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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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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각계인사가 미리 쓴 나의 유언장

등록 2001-01-16 15:00 수정 2020-05-02 19:21


살아 있는 이들이 미리 쓰는 유언장.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자신한테 내리는 평가가 어떤 형태로든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 평가가 냉정하든, 그렇지 못하든간에….

은 이런 점에 착안해 현재 살아 있는 각계 인사들에게 자신의 유언장을 직접 쓰도록 청탁했다. 대략 15명의 인사를 선정해 유언장을 써보도록 부탁했는데 10명의 인사가 보내줬다.

은 청탁할 때 특별한 형식이나 주문을 하지 않았다. 글을 보내주신 인사들은 대체로 참회록이나 회고록에 가까운 ‘자서전’ 성격의 글을 보내왔다. 딸이나 자녀에게 부치는 편지글 형식도 있었지만 이들도 결국은 크게 자서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몇몇 인사들은 재밌는 상상력을 가미하기도 했다.

유언장 청탁과정에서 특이한 대목은 의외로 유언장에 관한 거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상당수 인사들이 선뜻 청탁에 응한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한 유력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유언을 공론화할 경우 살아가며 이를 다 지킬 수 있을까 두렵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또다른 유력 정치인도 “정치인이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유언장을 쓰더라도 그 자체가 정치선전으로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한 전직 장관 출신은 처음에는 흔쾌히 쓰겠다고 약속했으나 막판에 못 쓰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는 “유언장을 쓰는 과정에서 내 마음이 정리돼 있지 않은 걸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앞으로 수양을 더 해야겠다”고 말했다. 물론 유언장 기획 자체에 거부감을 보인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정초부터 느닷없이 웬 유언장이냐. 나보고 일찍 죽으란 말이냐.” 유언장을 쓴 이들 중에도 “이거 쉬운 게 아니더라”며 곤혹스러움을 나타낸 이들이 적잖았다. 여하튼 유언장이란, 어떻게 받아들이든간에 쓰는 이에게 강한 삶의 무게를 던져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흔적없는 소멸
집을 떠나면서도 문학을 생각하는 작가의 고백

황석영/ 소설가

내가 죽거든 우선 장례에 대하여 일러두고 싶다.

워낙 살아서도 시끄럽던 사람이니 조용하게 가족끼리 치르기 바란다. 눈알, 간, 신장, 등의 장기는 병든 이들을 위하여 사망 즉시 떼어다 기증할 것이며 나머지 몸은 화장하기 바란다. 화장을 해서 뼈가 몇 조각 남으면 가루를 내어 아무 데든 산이나 들에 뿌리기 바란다. 비를 세우거나 문학상을 만들거나 무슨 기념을 하지 말기를 또한 바란다. 요컨대 죽음에 관한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내 책의 인세에 관해서 일러둘 말이 있다. 자식들도 모두 장성해서 제각기 열심히 노력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니 인세가 생기면 삼년씩 모아두었다가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에게 책 한권을 쓸 동안의 생활자금으로 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젊었을 적에는 스스로 유하(楡下)라고 호를 지어 새로 산 책의 말미에나 친한 친구에게 책을 줄 때에 적고는 했다. 느티나무 아래라는 말인데 이건 칠십년대에 전라남도 해남으로 이사가서 쓰기 시작했다. 그때에 이사간 집의 마당에는 한 삼사백년쯤 묵은 거대한 느티나무가 마당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나뭇가지가 작은 집 지붕의 거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집터가 서낭당의 당집이 분명했다. 그래도 내가 원체 대가 세서 그랬는지 별 탈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당호를 그 나무의 아래라는 뜻으로 붙였다. 동네 어구의 큰 느티나무 아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며 거기서 노인들은 장기도 두고 농사일 끝낸 장정들은 막걸리 추렴도 하고 젊은 것들은 달밤에 밀회도 하것다. 그리고 그뿐인가 마을의 크고 작은 대동굿을 거기서 벌인다. (莊子)에 ‘큰나무를 쓸모없다고 걱정하지말고 무하유향(無何有鄕)의 벌판에 심어놓고 유유히 그 옆을 거닐며 편안히 그 그늘에 누워 있지 못하는가’에서 나무 아래를 빌려온 셈이었다. 그러나 유신 말기에 농민들이며 사방 각처의 젊은 일꾼들은 드나들었지만 마음의 자유와 한가함은 얻을 수 없었다. 나중에 풍수를 취미로 하는 이들이 내가 살던 그 집을 괴택의 한 예로 들러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반생을 ‘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만주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온 가족이 지고 이고 한반도의 곳곳을 돌아다녔고 자라서는 곰곰이 따져보니 거의 일년에 한번씩 옮겨다녔다. 결혼도 두번이나 실패를 했고 망명에다 징역까지 겹쳤으니 역마살은 내 팔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 된다. 내 스스로 지은 집을 갖기가 소원이어서 중년기부터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도 집의 평면도를 그려보곤 하였다. 감옥의 오년 동안 내가 법무부 노트에 그려놓은 이런 집 저런 집의 평면도만 하여도 거의 한권이 될 지경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무하유향’은 아니고 그냥 범상한 ‘동네’였을 것이다.

내가 망명과 투옥의 십년 동안에 죽음과 똑같은 형태의 ‘떠남’을 겪어 보면서 스스로 체득하게 된 것이 있다면 ‘평상심’이다. 평상심은 가장 편안한 부동심(不動心)이 되니까. 감옥에서 나올 무렵에 주위의 친지들이 이런저런 별호를 지어주었으나 나는 스스로 연산(然山)이라 마음먹기로 했다. 그저 그런 산이란 뜻이리라. 이것은 공주교도소 5동의 맨 구석 독방의 창 너머로 언제나 가까이 내다뵈던 우리네 산천 어디에나 있는 그런 흔한 야산이다.

일이 주어지면 열심히 하고 아니면 손을 놓고 쉰다. 그리고 내가 살았던 시대와 더불어 소멸해 가리라.

“그래도 나는 행복하였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한 끝없는 고뇌와 번민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

이 제안한 ‘나의 유언장’ 쓰기에 응하기는 했으나 나는 이 글을 쓰기까지 몇날을 서성대야 했습니다. ‘유언장’을 쓰겠다고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1시간이 넘도록 한줄도 꺼내지 못하고 일어서기를 몇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이제 살날이 적게 된 나이에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 망치치듯하며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선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간헐적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던 저였습니다.

그러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들어서고 또 손자도 보고 하면서는 주위 사람들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경우 “오랜 번민 끝에 이제 나는 죽음을 차분히 맞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60이 된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막상 ‘유언장’을 쓰려고 하니 생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하게 치밀어올라 죽음 준비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헝클어지는 생각을 가까스로 가다듬어 가끔씩 내가 읊조려온 “인생은 죽음에로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죽음맞이를 합니다.

목타는 갈증을 억누르며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사막의 낙타꾼처럼 ‘인간의 오아시스’를 그리며 달려온 나의 삶이었습니다.

그 그리움이 있었기에 설움과 눈물의 날들을 이겨낼 수 있었고 “그래도 나는 행복하였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망과 희망, 좌절과 도전, 분노와 환희가 시계바늘 돌듯 이어진 내 생에서 만난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길 말은 감사와 희망의 인사입니다. 미움도 아쉬움도 떨쳐버리고 떠나는 인사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온몸을 던지며 외쳐대던 꿈과 희망,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내 죽은 이후 언젠가는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갑니다.

내 피 속에는 평등세상을 꿈꾸며 지리산 자락을 누비고 다니다가 숨져간 내 아버지의 피가 이어져 흘렀습니다. 그랬기에 독재권력의 나팔수 언론의 기자노릇하던 내가 언론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진보정치운동의 길에 뛰어들어 내 생애를 바칠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내 몸 속의 이 피가 내 아들, 딸, 손자들에게도 이어져 그들이 ‘더불어 사는 삶’을 갈망하기를 바랍니다.

내 아내는 재벌의 무남독녀로,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를 만나 결혼에서부터 힘든 길만 계속 걸어왔습니다. 그가 나와 결혼한 것은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깨달음에서였다는 것을, 그는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내의 길은 참으로 고달픈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이 길을 꿋꿋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잘 걸어왔습니다. 이런 아내에게 감사하고 이같은 아내의 생활태도와 정신이 내 핏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나는 동지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 민주노동당을 만들어 일하는 사람이 이 사회의 주체로 우뚝 서 가슴펴고 사는 세상을 갈망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꿈과 희망이 이뤄질 것을 믿는 나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지만 그보다는 생전에 보게 되면 더더욱 행복할 겁니다.

통일된 한국도 보고 싶지만 분단상황에서 죽더라도 통일을 안고 갑니다. 고뇌와 번민으로 점철된 나의 생이었지만 나는 정말 복많은 삶을 가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몸을 거두며 감사드립니다.

존재의 슬픔을 놓으며…
모진 원칙에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김형태/ 변호사

O형, 눈덮인 북한산 문수봉에 둥근 달이 걸렸습니다. 산도 달도 말이 없습니다. 수십년을 지껄여댄 말이면 너무도 충분합니다. 한번 일어났다 이제 흩어져야 하는 구름 신세에 또 무슨 마지막 말이 필요할 것입니까. 주절주절, 이 마지막 말은 아직도 ‘나’를 놓지 못하고 해대는 구차스런 변명일 뿐입니다. 저 산이며 달처럼 그저 조용히 갈 일입니다. 하지만 쌀이고 고기고, 어찌됐든 남의 목숨 먹어야 겨우 지탱되는 것이 이 ‘존재’ 자체의 가련함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도 이렇게 중얼거림을 불쌍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O형, 뒤돌아보면 이 짧은 인생에 청할 용서가 너무 많습니다. 검은색 골판지 표지에 묶은 누런 시험지에 선생님으로부터 색연필로 별을 그려 받던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그간 수도 없이 치러온 시험에서, 여러 모습의 경쟁에서 내발 아래 치인 친구들이 그 얼마입니까. 초등학교 2학년1학기 때 반장녀석은 잣대를 들고 책상 위로 뛰어다니며 아이들에게 군림했었지요. 그때 ‘정의의 사도’로 나선 덕에 2학기 선거에서 압도적 표차로 반장이 된 날, 나는 신발주머니 휘두르며 어머니께 승전보를 알리러 뛰어갔지요. 이제 돌아보면 나에게, 아이들에게 나쁜 반장으로 찍혀 투표에 진 그 친구가 느꼈을 좌절감과 슬픔 앞에서 마구 우쭐댔던 내 꼬락서니가 참으로 슬픕니다.

요 몇년 전에는 내가 몸담아온 이른바 인권운동판에서 한 후배를 모질게 대했고 파업유도 특검 때는 선배에게 그리했어요. 그 후배일로 인해 많은 내 이웃 식구들이 나에 대한 칭찬을 거두었고, 그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지만 한편, 사람들의 칭찬에 헤헤거리고 비난에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한수 배웠지요. 어찌됐든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그 후배 자신을 위해서 이제는 마음이 편해지기를 빌 뿐입니다.

파업을 유도했던 검사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그때 내 소신을 꼭 그런 모진 방법으로 표현해야 했는지. 원칙은 원칙이고 생각과 입장이 다른 이들에게도 웃음을 보내지 못한 것은 두고 후회가 됩니다.

O형,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는 ‘존재’ 자체로 고통받은 이는 누구보다도 내 가까이 있던 부모, 처자, 친구들이겠지요. 새벽 산보나가다 골목에서 마주친 술취한 아들의 정신없는 모습에 가슴 철렁했을 늙으신 아버지. 비틀거리며 어디 길 건너다 차에 치이지 않았을까 걱정으로 꼬박 밤을 새웠을 처에게는 몇생의 다른 삶을 통해서도 그 고통을 다 기워 갚지 못할 것입니다.

O형, 예수며 노자,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스승님들 따라 길 나선 지 오래, 이제 그 길의 끝에 섰습니다. 스승님 제자들의 숫자를 다 더하면 전 인구 수보다 많다는 이 땅이지만 저마다 살았을 제도 복받고 이승을 떠나서도 극락정토, 천당에서 이 ‘나’란 존재가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니 세상 조용할 날이 한시도 없습니다. ‘존재’에게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최대의 목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참 슬픈 일입니다. 수십년 전 어느 날 밤 어머니 아버지가 나눈 사랑으로 시작된 ‘나’도 이 존재의 한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으나 바야흐로 이제 그 슬픔의 문턱을 넘어설 때가 되었습니다. 본래 이 내 몸뚱이도 저 햇빛이며 곡식이며 물고기의 그것을 빼앗아 잠시 맡아가지고 있던 것이요, 이 주절거리는 생각이며 지식이란 것도 ‘내’것이랄 것이 어디 따로 없습니다. 모두 언젠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요, 과거에 누군가 했던 것들입니다.

이제 다 돌려주겠습니다. 이 내 몸은 흙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어 저 산의 밤나무를 키우고,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끼적대고 지껄였던 생각들은 이 밤 어느 침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 행위를 통해 태어날 어느 아이에게서 다시 재현될 겁니다. 이 한계의 슬픔에 묶여 지내던 존재 ‘나’가 사라지면 거기에는 천국도 지옥도 해탈도 없고 ‘더 큰 나’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O형, 엊그제 징그럽다고 눌러 죽인 바퀴벌레와 나의 위로를 바라던 친구며 여인들에게 내가 용서를 구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티없는 미소를 남기련다
헤어짐의 적막함보다는 따뜻한 기억 속으로 들어가며

홍세화/ 의 저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마침내 헤어질 때가 되었구나.

벌써 오래 전부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죽어가는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던 때부터 마음 준비를 해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끊임없이 반성하되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는 실존적인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일까, 죽음은 나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다만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다정한 얼굴들과 헤어지는 것이, 해와 바람과 파도와 달과 헤어지는 것이 하염없이 쓸쓸하고 적막할 뿐이다.

나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아. 내 삶 속에 들어온 이후 너희들은 나의 삶을 마냥 풍부하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 너희들과 너희들 어머니의 존재는 나에게 기쁨이며 즐거움이며 위안이었다. 이 글을 쓰려니 태어날 때부터 클 때까지 너희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구나. 지금껏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준 너희들에 비해 나는 너희들에게 무엇을 남겨주었을까?

범상치 못한 운명의 덫으로 한국과 프랑스라는 이중의 문화적 정체성을 일생 동안 숙명처럼 안고 살게 만들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 너희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인지, 아니면 혼란의 어려움을 계속 안겨줄 것인지 너희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험당할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 너희들의 이중의 정체성에 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렇지만 그것은 너희들이 나의 죽음을 한국적인 정서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 아니란다. 한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그 어디서든 인간의 죽음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죽음이란, 불가의 말씀처럼 우리가 옷을 잠깐 입었다가 벗 듯이 우리의 영혼이 잠깐 빌려 입었던 몸을 떠남이며, 먼지에서 먼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그래서 ‘죽는다’는 말을 ‘돌아가시다’라고 높혀 말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대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할 일도 아니며, 눈물흘릴 일도 아니며 또 여기저기 소문낼 일도 아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 나의 주검 앞에서 지난 추억을 잠깐 되돌아보는 조촐하고 조용한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죽음을 앞두고 나에게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너희들의 기억 속에- 또 나를 아는 모든 분들의 기억 속에- 천진난만한 소년의 티없는 미소를 짓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이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서로 연대하며 어울려 살기를 바라던 한 인간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단 몇 사람이라도 그런 기억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눈을 감은 뒤에도 마냥 기쁠 것 같구나. 그런 기억들에 비하면 외로이 자리잡은 분묘나 묘석은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죽음이란 쓸쓸하고 적막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렇게 남고 싶지 않은 내 뜻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나의 주검은 반드시 화장할 것이며 타고 남은 재는 아름다운 기억들을 위해 한반도 땅에 뿌려주길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따스한 모습으로 오롯이 자리잡고 싶지 차가운 땅 속에 자리잡고 싶지 않은 것이란다.

약한 이웃 곁에 있으렴
자녀에게 전하고 싶은 아빠의 바람

정범구/ 국회의원 bgjong@hotmail.com

사랑하는 딸 한이에게.

의 부탁이긴 하였지만 막상 유언장을 쓴다고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 오는구나. 문득 뒤돌아보니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아졌다.

따져보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것 같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된다면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게 될까? 내가 벌여놓은 많은 일들, 나만이 알 수 있고 해결해야 하는 많은 일들은 어떻게 될까? 어떤 일들은 영원히 묻혀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일들은 남겨진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텐데 그러자면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새삼 하루하루를 늘 정리하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머물렀던 자리가 지저분하지 않고 정갈하게 남아 있다면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아 있는 사람에게나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니?

평소에 내가 너와 한길이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 이것 기억하고 있니? 자신의 쓰레기는 자신이 치워야 한다는 것.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들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까지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는 것이지.

빈한한 집에서 태어난 나와 상대적으로 가난이란 것을 모르고 커온 너희들과의 사이에 갈등도 많았다. 입만 열면 어렵게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강조하던 아빠 때문에 너희들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한 환경 속에서 커왔던 너희들 세대에 대해서는 불만이라기보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궁핍을 모르기 때문에 절제를 모르고 시련을 겪지 않았기에 고난에 대한 면역성이 약해보이는 너희들 세대가 과연 이 험난한 시대를 어떻게 헤쳐갈 것인지 걱정스러워진다. 또 입시기관으로 전락한 학교교육을 통해 이웃과의 협동이나 연대보다는 경쟁을 주로 배운 너희들이 너희들보다 약한 이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도 대단히 염려가 된다.

나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흔히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평생을 모은 재산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나 철학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부터 돈버는 재주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니 너희들도 나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을 생각은 안 하리라 생각한다. 너희가 성년이 되도록 교육시킨 것은 너희들 스스로 밥벌어먹을 능력을 위해 투자한 것이니 이제 너희들 밥은 너희들 스스로 벌어먹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스스로 두발로 서기 위해 너희들은 지금보다 훨씬 강인하고 자기 자신에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너희들에게 세상사는 법을 보여주겠다고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나의 이런 노력이 얼마만큼이나 너희들에게 전달됐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너희들이 세상살면서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아빠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크게 실패한 것은 아닐 것 같다.

한이야. 나의 유해는 이미 서약한 대로 화장해라. 그리고 나의 몸에서 아직 쓸 만한 장기가 남아 있다면 그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줘라.

왔다가 가는 자리에 어지러운 흔적이 없기를 바란다만 혹시 미처 다 치우지 못하고 가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해주기 바란다. 너그럽게.

내 죄를 용서하지 못한 죄
죽음 앞에서도 부끄러움으로 남는 기억들

이경자/ 소설가

어머니 아버지 두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 살다 간다. 돌아보면 잠깐 꾼 꿈이되, 다시 생각하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내 자취가 너무 길다. 오래도록 사는 게 무언지 몰라 헤맸다. 늘 어지럽고 막막해서 허우적거리느라 한번도 나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다.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마음 붙이지 못하고 그렇게 방황하는 것을 한 멋으로 알던 시절이 너무 길었다. 티없이 맑고 밝아야 할 소녀 시절, 오랜 우울의 함정에 빠져 지내며 ‘문학병’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저 푸른 청춘의 한때를 파괴적이고 절망적으로 탕진한 것. 나를 학대하는 게 무엇인지 오래도록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한번 죽으면 다 해결된다고 믿어 마구 방탕하게 살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단 한번도 내가 그 시절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제 속죄의 뜻으로 여기 고백한다.

그렇게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의 어느 한 군데에서 그만 어머니가 되고 말았다. 자식을 낳으면 내가 ‘다른 나’가 되리라 약은꾀를 부렸다. 그러나 나는 또다른 죄의 올무를 스스로 쓴 셈이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세상 어느 것도 존중할 수 없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좋은 어머니 바른 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했다. 자식을 다만 내 소유물로 여겨서 함부로 대했다. 내가 채우지 못한 욕심을 아이에게 대신하도록 강요하고 윽박지르고 그랬다. 그러면서 그것이 다 자식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다. 그것이 자식에게 상처가 되어 마침내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 여자, 어머니를 만들었다. 내 자식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건 바로 내 탓이며, 죽어서도 자손의 불행에 환생하는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내가 여자이면서 어머니를 멸시한 죄. 그것을 보고 배워 나를 멸시하는 딸들에게 원망을 품은 비열함의 죄. 그러나 더 큰 죄가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많은 글을 써서 사람들의 마음에 어지러운 티끌을 쌓이게 한 것. 분수를 모르는 욕망과 욕심으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선 것.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해결사 노릇한 것.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이 세상을 떠난다고 이 질기고 두꺼운 허물이 벗어질지. 너무도 많은 죄. 차마 죽음 앞에서도 부끄러워 지금 눈을 감을 수 없게 한다.

사랑하고 기뻐하라!
유년에서 노년까지 세대별로 전하고 싶은 말

김창완/ 가수

열살이 안 된 어린이들아!

이제 나무 이름과 새 이름, 풀·꽃 이름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이름을 외울 나이의 어린이들은 이 세상을 이렇게 봐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병아리’, ‘개나리’, ‘빵빵’, ‘엄마’, ‘아야’, ‘피자’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알아야 한다. 만약에 네가 네살이라면 내 자전거보다도 어리고 그때 산 자전거 신발보다도 늦게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네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너도 이름을 얻기 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던 것처럼 이름을 얻기 전의 나무와 이름을 얻기 전의 하늘, 이름을 얻기 전의 어둠과 밝음을 보아야 한다. 달팽이가 부르는 노래는 제목이 없다. 되도록 그런 노래를 불러라.

이제 스무살이 안 된 청소년들.

아! 그 주체할 수 없는 성을 어떻게 할까? 그래. 너희들은 죄인이다. 너희들은 지금 욕망에 대하여 배우고 있다. 그 청춘의 불로 태우지 못할 것이 없다. 용광로 같은 심장은 무쇠라도 녹인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너는 더 격리될 것이다. 너에게 세상은 미세한 균열도 허용되지 않는 격납고다. 하나 그 속에서 너의 불꽃이 꺼져서는 안 된다. 오! 귀한 세상의 빛, 청춘의 불꽃이여! 그 광휘에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들은 나르시스다. 고요한 물가나 거울을 멀리하라. 당신을 유혹하는 것은 당신 자신들이다. 스물몇, 당신들은 이제 사물에 이름을 붙일 만큼 지혜롭다. 그리고 당신들은 남들로부터 ‘님’이나 ‘씨’라는 호칭으로 불릴 것이다. 아직 서른이 안 된 당신들은 이율배반의 극치다. 모든 규율을 어기며 모든 규율 안에 산다. 당신들은 개울의 소용돌이다. 돌 틈에서 기회를 엿보다 특이점이 생기면 과감히 몸을 던진다. 유혹이 당신들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탈옥을 꿈꾸는 수인이다. 아! 아이러니여. 당신들의 위장술은 어쩌면 가장 교묘한 신의 화장술인지도 모른다.

서른 즈음 당신들은 세상에 아주 익숙하다.

이제 후각으로 날씨를 안다. 눈오는 냄새, 비오는 냄새, 기다림과 이별과 사랑의 냄새를 안다. 모든 인연의 중심에서 균사같이 인연이 또 피어난다. 아이가 입학할 때 당신은 느낄 것이다. 당신이 부모와 너무 닮았다는 것과 아이가 당신을 따라 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 또는 답답함. 세상에 익숙해지지만 못 가본 세상은 오히려 더 넓어진다. 킬리만자로는 더 멀어지고 파푸아뉴기니는 이제 자신의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수첩에는 필요없는 전화번호가 쌓여간다. 단 세개의 전화번호만 남기고 모두 지워라.

마흔 대 여섯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가장 교활하다. 대부분의 우화에서의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처음으로 허물을 벗고 싶다고 생각한다. 몇몇은 허물을 벗고 우화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화는 나비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장엄하지 않다. 그들의 우화는 고작 이혼이다. 그들이 갑자기 캐주얼을 입고 싶어하는 것은 아직 변태의 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쉰은 유치원생이다.

이들은 다시 정장을 하고 주말을 기다린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로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것은 없다. 당신이 처음 입은 양복이 체크무늬 양복이었다면 체크무늬 양복을, 처음 입은 한복이 감잎 물들인 색이면 그 빛의 한복을 다시 입으리라. 그들은 인생을 새로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종이는 바랬고 잉크의 색은 묽다.

예순, 비로소 차 맛을 즐긴다.

일흔살의 당신은 전화 벨소리만 듣고도 누구의 전화인지 안다.

여든살의 당신은 체온이 34.5도라고 느낀다. 가끔 가랑잎을 주우며 그게 더 따뜻하다고 느낀다. 이제 당신은 보이는 것보다 만져지는 것을 더 믿는다. 그래서 손주의 살을 만지길 좋아한다. 그들은 질색을 하지만….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사랑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삶은 고달프지만 아직 더 먹을 나이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비록 임종일지라도….

아, 심장이 아프다
영화와 관객 그리고 가족을 떠올리며

박철수/ 영화감독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감독님? 도대체 영화가 뭡니까?”

나는 대답했다.

“영화는 ‘의식의 영상기록’ 이다.”

의식의 영상기록? 정말 그럴까? 다시 생각해보자. 인간 박철수에게 영화는 무엇일까?… 나는 왜 영화감독이 되었지? ‘영화감독 박철수’ 아, 정말 어색한 어구군. 정말 어색하다.

사실 내 꿈은 영화감독이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이었다. 내가 영화감독이 된 것은 정말 우연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읽을 당신들만큼도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아, 그래, 소설은 좀 읽었다. 하지만 영화문법? 몰랐다.

그랬던 내가 왜 새롭다못해 이상하고 재미없는 문법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의 인생의 허기 때문이리라. 영화도 직업이다. 그것도 잘 만하면 괜찮은 직업이다. 물론 당신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다행히 내겐 약간의 재능이 있었고 젊을 때는 성실함도 있었던 것 같다.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이가 또 있을까

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많지 않은 명예와 부를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새 영화는 나의 인생의 수단이 되었다. 내 주위에 나의 허기를 채워줄 것은 언젠가부턴 영화밖에 남지 않았다. 새로운 영화, 하나 더 나아간 영화,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영화를 만들고 싶던 그 욕망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결국엔 나를 위한 영화들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여 너무 섭섭해하지 말거라. 그래도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이가 어디 또 있겠냐?

미안한 이들이 또 있다.

나의 후학들. 나와 잠시라도 순간을 같이했던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물론 그대들 모두 고유의 가치가 있다. 내가 행여나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더라도 노여워하지 말았길 빈다. 그건 그대들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분들….

나의 영화를 봐준 소수의 관객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만용으로 물들고 허기로 시작된 나의 영화…. 누가 보고 싶겠냐? 다시 한번 그대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아, 심장이 아프다. 아, 이 찢어질 듯한 아픔이여!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들에게….

할말이 없군.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나는 많은 여자의 애인은 될 수 있었지만 한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없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도 되지 못했다. 큰애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묻곤 했다. ‘이혼 언제 해?’ 언제 하냐고? …. 애초에 난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역마살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렇다고 한다면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아, 유산도 없는 아버지가 유언장을 쓴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

아, 다시 심장이 아프다. 이런,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만 써야겠군. 아직 쓸 말이 남았는데…. 저 주사는 너무 아프다. 저런 것을 굳이 쓰지 않아도 나는 이미 충분히 아프단 말이다!! 근데 왜 심장이 아픈데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 것일까? 그래도 다행히 이 간호사 아이는 예뻐서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겠다.

내일? 글쎄 내일쯤은 저 하늘로 올라가지 않을까? 하긴 그곳에 간들 뭐 달라지랴?

그곳에 가면 나의 허기를 채워줄 또다른 것을 찾아봐야겠다. 영화는 아마 없지 않을까? 이젠 자연을 닮은 대체문명쪽에 관심을 가져볼까 한다.

“나누는 연습을 하거라”
스스로의 행복을 발견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

박영숙/ (사)한국수양부모협회장

아들아, 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내 일생의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가지고 간다. 네 일생에서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이 가장 길고 소중했으면 좋겠구나. 한평생을 돌아보니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으므로 후회 없는 뿌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오는 길에 수많은 장애와 고통이 따랐지만 그런 다양한 경험과 아픈 기억이 내 삶을 남들 것보다 조금 더 풍성하고 윤택하게 했으며 그런 곤고함이 내 삶을 큰 그림으로 그려주는 요소들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20대에 유학의 꿈을 꾸고는 스스로 열심히 저축하여 유학의 길에 올랐고, 넓은 세상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면서부터, 나는 부단히 나 자신을 키우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것이 바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는데, 접시닦이부터 식당허드렛일, 공장에서의 노동, 그리고 가장 가난한 유럽배낭 여행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걸면서 투쟁하고 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면서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봉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서구의 여성들이 그러하듯이 40이 되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남들과 나누고, 내가 가진 것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하여, 버려지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키우기 시작했단다. 사실 엄마보다 네가 더 많은 시간을 이 아이들에게 할애하여 장난치며 놀아주고, 엄마를 도와 집안일도 거들고 또 그들과 함께 싸우고 논쟁을 벌여 아이들에게 너의 뜻을 알리고 남을 이해하는 시간과 방법을 배우는 경험을 얻었다. 이 경험보다 더 값진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나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너 스스로 깨우치게 되리라 믿는다.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 소중하디 소중한 네가 수많은 동생들을 거느리면서, 그들과 나누게 되고 또 그들이 스스로 자아와 행복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은 바로 너 스스로 성숙하고 너 내면을 연구하는 기회였다. 아직도 많은 고통과 즐거움의 나날, 힘겨운 세상과 싸워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엄마는 눈물 흘리고 고통 받으면서 하나하나 세상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또 포기하고 절망하는 그 귀중한 경험을 너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생각에, 가진 것도 별로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유산으로 남겨주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너에게 뭉텅 나누어줌으로써 너 스스로 이루어가는 보람과 너 스스로 이룩한 어떤 것을 환희로 맞는 즐거움 즉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부모로서 아들에게 행하는 하나의 죄악이며 권리박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아빠는 엄마를 만나 이 세상 모래알 중에 가장 작은 모래알인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너와 엄마를 위해 수십년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양보해온 사람이다.

네 행복이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그리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항상 앞서가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딸 때문에 늘 가슴이 덜컹 내려앉곤 한 너의 외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보답하는 길이 너 스스로 세상에 태어남이 부끄럽지 않도록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너 스스로 행복이 무엇인지 목표를 정하는 데 있는데, 그 목표를 정하는 것도 쉽지는 않으리라. 책을 많이 읽고 어렵고 피눈물나는 고통과 시련이 따르는 힘겨운 일자리와 경험을 통해 네 스스로의 재능을 파악하고 계발해야 하는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맛있는 빵의 가치도 모르기 때문에 너는 스스로를 고행 속에 빠뜨려 나중에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것에서 행복을 찾아보도록 하여라. 그것이 바로 스스로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자질을 기르는 일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누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시도해보기 바란다. 어렵다고 포기하고, 더럽다고 피해서 가는 비겁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과 행동을 다 섭렵하고 네 스스로 이제는 자신의 부와 행복을 사회에 환원할 시기라도 정한 때에, 반드시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서 여생을 짜깁기하기 바란다. 내가 갖고 남는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은 의무이며, 나누는 일은 각고의 훈련과 교육을 통해서만 있게 되는데,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눔이 잉여가 아닌 의무라는 점을 알리고 부단히 나누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내가 하던 봉사활동이나 그보다도 더 시급한 사회적 현상을 발견하고, 네가 고칠 수 있고 도울 수 있으면 반드시 결행하기 바란다. 그래서 마지막 ‘삶이 스러지는 미소를 흘릴 때’ 그 누구에게도 한점 부끄럼 없고 후회없는 삶이었음을 보여주기 바란다.

나를 껴안고 너를 부르마
죽음마저 만인의 것으로 관리하려는 예술가의 투혼

임옥상/ 화가

너를 믿다가는 아무리 기다려도 결코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아 변칙인 줄 알면서도 내가 직접 이렇게 네 앞에 나섰다. 우리 미안한 얘기지만 먼저 너의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즉 내가 곧 너에 가까이 있음을 알린다. 아니 네 생이 바로 끝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얘기다. 너는 지금 할 일이 많다는 둥, 예술적 절정기라는 둥 자기 최면에 걸려 나를 너무나 헌신짝처럼 홀대하고 있다. 경고하는데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날뛰는 것은 거의 모두가 엉터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디 삶과 죽음이 하나인데 너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잊는다. 삶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기에 삶인 것이고 죽음 또한 삶을 예약하고 있기 때문에 삶인데 이것들을 잊고 있다. 그러니까 억지가 나온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너도 저 정상모리배 김모씨들처럼 되려고 그러느냐?

나의 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맞을 준비를 제대로 못할 것 같아 나의 직권으로 너의 죽음을 관리하겠다. 한 사람의 죽음은 삶이 그러하듯 만인의 것이다. 따라서 네가 남긴 모든 것은 모두 공공의 목적에 맞게 쓰일 것이다. 대부분의 환쟁이들이 그렇지만 너도 쓰레기를 너무 많이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당장 까뒤집어 정리하기가 어려워 나도 좀 정신도 차리고 쉴 겸 10년 뒤에나 보따리를 풀어볼까 한다. 그때 가면 차분히 이것저것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및 그 밖에 작품에 관련된 모든 것은 몇몇 분들이 공정한 과정을 거쳐 공공장소에 보관케 할 것이다. 10년 뒤 이것을 펼쳐놓고 만약 그때 가서도 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다면 역시 사회적 판단으로 사회에서 조치를 취하리라 본다.

나무(딸), 바다(아들)에게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으냐고?

아마도 빚 갚으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 점 아무 걱정없고 다만 네 그림 몇점씩을 기념으로 줄까 생각해 보았는데 이 또한 부질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기로 한다. 사회적으로 관리가 된다면 사적인 것은 곁다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자식들에게는 무엇인가 미련이 있는 모양인데 네가 평소에 한 말 ‘인생은 축적이니만큼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면 된다’는 그들도 모두 가슴에 담고 있으니 염려말라.

나무는 현실적이면서 영화에 재능이 있으니 되었고, 바다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비상한 재주가 있으니 곧 눈부신 변신을 할 것이니 안심해도 되고, 또 네가 사랑하는 여인 또한 제 몸 추스르니 걱정할 바 없고 오히려 내가 그의 덕을 많이 보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너의 몸뚱이가 문제인데 나는 무덤이나 납골당이나 이 모두에 유폐되어 있고 싶지 않으니 네가 평소 말한 대로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나머지는 화장할 것이다. 내가 다음 육신의 옷을 입을 수 있을 때까지 나도 좀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다.

나 너를 만나 매우 힘들었다. 물론 너도 험난한 시절을 만나 뭐 좀 해보겠다고 발버둥쳤다. 한 사람으로서 누구로부터도 독립적이고 또 누구와도 유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살려는 너의 삶의 태도는 나로서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남은 여생엔 더욱 나를 껴안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예술적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며 사람으로도 손색이 없게 될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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