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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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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예식장이 퍼뜨린 허례

전통 혼례에 없던 주례가 개화기 이후 신식 결혼에 등장… 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에도 포함
등록 2008-09-11 02:19 수정 2020-05-02 19:25

신랑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신부 집으로 간다. ‘결혼’이 아닌 ‘혼례’를 신부 집 마당에서 치른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이 맞은편에 족두리를 쓰고 연지곤지를 볼에 찍은 신부를 흘깃 훔쳐본다. 그 사이엔 음식과 기러기 한 쌍이 놓여 있다. 집례자가 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에 따라 식을 진행한다. 하객이 아닌 잔치꾼들 틈에서 혼례를 치르고 밤이 이슥해질 무렵 드디어 용 무늬를 새겨 넣은 초, 화촉을 밝힌다. 불이 꺼질 무렵 짓궂은 웃음과 수군거림이 신방의 창호지를 넘나든다.

1961년 12월16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문동환 목사가 부인 해리엇 페이 핀치벡과 결혼식을 한 뒤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오른쪽에 선 이가 주례를 맡은 김재준 목사, 왼쪽이 문 목사의 친구 박봉랑씨다. 문동환 제공.

1961년 12월16일 서울 경동교회에서 문동환 목사가 부인 해리엇 페이 핀치벡과 결혼식을 한 뒤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오른쪽에 선 이가 주례를 맡은 김재준 목사, 왼쪽이 문 목사의 친구 박봉랑씨다. 문동환 제공.

마당이 없어지니 예식장이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혼례는 이렇게 진행됐다. 주례가 없었기에 주례사도 당연히 없었다. 집례자는 예를 진행만 할 뿐 별도의 주례사를 하지는 않았다. 신랑이 이렇게 신부 집에 ‘장가를 간’ 뒤 사흘에서 길게는 1년 정도 머물다 색시와 함께 본가로 돌아온다. 여기서 ‘(신부가) 시집을 간다’는 말이 생겼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져온 이런 혼례 방식이 ‘서옥제’(壻屋制)다. 조선시대 들어 중국의 주자가례가 본격 도입되면서 신랑 집에서 신부를 맞아 혼례를 치르는 ‘친영제’(親迎制)를 나라 차원에서 권장하지만, 백성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서구 신앙인 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파고들면서 19세기 말 들어 신식 혼례를 하는 이들이 생겼다. 1890년 서울 정동교회에서는 신도끼리의 혼례가 열리기도 했다. 이런 신식 혼례 때 선교사들이 식을 주관하면서 중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주례사’의 원시적 형태라는 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00년에 발행된 에 이미 신식 혼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소개했다. 지역적으로는 인천과 남포, 원산 등 개항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서구 문물과 함께 신식 혼례를 먼저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게 오재일 고려족보문화원 원장의 시각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예전엔 잘 쓰지 않던 ‘결혼’이란 말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청첩장이니 피로연이니 하는 말도 도입됐다. 동시에 ‘주례’라는 말이 집례라는 전통의 어휘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으로 서구 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도 주례사 비슷한 형태의 절차가 들어 있는 일본 방식의 결혼식을 권장했다. 박부진 명지대 교수(인류학)는 “일부 하류층에서는 일본식 결혼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통 혼례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세는 신부 집 마당에서 치르는 전통 혼례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주례사’는 귀에 익지 않은 낱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미 그때 최상류층은 결혼식 뒤 신혼여행을 갔다는 것이다. 평양을 찾는 이도 있었고, 백암이나 온양과 같은 온천을 찾기도 했다.

신식 결혼은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이 목사나 신부를 주례로 세울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집안에서 덕망이 있는 이들이 주례를 보게 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조금씩 퍼져나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해방에 뒤이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신식 결혼 문화에 대한 인식도 더욱 퍼지게 된다. 박부진 교수는 “그전엔 마을 공동체 사회여서 (혼인 문화에서도) 공동체 고유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으나, 전쟁으로 지역 경제가 다 망가지고 피난살이를 하면서 다른 지역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들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신식 결혼이 전통 혼례를 제치고 서민들 사이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를 쓴 김열규(76) 서강대 명예교수는 “주례사는 교회와 일본식 혼례라는 두 가지 뿌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1960년대 상업 예식장의 발생과 더불어 (본격적 의미의) 주례사가 시작됐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재해 안동대 교수(민속학)도 “신식 결혼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상업적인 예식장의 보급과 함께 일반화됐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열규 교수는 1961년 부산의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당시 숙부의 친구이자 사장이었던 분이 주례사를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사업과 함께 너도나도 서울 등 대도시로 몰리는 ‘이촌향도’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은 신식 결혼의 보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가효 계명대 교수(소비자정보학)는 “근대화·서구화가 바람직하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구식 결혼식에 대한 대중의 환상도 함께 커진 것”이라며 “도시 지역에는 식을 치를 만한 넓은 마당이 없어 예식장을 찾아 결혼식의 권위를 갖출 필요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도시의 이와 같은 경향성은 ‘옛것은 나쁘고 새것은 좋다’는 그릇된 가치관을 타고 지역으로도 흘러들어 넓은 마당이 있는 시골에서조차 읍내의 예식장에 가서 결혼식을 하게 됐다. 정부는 1970년부터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라며 새마을운동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진행했다.

정부가 권장하는 공식 절차?

정부는 1969년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국민들이 관혼상제를 치를 때 식과 절차를 가능한 한 간소화하도록 유도했다. 민간에 과다한 허례허식이 판을 쳐 국가경제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오랜 관습을 정부의 강요로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를 잘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1973년 규정을 위반했을 때 벌칙을 강화하는 쪽으로 준칙이 개정됐다. 결혼식에 앞서 청첩장을 돌리거나 식장에서 하객에게 음식물을 대접하거나 화환을 내걸다 걸리면 벌금 50만원을 부과했다. 통계청 기록을 보면, 1977년 우리나라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7만77375만원이었다.

당시 가정의례준칙 별지 2의 1항 혼인식순을 보면, 개식에 이어 신랑 신부 맞절→신랑·신부 서약→성혼선언→혼인신고서 날인→신랑·신부 인사→폐식으로 이어진다. 주례사 순서는 별도로 나와 있지 않다. 다만 2항 혼인서약란에 “주례는 신랑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혼인서약을 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결혼식 도중 주례사를 하는 관행이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가정의례준칙은 1999년 폐지되고 ‘건전가정의례준칙’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시대에 맞지 않던 처벌 조항도 삭제됐다. 여기에는 성혼선언과 양가 부모에 대한 인사 사이에 주례자가 주례사를 하는 것으로 돼 있다(개식→신랑 입장→신부 입장→신랑·신부 맞절→혼인서약 및 서명→성혼선언→주례사→양가 부모에 대한 인사→내빈에 대한 인사→신랑·신부 행진→폐식). 이영호 법제처 사무관은 “준칙은 모범이 되는 내용을 나타낸 것으로, 강제 사항이 아니라 ‘이렇게 하라’는 권장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주례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권장하는 공식적인 절차인 셈이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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