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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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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광장에서 의회로 진군한다

4월29일 재·보궐 선거는 ‘촛불 후보’들의 본격적인 시험무대…
3세대 ‘주민단체’가 ‘촛불 정치’의 동력
등록 2009-04-23 04:31 수정 2020-05-02 19:25
2008년 4월의 어느 주말, 서울 청계광장에서 일군의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주부 등이 그들을 따라 촛불을 들었다. 5월2일, 제1회 촛불문화제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뒤이어 8월 무렵까지 촛불의 물결이 전국의 거리를 덮었다. 그 사람들, 그 시간들을 통틀어 우리는 ‘촛불’이라 불렀다. 그리고 촛불은 흔적도 없이 꺼져버렸다. 꺼진 것처럼 보였다.
촛불은 미래를 낙관하지 못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문화과학사 펴냄)에서 “촛불집회에서 활성화된 시민세력이 풀뿌리 수준에서 여론 변화를 이끌어내고 제도정치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모색하지 못할 경우, 정치위기의 기본 구조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일찌감치 지적한 바 있다.
촛불 1년, 지금 광장에는 촛불이 없다. 그러나 다른 모습의 촛불이 등장했다. 광장에서 의회로 전진하려는 촛불 시민, ‘호모 칸델리스’(촛불 인간)는 지금 4·29 재·보궐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편집자
촛불은 광장에서 의회로 진군한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촛불은 광장에서 의회로 진군한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지난 4월7일 저녁 경기 성남시 모란역 니즈몰 앞. 김상곤 한신대 교수가 경기도교육감이 되기 바로 전날, 그러니까 후보로서 마지막 유세를 하던 풍경은 사뭇 진귀했다. 인도로 무대가 열린 유세차량 왼쪽으로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그 옆엔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무리지어 있다. 민주당 쪽 인사들은 유세차량에서 조금 떨어진 상점을 등지고 섰다. 차량 오른쪽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 차지였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김한성 연세대 교수 등은 점잖이 박수를 쳤고, 손호철 서강대 교수만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키가 큰 손 교수는 “내가 앵글이 제일 높긴 하지”라며 웃었다. 차량 앞에는 ‘촛불시민연대’ 사람들이 진을 차렸다. 지난해 촛불 정국에 주도적으로 동참했던 온·오프라인 모임이다. 선거단 대학생들이 율동을 할 때 환호도 하고, 무대를 배경으로 ‘폰카’를 찍는 그들 대개는 중년이었다.

최초의 전교조 성향 후보 당선

반상회나 민방위 훈련이 아니면 이 중년의 무리들이 만날 일은 많지 않다. 이념 성향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다들 고양잇‘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깊이 보면 서로 ‘속’이 다른 호랑이·사자·치타·표범의 조합이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유구한 명제는 고양잇과 여러 속들의 다툼과 견제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상곤 후보 쪽 김동선 선거대책본부 공보실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며 “교육에 대한 평가와 함께, 더 이상 (현 정권에)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지지자들의 손에는 대부분 촛불이 들려 있었다. 듣기에는 ‘범도민 후보’였고, 보기에는 ‘촛불 후보’였다. 꺼진 줄로만 알았던 촛불을 그렇게 다시 만났다.

이튿날인 4월8일, 김상곤 후보는 한나라당과 보수층의 지지를 받았던 김진춘 전 교육감을 7%포인트 차로 누르고 당선에 성공했다. 손호철 교수는 그를 “완전한 좌파”로 분류한다. 교육감 선출 방식이 2007년 주민직선제로 바뀐 이래, 전교조 성향의 후보가 당선된 건 처음이다. 지난해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주경복 건국대 교수가 공정택 현 서울시교육감 쪽의 ‘전교조 망국론’ 올가미에 낚여 2%포인트 차로 역전을 당했던 전례에 견주면 기적적이다. 더구나 당시 선거는 촛불 정국이 이어지던 2008년 7월30일에 치러졌다. 기대가 큰 만큼 열패감도 컸다. ‘촛불-시민 운동’과 ‘정치-선거 운동’의 간극은 거대했다.

그래서 경기도교육감 당선에 진보 진영 인사들은 적이 고무돼 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의 전망마따나 “촛불이 투표를 통해 대의민주주의 내부로 진입하지 못한다면, 촛불의 성과는 결국 촛불 실패로 귀결되고 말” 상황에서 새 돌파구의 징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장 오는 4월29일 재·보궐 선거는 주경복과 김상곤을 잇는 ‘촛불 후보’의 본격적인 시험무대가 되고 있다. 경기 시흥시장 선거에 풀뿌리 주민운동을 펼쳤던 ‘범시민 후보’가 시민단체와 진보 정당들의 지지를 받으며 출마했다. 보수 텃밭인 경북 경주 국회의원 선거에선 지난해 촛불집회를 이끌었던 인터넷 논객이 ‘촛불 후보’를 자처하며 출사표를 던졌다. 서울 광진구를 지역구로 하는 또 다른 ‘범시민 후보’는 서울시 의원 선거에 도전하고 있다.

선거법상 이들은 모두 무소속 후보다. 1년 전 촛불 세례를 받은 주민·시민조직의 후원을 뿌리 삼고, 진보 정당의 지원도 받아냈다. 주요 야당이 서로 세를 규합하거나 후보 단일화를 꾀했던 과거의 ‘연합 후보’와는 다르다. 기성 정당을 통해 자신의 권리와 기호를 누릴 수 없었던 시민들이 직접 후보를 세우는 한편, 기존 정당을 ‘활용’하는 양태다. 촛불을 통해 참여정치와 자발적 연대를 학습한 ‘호모 칸델리스’(촛불 인간)가 대의정치에 대고 ‘대안정치’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상곤 교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경기도교육감으로 당선됐다. 그가 마지막 유세를 매듭지은 건, 지지 당부가 아닌 그를 도와준 수많은 단체와 개인 동지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김상곤 교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경기도교육감으로 당선됐다. 그가 마지막 유세를 매듭지은 건, 지지 당부가 아닌 그를 도와준 수많은 단체와 개인 동지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자생적 주민단체의 3단계 진화

경기도 전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해부터 교육감 후보를 물색했다. 김상곤 한신대 교수가 후보직을 최종 수락한 것은 올해 2월이었다. ‘밑으로부터의 공천’에 반년이 걸렸다. 당시 예비후보 등록까지 마쳤던 또 다른 촛불 후보 권오일(에바다학교 전 교감)씨는 여론조사를 거친 뒤 단일화에 응했다. 대선 후보 경선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주민·시민 조직을 중심으로 이뤄진 촛불 후보 경선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권씨는 곧장 선대본부장을 맡아 자전거 유세에 나섰다.

일련의 과정에 경기도 지역 201개 단체가 결집했다. 서울에서도 학부모·교수·예술 단체 등의 지지 선언이 15차례 이어졌다. 오창은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은 “중소 규모 단체들이 연대를 위해 양보하며 풀뿌리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민주노총이나 전교조가 중심에 섰다면 (주민들로부터) 되레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패권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기존 운동 조직과 구분되는 ‘주민 단체’들이 촛불 후보를 탄생시킨 산파였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노동단체, 민중연대는 사회단체, 참여연대는 시민단체다. 그럼 주민단체는? 경기 과천 등에서 풀뿌리 자치운동에 참여해온 하승수 변호사는 한국 주민단체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풀뿌리 주민단체의 요람이었다. 이 본부에 속한, 주로 빈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단위조직들이 자생적인 풀뿌리 주민단체로 발전했다. 서울 관악·구로 등 노동자 주거 지역이 대표적인데, 이들 1세대 주민단체는 노동자·빈민·농민 등을 동력으로 하는 전통적 재야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자생적 주민조직의 두 번째 단계는 넓은 의미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회원들이 일구었다.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정치인 노무현을 중심으로 일종의 팬클럽을 형성했고 2000년대 들어 전국 단위의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이후 ‘시민참여 정당’을 내세운 개혁당의 지역적 근간이 됐다. 참여정부의 부침과 함께 수면 아래로 침잠했지만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감과 별개로 제대로 된 시민정치를 꿈꾸던 사람들이 과거 개혁당 지역조직에 많이 참여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하 변호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대통령제를 위시한 ‘중앙정치’에 주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 3세대가 오늘날 전국에 걸쳐 조직된 풀뿌리 주민단체들이다. 공동육아조합, 먹을거리 생활협동조합, 생태공동체 등이 2000년대 초·중반부터 곳곳에서 자생했다. 일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으로, 1년 전 촛불 시위의 주역이었다. 이제는 ‘촛불 정치’의 동력이 되고 있다. ‘개별적인 것’에 주목했던 시민들이 ‘정치적인 것’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그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 등록된 공동육아조합·방과후교실만 전국적으로 80여 곳이다. 품앗이 형태의 모임은 훨씬 더 많다. 본격적인 주민운동을 펼치는 지역 풀뿌리 단체는 적어도 5천 곳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관련 조사 자료를 보면, 2000년 무렵 전국의 시민단체가 2만여 개까지 파악됐고, 2003년에는 2만5천여 개로 늘었는데, 2000년대 증가분에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풀뿌리 단체가 주를 이뤘다”고 말했다. 2000년과 2004년의 낙천·낙선 운동을 거치면서 각 지역 주민단체들이 2~3배 급증했다.

유민희 서울시의원 후보가 4월17일 오전 유세를 펼치고 있다. 서울시 의원에게 돈봉투를 뿌린 김귀환 서울시의회 의장을 주민소환하려던 구민들의 바람을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유민희 서울시의원 후보가 4월17일 오전 유세를 펼치고 있다. 서울시 의원에게 돈봉투를 뿌린 김귀환 서울시의회 의장을 주민소환하려던 구민들의 바람을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촛불 후보의 등장은 풀뿌리 주민단체들의 개미군단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결과다. 경기도교육감 선거 승리의 비결부터가 개미군단의 자발적 지지 덕분이라고 평가받는다. 경기 시흥시장 선거의 ‘범시민 후보’ 탄생 과정도 이를 생생하게 웅변한다.

시흥은 불행한 도시다. 1995년 첫 민선시장 이래 4명의 시장이 모두 정치자금법 위반, 뇌물 수수 등 탈법과 비리에 연루됐다. 부패 시장을 배출한 정당은 민주당·국민회의·한나라당(2차례)이었다. 기성 정당 출신의 시장들이 사이좋게 부패를 나눴다. 이유가 없지 않다. 전체 면적의 30% 이상이 매립지 등 개발 가용 지역이다. 개발 인허가를 노린 돈의 유혹이 넘칠 수밖에 없고, 단체장은 그 유혹에 번번이 넘어갔다.

주민소환운동 이어 ‘범시민 후보’로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7월, 이곳에선 시흥만의 촛불이 켜졌다.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운동이 그것이다. 각종 개발사업 관련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된 이연수 시장이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월급까지 받아가는 상황이었다. “사실 처음엔 (주민소환운동이) 가능할까 고심도 많았는데, 지역 주민들이 먼저 시흥 시민단체 다 죽었냐 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다”고 김수정 민주노동당 시흥시위원장은 회고했다.

한여름, 두어 달 동안 4만6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시흥의 풀뿌리 정치 전통이 면면이 이어졌던 것도 큰 힘이었다. 2005년에는 급식조례제정 운동을 하며 석 달 동안 2만여 시민들의 서명을 받은 적도 있다. 1997~98년 시화호 개발 반대, 2005년 급식조례제정 운동, 2007년 소금창고 복원 운동, 2008년 촛불문화제, 그리고 최근까지 지속됐던 주민소환운동을 거치면서 주민들의 연대는 넓어지고, 구성원은 다양해지고, 정치적 각성도 비등했다.

이 중 소금창고 복원 운동의 경험은 각별했다. 한 회사가 철거해버린 일제시대 소금창고를 지역문화재로 복원하기 위해 지역 단체들이 ‘소금창고시민행동’이란 이름으로 뭉쳤고 2007년 6~8월 촛불문화제가 이어졌다. 이념을 넘어선, 범시민운동의 ‘결정체’였다. 중앙정치적 시선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생활 의제’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사 때는 진보단체는 물론 지역예총·문학회 등까지 울력해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결국 시와 회사로부터 복원 약속도 받아냈다. 이들이 이듬해 주민소환운동의 지지자·서명자가 됐을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연수 시흥시장은 올 1월30일 대법원에서 뇌물수수죄로 아예 시장 자격을 박탈당했다. 주민소환운동에 뒤이어 “우리들의 후보를 직접 내세워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들이 자연스레 모아졌다. 시흥시장 선거에 ‘범시민 후보’로 나선 최준열 후보는 주민소환운동본부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최 후보 캠프 관계자는 “지난 2월 예비후보 등록 전 한 여론조사에서 후보 개인에 대한 인지도는 5%에 불과했지만, 소환운동 후보라는 사실을 밝히자 지지율이 16%가 넘었다”고 전했다. 16%는 유권자 대비 주민소환운동 서명자의 비율과도 일치한다.

최준열 후보는 1991년 시흥시에 산부인과 병원을 낸 의사다. 1980~90년대 시흥 빈민활동의 대부였던 고 제정구 전 의원은 풀뿌리 후계자 발굴에 나섰다. 제 전 의원 쪽의 제안을 받고 최 후보는 1999년 시흥 YMCA 창립이사장을 맡았다. 세상일에 무심했던 ‘의사 선생님’이 직·간접적으로 풀뿌리 주민운동 3세대의 역사를 관통할 첫발을 뗐던 셈이다. 최 후보는 “정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구조가 참 모멸스럽다. 한나라·민주당이 차린 반찬과 밥만 먹어야 하는 구조 아닌가”라고 말한다.

최준열 시흥시장 후보(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거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지역 학교 교장 퇴임식에 선전을 하러 갔다가 친목을 방해하는 것 같아 자리만 채우다 나왔다. 그는 숫기 없던 의사가 정치를 하면서 점점 뻔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최준열 시흥시장 후보(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거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지역 학교 교장 퇴임식에 선전을 하러 갔다가 친목을 방해하는 것 같아 자리만 채우다 나왔다. 그는 숫기 없던 의사가 정치를 하면서 점점 뻔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경주에 나타난 ‘안티 이명박’ 카페

서울 광진구도 시흥을 닮았다. 서울시 의원에게 돈봉투를 뿌린 김귀환 전 서울시의회 의장의 지역구다. 지난해 10월 복지·교육 단체 등 10여 개 단체가 세운 광진주민소환추진본부는 한 달이 안 돼 4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주민등록번호까지 적어야 하는 서명에 (주민소환투표 청구 요건인) 1만5천 명을 채우는 게 가능하겠냐”는 반론도 많았으나,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서명을 받기 위해 어린이대공원 후문 쪽에 세운 천막은 음료수를 사들고 오는 이, 술 마시고 한풀이를 하는 이들로 24시간 ‘자치민원실’ 구실을 했다. 결국 김 전 의장은 지난해 11월10일 자진 사퇴를 했다.

이후 시민들은 유민희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대의원을 시의원 후보로 세웠다. 놀랍게도 이 지역에선 아직도 촛불문화제가 매주 한 차례씩 열린다. 지난해 7월부터 ‘광진·성동 야옹이’라는 온라임 주민모임이 주최하고 있다. 건국대 입구 지하철역 쪽에서 정치 현안에 대해 공개 발언도 하고 문화공연도 한다. 유민희 후보 선거캠프의 선동근 집행위원장은 “촛불 정국의 영향이 거대하진 않지만, 참여정치의 연장선으로 감지되는 건 분명하다”고 말한다. 2004년 광진구에서도 급식조례제정 운동을 펼쳤는데, 당시에는 현장의 주민 10명 가운데 3~4명꼴로 서명에 참여했다. 지난해 촛불 이후 전개된 주민소환운동 때는 10명 가운데 7~8명꼴로 참여했다. 중앙정치는 그대로였지만, 지역 주민들은 시나브로 변화해왔던 것이다.

경북 경주시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촛불 후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포털 다음의 아고라를 드나든 이라면 아이디 ‘한글사랑나라사랑’을 모르지 않는다. 지난해 촛불 정국 때 를 다른 누리꾼들과 함께 펴낸 채수범(38)씨다. 이번 선거에 아예 무소속 후보로 나섰다. 창조한국당의 예비후보자는 출마를 포기하며 자신의 선거사무실을 무상으로 빌려줬다. 지역 특성상 풀뿌리 주민단체라는 ‘배경’을 업진 못했지만, ‘안티 이명박’ 카페 회원들의 응원이 그와 함께한다. 울산 북구 국회의원 선거를 살펴도, 두 진보 정당이 벌이는 후보 단일화 배경에는 이 지역의 더 작은 풀뿌리 조직들의 광범위한 압력이 작용하고 있다.

대세는 못 된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촛불 시민후보의 존재는 새 대안정치의 등장을 웅변한다. 1년 전의 ‘촛불’이 전국에서 지역 단위로 낙하해 생활 영역에 밀착한 뒤 기존 대의정치를 견제·혁신하려고 다시 광장에 나선 모양새다. 특히 4·29 재·보궐 선거가 2010년 지방선거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점에서 ‘촛불 정치 실험’은 더욱 눈길을 끈다.

2010년 지방선거, 조용한 모색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촛불의 진화를 관찰하며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1년 전 촛불에서 상처를 입었다. 시민을 ‘대표’하기는커녕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받았다.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시민운동 진영은 조용한 모색을 거듭해왔다. 화두는 2010년 지방선거다. 기초지자체는 물론 광역지자체 선거에 시민후보를 내는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 경기도교육감 선거는 그 모범답안이었다.

전국 440여 개 단체가 참여해 시민사회 진영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지난 2월 총회에서 ‘지방선거 기획단’을 구성했다. 2010년 지방선거 대책을 집중 논의해, 오는 6월께 보고서를 제출하는 ‘특임’을 맡았다. 실현 가능성은 아직 점칠 수 없으나, 가장 적극적인 시나리오는 서울시 등 ‘전략 지역’에 시민후보를 출마시키는 것이다. 경기도교육감 선거 때처럼, 주민단체와 시민단체들이 내세우는 후보에 대해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민 주도의 촛불 연합 후보’ 모델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후보가 선거에 참여했던 과거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몇몇 명망가들이 개인 자격으로 기존 정당에 영입되거나, 일부 단체 차원에서 무소속 후보를 배출하는 방식이었다. 최근의 논의는 정당 영입 또는 정당 건설은 배제한다는 전제 아래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시민 후보’는 대의정치나 제도권 정당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기본 동력으로 삼는다. 하지만 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그것만으로는 시민 후보의 미래를 전망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시흥시 ‘범시민 후보’의 대의에 동의할 리 없다. 따로 후보를 냈다. 기성 정당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손혁재 경기대 겸임교수는 “유권자 단체의 후보 추천을 허용하는 등의 제도 개혁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번 재·보궐 시민후보가 선례를 만들지언정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대의정치를 거부하는 방식보다,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높일 수 있는 올바른 전망 제시와 개혁·진보 세력의 실질적 정책 통합이 더 중요하다”며 “그런 방식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시흥의 모델도 국지적·일시적으로 끝날 수 있다”고 말했다.

촛불 정치의 도덕성만 내세워 중앙정치를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도교육감 선거의 투표율은 12.5%에 불과했다. 역대 최저치다. 중앙정치에 대한 혐오가 선거 불참으로 이어졌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관심을 총체적으로 불러세우지 못하면 결국엔 공멸한다는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라는 시민후보 모델은 대단한 의미가 있지만, (시민과 진보 정당 사이에) 정책을 합의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정당정치’라는 높은 컨테이너

촛불 시민, 호모 칸델리스는 이제 광장이 아니라 의회를 향하고 있다. 이번에는 ‘명박산성’이 아니라 ‘정당정치’라는 컨테이너를 넘어야 한다. 촛불 정치의 성패는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지난해 촛불집회 현장에서처럼 온갖 사연과 희망과 좌절과 외침이 엉켜들 것이다. 4월29일, 서울 광진구, 경기 시흥, 경북 경주, 울산에서 그 긴 실험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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