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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개혁세력 ‘정치적 사망선고’


개혁세력 불모지에 노무현 등장은 대반전… 바탕을 흐르던 ‘영남 패권주의’가 자기를 베는 칼로
등록 2009-04-15 10:16 수정 2020-05-02 19:25
16대 총선을 앞둔 2004년 4월14일 문재인(앞에서 둘쨋줄 왼쪽 네 번째)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임종석(마이크 든 이) 전 의원 등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탄핵 사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산은 16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33.7%의 지지를 몰아줬고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한겨레 곽윤섭 기자

16대 총선을 앞둔 2004년 4월14일 문재인(앞에서 둘쨋줄 왼쪽 네 번째)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임종석(마이크 든 이) 전 의원 등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탄핵 사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산은 16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33.7%의 지지를 몰아줬고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한겨레 곽윤섭 기자

‘영남 개혁세력’이 초토화 지경에 이르렀다. 2009년 4월7일 이들의 구심이자 대표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한테서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사과문은 ‘한 줌’이나마 명맥을 유지했던 영남 개혁세력에겐 ‘정치적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17대 정당득표율 16대의 두 배

19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이 자행한 민주자유당으로의 ‘3당 합당’은 영남 개혁세력에게 ‘재앙’이었다. 현실 정치에 발을 딛고 있던 대부분이 민주자유당을 선택했다. 노 전 대통령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애쓰다 결국 호남 중심의 정당으로 합류한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영남은 “개가 출마해도 민자당·한나라당 간판만 달면 당선된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개혁세력의 불모지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2002년 지역주의 청산과 정치 개혁을 들고 나온 노무현의 화려한 등장은 대반전을 일으켰다. 영남은 그해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25.4%라는 득표율을 선물했다. 야인이나 다름없던 영남 개혁세력은 청와대로, 정부와 공기업으로, 국회의원으로 진출했다. 문재인 전 민정수석, 이호철 전 국정상황실장, 전해철 전 민정수석, 이정호·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 이재용 전 환경부 장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최철국·조경태 의원이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정당득표율은 부산 33.7%, 경남 31.7%로 16대 총선의 두 배가 넘었고, 보수주의와 지역주의 성향이 더욱 강한 대구·경북에서도 20%가 넘는 정당득표율을 기록했다.

영남 개혁세력도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꿈을 꾸는 시기였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요직을 지낸 한 인사는 “3당 합당으로 영남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 민자당으로 편입되면서 궤멸되다시피 한 영남 개혁세력이 노무현이라는 전국적인 정치인의 출현으로 다시 뭉치게 됐다. 노무현의 개혁적인 노선, 깨끗한 이미지, 미래지향적인 분위기에 더해진 지역 구도 극복이라는 논리는 영남 개혁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강력한 무기는 노 전 대통령과 영남 개혁세력 ‘자기를 베는 칼’이 되고 말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그토록 줄기차게 내세웠던 지역주의 청산은 ‘영남 패권주의’로 변질되면서 스스로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전라도 머슴살이’ 발언에서도 드러났듯이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해 (민자당 대신) 민주당 쪽으로 간 영남 개혁세력의 의식 세계엔 독재세력을 향한 반감 말고도 영남 패권주의가 있었다. 이들은 2002년 대선 때 유권자들이 지역주의를 넘어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정계를 개편할 여건을 만들어줬지만, 정서적으로 편한 영남의 지지에 기대어 세력화를 시도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의 지적이다.

고위직 인사의 영남 편중 심해져

2005년 노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제안한 ‘대연정’은 대표적인 영남 패권주의의 발로로 꼽힌다. 그는 “새로운 정치 문화”를 대연정의 이유로 들었지만, 열린우리당 대구시당위원장을 지낸 김태일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한나라당 세력에게 자리를 내줄 테니 대구·경북 지역에서 적당히 섞여 잘 지낼 수 있는 틀을 만들자는 것이 대연정의 요체”라고 반박했다. 정체성이 다른 한나라당에 손을 내민 것은 ‘기득권 세력과의 제휴 전략’으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쉬운 길이었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대연정은 지역주의의 벽에 구멍을 낸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 지역에서 지역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개혁 전선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한나라당과 싸우는 최전방이라 할 대구·경북의 개혁세력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기득권 세력과의 제휴 전략은 이 지역에서 개혁적 지지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노무현 정부에선 검사장·군 장성·총경 이상 등 고위직 인사의 영남 편중도 심해졌다. 고위직 인사의 적절한 지역 안배는 이른바 ‘국민 통합’ 노력의 하나로, 어느 정부에서나 뜨거운 감자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김대중 정부에서 주요 인사의 지역 안배 비율은 영남 대 호남 비율이 대략 4 대 2였는데, 노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을 영남에서 분리해 호남 대 대구·경북 대 부산·경남을 1 대 1 대 1로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부산 쪽 인사들은 늘 ‘과잉 지분’을 행사했다”며 “영남 개혁세력의 붕괴는 노 전 대통령 때 이들이 호의호식하면서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유명무실이 된 4대 개혁입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등 노무현 정부의 보수적인 정책은 영남 지역의 보수 성향 유권자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임원혁 연구위원은 “열린우리당은 자신들이 한나라당을 대체할 건전한 보수 정당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영남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개혁적인 대선 공약에 반하는 이런 행동에 국민은 사기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5·31 지방선거를 비롯해 선거에서 불만을 표출한 거다. 초심으로 돌아가 개혁적인 정책을 펴겠다고 하면 됐을 텐데, 노 전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중앙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지역에선 자리와 각종 지역 민원 해결 등의 ‘특혜’로 ‘지지’를 사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지역에 남아있던 개혁세력들은 이전보다 더욱 외로웠다”는 김태일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옆에서 지켜본 노 전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행동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대통령 권력과 결합된 에이전트들만 활동했다. 이들은 고급 공무원들의 뒤를 봐주거나 자리를 주고, 서민·중산층과 무관한 토목공사 예산을 따오는 방식으로 지역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지역 토호·언론·관료로 이뤄진 ‘지역성장연합’과 결합하고 교육, 주거, 일자리 등 서민·중산층의 요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나라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당 조직의 기초체력을 닦아 개혁세력 유권자들을 밑바닥부터 끌어안는 노력 대신, 한나라당 지지층의 ‘해결사’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2002년 4월7일 경북 포항시 포항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경북 지역 경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가 승리하자,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열광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2002년 4월7일 경북 포항시 포항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경북 지역 경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가 승리하자,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열광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이번 사건은 악재가 아닐 수도”

지난해 말부터 민주당 안팎에서 나돌았던 ‘친노 신당설’도 영남 패권주의와 맥이 닿는다. 신당 논의의 주축이 됐던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은 “노 전 대통령을 팔아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든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신당은) 지역이나 친노 정치세력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바라보는 이들은 ‘지역당’이라고 평가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사회디자인연구소’와 ‘광장’ 등 민주당 안팎의 친노·영남 개혁세력 일각에서 영남을 근거지로 하는 신당을 만들어 내년 지방선거에 최소 20~30명은 출마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해찬 전 총리가 ‘시기상조’라고 말렸고 자체적인 동력도 확보가 안 돼 주춤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민주당 인사는 “민주당에 호남색이 강해지니까 나오는 얘긴데, 개혁이 실패하니까 지역정당으로 전락하는 거다. 영남당 만든다고 개혁이 성공하나. 개혁이 성공해야 영남도 사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당분간 영남 지역에서 개혁세력이 위축될 것이라는 관측엔 이견이 없다.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정치평론가 김윤철씨는 “‘이제 너희는 안 된다’는 폐족론은 위험하다. 오류와 실책을 저질렀다고 해서 재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게다가 영남 개혁세력이 친노세력으로만 등치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을 대체할 세력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의 완충 구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징검다리 구실을 위해서라도 이들의 역할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권 안팎의 인사들은 뼈를 깎는 반성과 함께 영남 개혁세력이 내걸었던 ‘개혁’의 초심으로 돌아가야만 회생이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노 전 대통령 사건이 없었다면 친노세력의 ‘영남 정당’ 논의가 현실화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악재가 아닐 수도 있다”며 “영남 개혁세력은 개혁적 정체성을 표방했지만 이율배반적인 행태로 국민에게 외면당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1987년 이후 20년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진보·개혁 정치세력 전체가 ‘구조조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서 일한 한 인사는 “민주화 세력이 10년 집권 과정을 통해 ‘민주화 이후’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고, 영남은 정치적인 환경 자체가 비우호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며 “영남 개혁세력이 누군지에 대한 규정, 뭘 지향하느냐 하는 정체성 재확립부터 되지 않으면 이 무기력한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지역 구도 극복’이라는 논리로 선거운동을 해왔지만, 이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느냐. 그걸 찾지 않고서는 영남 개혁세력 복원은 요원하다”고 했다.

인물도 정치적 세력도 없네

문제는 사람이다. 영남 개혁세력의 구심이 될 만한 ‘인물’도, 이를 뒷받침할 정치적인 ‘세력’도 없다. 당장 내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하는 민주당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윤호중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은 “지역의 벽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지지층도 형성되지 않고, 그러다 보니 또다시 지도자도 길러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남 지역에서 개혁세력의 정치적인 지도력을 확보하는 게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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