년 10월18일 ‘국제 나이키 행동의 날’에는 13개국 85개 도시의 나이키 매장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업계 점유율 1위였던 나이키의 매출과 주가가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최고경영자가 나서서 대대적인 경영 수습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지난 2007년 이랜드 계열사인 대형마트 체인 홈에버가 대부분 계산원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자 인터넷을 중심으로 ‘홈에버 불매운동’이 확산됐다. 해고 사실이 알려진 7월에는 시민단체 57곳이 서울 홈에버 월드컵몰점에 모여 ‘나쁜 기업 이랜드 불매 시민행동’을 발족하고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이후 홈에버는 적자에 허덕이다가 2008년에 35개 점포를 삼성테스코홈플러스에 매각했다.

소비가 세상을 바꾼다

‘윤리적 소비자’는 소비 여력이 있는 고학력 중산층이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겨레경제연구소가 아이쿱생협 이용자 217명을 분석한 결과, 윤리적 소비자는 진보적 성향을 띤 고학력 중산층이 가장 많았다. 49.3%가 자신이 진보적이라 답했고 월평균 소득은 35.9%가 ‘300만원 이상 400만원 미만’이었다. 평균나이는 39살, 학력은 대학 재학 이상이 73.7%였다.

이들이 정의하는 ‘윤리적 소비’는 무엇일까? 전체 응답자의 24%가 ‘지역사회 및 제3세계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주고 만든 물품 구매’를 꼽았다. 거의 비슷한 비율인 23%가 친환경·동물 보호 등 ‘녹색 소비’를 꼽았다. 환경·사회·개인 등 세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소비가 윤리적 소비라는 대답도 19%에 달했다.

삼성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담당하다 지난 7월 퇴사한 황정은 숭실대 강사(사회복지학)는 “윤리적 소비는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소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제 기업이 물건을 만들어 팔기만 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앞으로 대기업은 사회공헌뿐만 아니라 노동자 인권, 환경 보호 등 다양한 책임 경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쿱생협연구소 정원각 사무국장은 “소비자가 노동착취, 동물실험 등 좀더 다양한 영역의 윤리적 소비에 눈뜨고 있는 만큼 얄팍한 마케팅 수단만을 내세우는 기업은 승산이 없다”고 말했다. 소비가 기업을, 세상을 바꾸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참고 문헌: (박지희·김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 (아이쿱생협연구소·한겨레경제연구소 엮음, 한겨레출판 펴냄), (알렉스 니콜스·샬롯 오팔 지음, 책보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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