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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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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 광주, 절반의 혁명

광주 남구 보궐선거 선전으로 지역구도에 또 하나의 돌파구 낸 민노당,
진보 정치 세력에 희망을 선사한 빛고을
등록 2010-08-06 11:28 수정 2020-05-02 19:26
7·28 광주 남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오병윤 민주노동당 후보는 44.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결과는 비록 낙선이었지만 지역주의와 민주당의 ‘색깔론’ 공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는 평가다.

7·28 광주 남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오병윤 민주노동당 후보는 44.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결과는 비록 낙선이었지만 지역주의와 민주당의 ‘색깔론’ 공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는 평가다.

여당 압승, 그리고 야당 참패. 7·2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는 불과 한 달여 앞서 치러진 6·2 지방선거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누구에게든 패배란 쓰라린 법이다.

반MB 정서와 야권 연대에만 기대 선거를 치른 민주당은 야당 참패의 원인 제공자가 됐다. 야권 연대 요구에 밀려 원내 진입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국민참여당, 아예 후보조차 내지 못한 진보신당, 그리고 당의 간판인 금민 전 대표를 내세우고도 득표율 1%의 벽을 넘지 못한 사회당에 7·28 재보선의 상처는 크다.

민주노동당의 아쉬움은 조금 다르다. 민주당의 텃밭 호남,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상징성이 가장 큰 광주에서 민노당은 ‘조용한 혁명’을 꿈꿨다. 기억할 만한 선전을 거듭했다. 오병윤 민노당 후보가 장병완 민주당 후보를 앞질렀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속속 나왔다. 선거 초반 민주당의 압도적 우세를 점친 정치권과 언론은 민노당의 돌풍에 경악했다. 광주 시민이 민주당이 아닌 민노당을 정치적 대리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동네 사람’ 후보의 탄탄한 밑바닥 조직

하지만 이번에는 딱 거기까지였다. 선거는 장병완 후보의 신승, 오병윤 후보의 석패로 끝났다. 전국 평균(34.1%)에도 미치지 못한 저조한 투표율(28.7%)이 민노당의 발목을 잡았다. 지역 정서에 심지어 색깔론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광주 남구에 쏟아부은 민주당의 막판 총력전도 민노당에는 부담이었다.

진보 진영이 기대한 ‘7·28 광주혁명’은 오병윤 후보의 패배와 함께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났지만, 광주 남구 보궐선거가 남긴 정치적 의미는 작지 않다. 무엇보다 진보 정당의 가능성을 재확인했다는 사실이 큰 성과다.

광주에서 민노당이 선전한 배경을 어느 하나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오병윤 민노당 후보가 당선권에 가까운 44.1%의 표를 얻은 데에는 다양한 조건과 상황이 함께 맞물렸다.

우선 오병윤이라는 인물의 후보 경쟁력이 그 가운데 하나다. 1985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오 후보는 이후 광주에서 6·10 항쟁 등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6년 ‘전두환·노태우 구속투쟁’ 주도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008년 18대 총선까지 광주에서만 세 차례 민노당 후보로 출마하며 도전을 거듭한 것도 강점으로 작용했다. 7·28 광주 남구 보궐선거가 그에게는 네 번째 도전이었다. 지역에 일찌감치 뿌리를 내린 만큼 밑바닥 조직과 인맥이 탄탄했다.

장병완 민주당 당선자는 정반대였다. 광주와의 인연이나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보다 기획예산처 장관과 호남대 총장이라는 경력이 무기였다. 최권일 정치부 기자는 “오병윤 후보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시절 이후 광주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덕분에 지역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던 반면, 인물면에서 나쁘지 않았던 장병완 민주당 후보는 ‘낙하산 공천’이 약점으로 작용했다”며 “지역사회에서는 다른 민주당 예비 후보들이 일찍부터 표밭을 다져왔는데, ‘동네 사람’도 아닌 장 후보가 갑자기 내려오자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야 4당 단일화와 민노당식 1표 엮기
광주 남구의 역대 선거 결과

광주 남구의 역대 선거 결과

광주 남구에서만 20년을 살아온 택시기사 임근호(59)씨의 말이 딱 그랬다. “요즘에는 사람들 말 들어보면 민주당 혼나야 된다 안 허요. 광주가 그래도 텃밭인디 거시기 되아불면 민주당도 좀 타격을 받지 않겄어요. 오병윤은 그래도 야당 통합 후보인디, 장병완 그 사람은 광주 사람도 아니라 허고.”

민주당을 제외한 야 4당과 시민사회단체가 똘똘 뭉쳤던 것도 민노당 선전의 주요 요인이었다. 재보선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치러지기 전 민노당과 국민참여당은 민주당에 각각 광주 남구와 서울 은평을만큼은 양보해달라고 요구했다. 야권 연대를 위한 진정성을 보여달라는 뜻이었다. 민주당은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는 “당선 가능한 후보가 나서야 한다”는 논리로 장상 후보를 고집했고, 텃밭 광주에서는 일방적인 후보 사퇴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양보를 거부하는 민주당의 논리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민주당이 기득권 포기를 거부하자 광주에서 시민사회단체와 민노당·국민참여당을 포함한 야 4당은 ‘시민사회연석회의’를 구성해 비민주당 단일화 전선을 구축했다. 야 4당 단일 후보로는 여론조사에서 장우철 국민참여당 후보에게 앞선 오병윤 후보가 뽑혔다.

민주당을 제외한 야 4당 단일화의 위력은 생각보다 컸다. 민주당 일당 독점 구도를 견제해야 한다는 지역의 바람과 맞물리며 상승효과를 나타냈다. 오 후보 캠프에서 가장 즐겨 사용한 구호도 ‘야 4당 단일후보, 기호 5번 오병윤’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자마자 오 후보의 지지율이 수직 상승했다.

7월27일 광주 남구 봉선동에서 만난 회사원 김정선(40·여)씨가 보궐선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야 4당 단일화였다. “원래 재보선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이번에는 야 4당 단일화가 이뤄졌잖아요. 광주에서 오래 정치를 해온 오병윤이 개혁 바람을 일으켜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민노당식 조직투표’의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돈과 권력을 매개로 이뤄지는 기존 정당의 조직투표와 달리 민노당의 ‘1표 엮기’ 조직투표는 자원봉사자와 지지자의 적극적 참여를 특징으로 한다. 공식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7월27일 밤늦은 시각까지 오병윤 후보 쪽이 자원봉사자에게 당부한 것은 ‘전화 한 통’이었다.

최권일 기자는 “연고자 한명 한명을 꼼꼼히 챙기는 민노당식 조직선거는 6·2 지방선거에서 시민사회 단일 후보로 나선 장휘국 광주시 교육감 후보를 당선시키는 등 위력을 발휘했다”며 “광주 남구 보궐선거를 앞두고 광주 정가에서는 오병윤 후보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이미 2만5천 표를 엮어놓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민주당이 자꾸 실망을 시켜분께”

오 후보는 실제 선거에서 2만877표를 얻었다. 당선 안정권이던 2만5천 표에 조금 못 미쳤다. 투표 당일 오전에 쏟아진 폭우만 아니었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오 후보 쪽에서는 핵심 지지층인 30~40대 직장인 유권자의 상당수가 폭우 때문에 투표를 포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야 4당 단일화를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의 전폭적 지지와 민노당식 ‘1표 엮기’ 조직투표, 그리고 ‘오병윤’이라는 지역 밀착형 후보의 끈질긴 도전이 맞물렸기 때문에 가능한 민노당 돌풍이었지만, 바람이 한쪽 방향에서만 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의 세 가지 변수를 모두 더한 것만큼 광주 남구 보궐선거에서 강력한 위력을 보인 것이 ‘반민주당’ 정서였다.

광주 시민이 느끼는 ‘일당 독재’ 피로감은 6·2 지방선거 때부터 표출됐다. 지방선거 전부터 민주당 일색의 시의회 부패 문제로 비난을 받아온 민주당이 선거 직전 다시 ‘선거구 쪼개기’ 파동을 일으켰다. 1개 선거구에서 4명의 기초의원(구의원)을 뽑도록 한 ‘4인 선거구’를 모두 ‘2인 선거구’로 나눈 것이다. 4인 선거구일 때 가능했던 민주당 이외 정당과 시민사회 출신 후보의 당선은 그만큼 어려워졌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이 대부분인 광주시의회의 작품이었다. 지역 언론이 일제히 민주당을 난타했다. 반성해야 할 민주당이 오히려 무리하게 밥그릇 챙기기에 나섰다는 비판이었다. 반민주당 정서는 6월2일 치러진 광주 시의원 선거에서 민노당이 사상 처음 두 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기초의원도 12명을 배출했다. 광주만 놓고 본다면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민노당의 선전이 광주의 반민주당 정서에 힘입었다는 사실은 민노당에 양날의 칼이다. 지금 당장은 민주당 행태가 괘씸해 민노당 쪽으로 눈을 돌리지만, 어떤 이유로든 미워할 이유가 해소된다면 그때는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실제로 광주 남구 선거 취재 과정에서 만난 민노당 지지자는 오병윤 후보를 지지하는 까닭을 묻자, 대부분 민주당에 대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

“서민을 위해 일하라고 (민주당을) 찍어줬는데 자꾸 실망을 시켜분께, 이제는 ‘아 사람을 보고 찍어야겄다’ 하는 것이제. 민주당이 제대로 서민을 위하기만 한다면 백명이라도 찍어주겄소.”(남구 무등시장에서 만난 50대 여성 자영업자)

“이번에는 한번 칵 바꿔버려야지. 후보만 내면 당선된다고 생각하는 그 버릇부터 고쳐줘야 해.”(남구 진월동 푸른길에서 만난 40대 남성)

7월28일 밤 광주 남구 주월동 선거사무소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오른쪽), 강기갑 전 대표 등과 함께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오병윤 후보(가운데)가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7월28일 밤 광주 남구 주월동 선거사무소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오른쪽), 강기갑 전 대표 등과 함께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오병윤 후보(가운데)가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노동자·농민 계급투표 없이도 선전

민주당과 맞선 오병윤 후보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민주당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의 선거 전략을 택하지 않았다. D-1, 7월27일 저녁 광주 남구 진월동 농협 앞에서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오 후보는 자신이 ‘야권 연대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민주당을 깨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2년 뒤 대선에서 정권 교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병윤이 당선되면 2012년 대선에서 반드시 한나라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 정권 교체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민노당의 위치를 민주당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쯤으로 소개한 것이다. 아직까지는 광주에서 “민주당을 대신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민노당의 현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민노당이 거둔 성과를 폄훼할 필요는 없다. 오병윤 후보가 얻은 44.1%는 2006년 광주 남구청장 선거에서 김창훈 민노당 후보가 얻은 6.3%에 비해 한층 진보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2006년,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노당이 광주 남구에서 얻은 기초 및 광역의원 정당투표 득표율은 민노당 전국 평균 득표율에 미치지 못했다. 18대 총선과 6·2 지방선거 남구청장 선거에서는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민노당이 당선에 버금가는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이 광주 남구라는 사실은 특히 눈여겨 봐야 한다. 권영길 민노당 의원이 재선한 경남 창원이나 강기갑 전 대표가 당선된 경남 사천과 광주 남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민주노총 사업장이 한 곳도 없어 창원처럼 노동자 계급투표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농민 계급투표가 가능한 조건도 아니다. 오병윤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해온 민주노총 광주지역 일반노조 조합원 정희성씨(41)는 “진보 정당의 물적 토대가 없는 광주 남구에서 이 정도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광주가 민노당을 민주당의 대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민노당의 광주 남구 돌풍을 영·호남 지역주의의 퇴조 흐름으로 설명했다. “2004년 총선 이후 1당 구도였던 영·호남에서 진보 정당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산업화로 인한 계급분화와 함께 영남의 변화가 시작됐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경험한 이후 호남에도 경쟁적 정당 체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 정치의 발전을 가장 어렵게 만든다는 지역주의의 벽을 뚫고 진보 정당이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선거였다.”

민주당과 호남의 이별 알리는 신호탄?

박용진 진보신당 전 대변인은 민노당이 7·28 광주 남구 보궐선거가 진보 정당 전체에 희망적 메시지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텃밭 광주가 민주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가 아니라 진보 정당 후보를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호남 민심에 균열이 오고 있다는 증거다. 민주당이 너무 못해서 얻은 반사이익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어찌됐든 민노당 선전은 ‘호남의 변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보여줬다. 광주에서 국회의원 의석 하나를 얻고 못 얻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선거 결과가 서울·경기 등 수도권의 호남 유권자에게도 상당한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적 시그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진보 정치 세력에게는 희소식이다.

광주의 변화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년(8월18일)과 함께 찾아왔다는 사실도 유의미하다. 1980년 5월 이후 광주에서의 희생에 대한 호남의 부채의식은 김 전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존재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나타났다. 호남과 민주당을 잇는 정치적 매개가 바로 김 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30년간 보이지 않는 ‘항쟁’을 계속해온 광주는 그의 서거 이후 부채의식을 조금씩 덜어냈다. 6·2 지방선거와 광주 남구 보궐선거가 민주당과 호남의 이별을 알리는 예고편이 될 수도 있다.

박용진 전 대변인은 미완에 그친 ‘7·28 광주혁명’을 ‘이른 봄에 나타난 제비’에 비유했다. 제비 한 마리의 존재는 작을지 몰라도 기나긴 겨울의 끝, 화창한 봄날의 시작은 제비 한 마리의 날갯짓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광주=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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