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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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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여자관계에서 ‘기자 박치기’까지…

등록 2005-02-02 15:00 수정 2020-05-02 19:24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와 김재규쪽 변호사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독재자’와 ‘영도자’ 사이에 ‘인간 박정희’가 있다. 그의 정치적 행위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극단적 평가를 내리듯,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그의 독재에 맞섰던 사람들은 “교활하고 야비한 냉혈한”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미 넘치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진정한 영웅”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과연 ‘인간 박정희’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여성편력으로 자식들에게 약점 잡혀

‘인간 박정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중 가장 입길에 오르는 것은 그의 여자관계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두 여인의 술시중을 받았던 사실이 말해주듯, 말년에 그의 여자관계에 대한 추문은 사그라지는 권력과는 정반대로 무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여러 ‘사실’과 ‘추측’이 뒤섞여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박정희가 유신 말기 무렵 여성을 동반한 술자리를 자주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증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이다. 10·26 재판 녹취록(<대통령의 밤과 여자> 김재홍, 1994년 발간)에 따르면 1979년 12월11일 열린 10·26 사건 1심 재판(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박 과장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의 ‘안가’(안전가옥) 담당 직원들 사이에서 “대통령만 참석한 행사는 소행사,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참석하면 대행사라는 용어를 쓴다”는 등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한 증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과장은 10·26 현장에 있었던 두 여인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기 직전에 김 부장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 박 과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지난 1월27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과장이 여인들에 대한 질문에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 김 부장이 ‘야, 애기하지 마’라고 뒤에서 가볍게 소리쳤다”며 “그러자 박 과장은 움찔하더니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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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 과장은 항소심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해 1심 때보다 상세한 진술을 한 것이다.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박 과장은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는 좀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각하께서 평균 한달에 열번 (궁정동 안가에) 나오셨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온전하게 끝나지 못했다. 법무사(당시 군사법정의 판사)가 “재판과 관계없는 내용”이라며 그의 진술을 제지하고 나섰다.

당시 변호인단은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을 주요 변론 전략 중의 하나로 삼았다. 강 변호사는 “접견 때마다 김 부장에게 여자관계를 물었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며 “이른바 ‘채홍사’ 구실을 한 박선호 과장도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변호인들은 피고인 접견을 통해 ‘여인’들의 이름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 변호사가 접견(1980년 1월15일) 내용을 기록한 노트에는 ‘여자 연예인 100명’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신인급에 속한 유명 여자 탤런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강 변호사는 “김 부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겨우 ‘한 100명쯤 된다’는 얘기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신 말기 무렵 박정희의 여성 편력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많다. 그 내용도 ‘로맨스’부터 추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 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가 문제가 됐었다. 주변에서 박 대통령을 재혼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근혜와 구국여성봉사단의 잡음

이런 ‘약점’은 박 대통령이 근혜씨와 지만씨를 둘러싼 ‘잡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원인이 됐다. 근혜씨는 당시 최태민 목사(사망)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총재를 맡은 최 목사가 각종 비리에 연루돼 큰 문제가 됐다. 그러나 근혜씨가 관여한 단체라는 이유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김 부장이 재판 당시 제출한 ‘항소이유 보충서’에는 당시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김 부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건의에 따라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한 뒤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근혜씨를 불러 직접 ‘친국’을 한 뒤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파악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여성·종교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한수씨는 “구국여성봉사단은 당시 굉장한 조직이었다. 사실상 퍼스트레이디인 근혜씨가 관여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모였다”며 “근혜씨 때문에 청와대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제기한 비서관은 사표를 써야 했다”고 회상했다.

최 목사는 5공화국 출범 직후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풀려났다. <한겨레21>은 최 목사의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8월 국가기록원에 수사기록 공개를 요청했으나, 국가기록원은 “보존 기간이 지난 문서로 현재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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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은 지만씨 문제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장은 항소이유서에서 “지만군은 2학년 때부터 육사 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 박 대통령에게 육사의 명예나 본인의 장래를 위해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한수씨는 “지만씨 문제는 (청와대에서) 당시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 만연된 일종의 낭만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추종자들과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돼 있다. 그를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지난 1971년 프로권투 헤비급 타이틀전 무하마드 알리-존 프레이저 경기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좋은 사례로 든다. 세계 권투사에 길이 남은 두 선수의 격돌은 당시 국내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끌었는데, 국내 시각으로 한낮에 벌어진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박 대통령은 갑작스레 청와대 기자단과의 점심을 제안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기자실에서 자연스럽게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공무원은 근무 규정상 일과시간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규정도 지키고 경기도 보기 위해 짜낸 묘안이었던 셈이다.

70년대 중반까지는 검소한 식생활

박 대통령은 점심을 먹은 뒤 기자실에 돌아와 경기를 함께 보면서 승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제안했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유명세에서 앞선 알리에 돈을 걸었지만 박 대통령은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결과는 박 대통령의 ‘독식’이었다. 프레이저는 15라운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따냈다. 그러나 기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프레이저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었다. 기자들은 박 대통령이 3천원의 ‘상금’을 기자실에 놓고 갈 줄로 예상했으나, 그는 자신의 낡은 지갑을 꺼내 이 돈을 고스란히 집어넣고는 유유히 기자실을 빠져나갔다. 당시 ‘일개’ 국장급에 불과한 공무원들이 기자들을 상대로 ‘접대 고스톱’을 치거나 수시로 촌지를 건네던 관행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박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자주 나눴다. 1974년 육영수씨가 죽기 전까지는 한달에 한 차례 정도 출입기자들과 식사 모임을 했다. 이는 언론 관리와 정보 수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었다. 기자들은 중정 등 박 대통령의 정보 라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짭짤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정보장교 출신답게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할 줄 알았다. 박 대통령은 기자뿐 아니라 대학교수 등 민간인들과 비공식적 모임을 많이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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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이런 모임에서 얻은 정보를 고위 공직자를 ‘관리’하는 데 자주 활용했다. 지난 1971년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물어 경질한 정래혁 당시 국방부 장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국방부와 청와대를 동시에 출입하던 한 기자로부터 취재 내용을 자세히 ‘보고’받은 뒤 정 장관의 경질을 결정했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이후락 중정부장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그의 인척이 마포서장으로 있으면서 폭행 사건을 일으켰는데, 피해자의 투서를 본 육 여사의 건의로 박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지시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마포서장을 파면했다”며 “공직자의 비리를 엄격하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장애인 복지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설립이 불가능했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증언이다. 황연대(67)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은 “당시 정부 관료들에게 장애인 복지 얘기를 꺼내면 ‘성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장애인 복지냐’며 면박을 주던 때였다”며 “청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립회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걸리가 시바스리갈로 바뀌기까지…

장애인 복지사업에 대한 청와대의 지원은 영부인의 각별한 관심에서 나왔다. 육 여사 집안에는 소아마비를 앓던 친조카 3명이 있었다. 황 부회장은 “1965년 육 여사의 초청으로 소아마비 어린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육 여사가 자신의 조카 얘기를 꺼냈다”며 “그때는 소아마비 자식을 둔 고위층 인사들이 그런 사실을 숨기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육 여사는 황 부회장에게 20만원을 건넸고 황 부회장은 이 돈으로 정립회관 터를 계약할 수 있었다.

육 여사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립회관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황 부회장은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청와대는 1967년 걸스카우트회관 건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영화관 입장료의 일부를 떼어내 모아둔 돈을 정립회관 건립에 사용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걸스카우트 총재를 맡고 있던 육 여사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육 여사가 사망한 뒤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도왔다. 1974년 12월 박 대통령은 공사 중단 위기를 맞은 정립회관을 위해 2억원의 ‘하사금’을 내렸는데, 이 돈은 당시 공식적인 대통령 하사금 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1975년 정립회관 개관식 행사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씨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 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갔던 것이다.



“다양한 직업여성 100여명 보유”

[인터뷰 | 전 중앙정보부 안가 관리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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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의 무대였던 궁정동 안가(안전가옥)는 어떤 곳일까. 안가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박선호 과장은 이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궁정동 안가에 대해 설명을 하려다 법무사의 제지를 받았다.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서울에는 궁정동 말고도 5∼6곳의 안가가 더 있다는 것’과 ‘대통령만 이용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당시 안가에서 대통령이 모임을 여는 사실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만 아는 1급 비밀이었다. 안가 관리를 책임진 의전과장은 중정에서 잘나가는 요직에 속했다. 대통령의 사생활을 다루는 업무의 특성상 승진이 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가는 YS 정권 때 모두 헐렸는데,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21>은 수소문 끝에 70년대 한때 한 안가에서 근무했던 전 중앙정보부 직원을 찾아내 어렵사리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안가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원래는 대통령 경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 술자리를 하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곳이다. 10·26 사건으로 여성이 접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안가의 운영 목적이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다. 외국에서도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안가를 운영하면서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청와대 경호실이 아니고 왜 중정에서 직접 관리했나.

경호실은 군처럼 경직된 조직이어서 안가 관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통령도 딱딱한 분위기에서 술자리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 중정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공식적인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함으로써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주변 권력의 분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대통령은 안가를 돌아가면서 이용했나.

10·26이 난 궁정동이 가깝고 규모가 커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머지 안가 가운데는 아예 가지 않은 곳도 있다.
연회 접대 여성은 어떻게 준비하나.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처럼 여자들을 합숙시키는 곳은 없었다.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들을 활용했다. ‘손이 컸던’ 마담 2명 정도가 주거래처였는데 그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100여명씩 보유하고 있었다. 마담들이 추천하면 중정 직원이 ‘면접’을 봤고 외모와 경력 등을 따져본 뒤 입이 무거울 것으로 보이는 여성 위주로 선택해 수발을 들게 했다.
연회 원칙 같은 것은 없었나.

술과 음식은 경호실에서 선택하고 준비까지 책임진다. 안가에는 조리시설이 있었지만 모든 음식 재료는 경호실에서 준비해온다.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
안가에서 대통령은 주로 누구를 만났나.

무척 다양해 특정할 수 없다. 수출을 많이 했거나 해외에서 큰 공사를 수주한 기업인을 불러 격려하기도 했고,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학자 등을 불러 얘기를 듣기도 했다. 고인이 된 한 그룹 총수와 자주 접촉했는데, 그 총수는 대통령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지원을 부탁해 기업을 눈부시게 키워나갔다.
안가 관리자들의 근무 형태는 어떠했나.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 청소를 비롯한 관리 상태는 항상 최상을 유지해야 했다.




내 얼굴이 왜 새까만 줄 아쇼?

[인터뷰 | ‘청와대 출입’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현재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박 대통령이 여러 과오를 저지르긴 했지만 빈곤 문제를 해결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다.
그가 기억하는 박 대통령은 매우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한번은 기자들에게 ‘내 얼굴이 왜 새까만 줄 아쇼?’라고 묻는 거예요. 다들 ‘모른다’고 했더니 씩 웃으시더군.” 박 대통령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조카와 출생연도가 같다. 그의 어머니가 큰형수와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한 것이다. “박 대통령 대답이 이래요. 어머니가 창피해서 자기를 지우려고 간장을 많이 드셨다고. 그래서 자기 얼굴이 새까맣게 됐대요. 그 얘기를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라구.”
박 대통령의 소탈한 성격은 그를 비난하던 기자들도 ‘박정희 장학생’으로 변신하게 했다고 한다. “사석에서 박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했던 동료 기자가 청와대를 출입해서 박 대통령과 딱 3번 같이 식사하더니 그냥 박정희 팬이 돼버렸어. 당시 청와대를 거쳐간 기자들 중 나중에 유정회(박 대통령이 유신을 단행한 뒤 직접 임명한 국회의원) 의원이 된 기자가 7∼8명가량 됩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이 친일이나 엽색 논란으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배꼽 아래 얘기는 하지 말라’는 얘기가 돌 땝니다. 특히 군인 사회에서는 그런 문화가 심했죠. 박 대통령도 그런 문화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지금 잣대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당시에는 불륜은 문제가 됐지만 ‘로맨스’는 용납되던 때였어요.” “친일 논란도 마찬가지죠. 한-일 합방 이후에 태어난 사람에게 독립운동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겁니다. 물론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크게 대우해줘야 하지만. 박 대통령이 만주군 장교로 가게 된 것도 돈이 없어서 그런 건데, 1943년에 임관해서 45년에 중위가 됐어요. 해방되던 해 비로소 장교가 된 겁니다. 40년 이후에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왜곡된 겁니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박정희 지시”

[인터뷰 | 제임스 시노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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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시노트(75·미국) 신부는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 집행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75년 3월 국제앰네스티 관계자들과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 등 미 의회 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JP(김종필씨 애칭)는 앰네스티 관계자 등에게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결코 사형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간 지 8일 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프레이저 의원 말로는 JP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죠. 당시 JP의 말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박정희밖에 없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구명을 위해 박 정권에 대항하다 75년 12월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1960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정치적 혼란이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에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환영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인 신부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박정희가 3선 개헌을 강행하자 그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다면 민주화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군사정권이 장기 집권했던 칠레나 브라질은 지금 과거사 청산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왜 한국은 아직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나요?”




박정희와 정인숙, 그리고 정일권

[인터뷰 |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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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여자관계가 거론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정인숙 사건이다. 정씨는 1970년 자신의 오빠에게 피살됐는데(당시 정씨는 26살이었다), 그의 ‘연인’이 정일권(1994년 사망) 총리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됐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도 많다.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정인숙의 연인이 정 총리였다는 것을 당시 박 대통령 측근들이 퍼뜨리고 다녔다”며 “나도 당시 박정희의 한 측근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위원장은 “정 총리는 당시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난 상태였는데, 정인숙 사건을 계기로 다시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됐다”며 “세간에는 정 총리가 누명을 뒤집어쓰는 대가로 복권됐다는 얘기도 돌았다”고 말했다.
당시 정인숙의 아이는 박 정권과 유착관계에 있던 한 일본인 재력가에게 잠시 맡겨졌다가 외가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정씨의 오빠는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뒤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임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유신은 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인터뷰 |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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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박정희 집권 시절 <조선일보> 정치부 국회출입 기자와 정치부장을 했다. 최 전 대표는 1월26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시대에 대해 “가난 탈출 과정은 경이로웠지만, 유신은 절대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가 내걸었던 국가 재건은 지식인이나 언론인 사이에서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박정희에 대해 기자들의 평가는 어땠나.

우리는 참담한 가난의 기억을 가진 세대 아니냐. 인권 탄압한 것도 사실이고 쿠데타로 집권한 것도 사실이다. 정치나 관료 세계가 부패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이션 빌딩(국가 건설)의 시대였다. 왜 민주주의 제대로 하지 않나 하는 것보다는 가난 탈출 과정을 놀라운 눈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강했다.
개인적으로 본 박정희는.

집념이 대단해 보였다. 경부고속도로 절개면까지 직접 그린 사람이다. 밤잠도 안 자는 것 같았다. 경부고속도로 놓는다고 할 때 찬성자는 대한민국에서 딱 둘뿐이었다. 박정희하고 정주영. 장기영 부총리를 위시해서 온 국민이 반대했다. 당장 굶어죽는 사람이 천지인데 자가용 가진 사람 유람길 닦나 이랬다. DJ가 국회에서 4시간 동안 반대 연설을 했는데 명연설이었다. 결국 여당 의원들이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고속도로 밀어붙여 닦고 새마을운동 시작하더니 그 다음 단계로 공단, 항만 세우면서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더라. 일본에서 종자돈 얻어다 포철 세우고 길 닦고, 차관으로 공장 세워 온갖 물건 내다팔고, 경공업·중화학공업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은 경이로웠다. 그때부터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통치 방식을 평가하자면.

생각을 많이 하고 나라를 어떻게 하면 바꿀까 혼신을 쏟아붙는 스타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술하고 여자. 육 여사가 재떨이 던졌다는 얘기는 파다했다. 뒷세대 눈에는 괴물이나 독재자로 그려지겠지만 국가 발전 과정에는 그때만의 상황이 있다는 걸 그때의 시각으로도 봐야 균형이 잡힌다. 그런데 삼선개헌까지는 그렇다 쳐도, 유신은 그거 나라 조지는 거였다. 안 했어야 했다. 좋게 보면 내이션 빌딩 완수하려고 그랬겠지만 다르게 보면 독재자의 길로 스스로 둥둥 떠서 간 거라고 볼수 있다.
정치 환경은.

그 시절에 부패는 없었다고 하지만 흥청망청했던 건 맞다. 어느 정도였냐면 유력 정치인이 내게 친구들이랑 술 먹으라고 촌지 수표를 줬는데 엄청난 거액이었다. 그래서 이 양반이 잘못 준 건가 해서 다음날 돌려주러 갔더니, 지갑에서 그런 큰돈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고 있더라. 정치인들 돈 펑펑 쓰고 계보 만들고 그랬다.
10·26 사건 때는 어땠나.

죽을 사람 죽었다는 생각은 솔직히 없었다. 남북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박정희 혼자 원맨쇼 하면서 끌고 간 나라였는데 걱정이었다. 전두환이 국보위 만들어 나라 들어먹은 게 큰 굴절이었다. 10·26 직후 정부가 관리를 잘해서 민주주의 선거를 했어야 했다. 그걸 막아버린 게 국보위였다. 정말 큰 굴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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