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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방역본부

술꾼 인간을 관찰한 <술에 취한 세계사>

제1333호
2020.10.12
등록 : 2020-10-12 21:50 수정 : 2020-10-15 10:57
술에 취한 세계사 마크 포사이스 지음, 서정아 옮김, 미래의창 펴냄, 2019년

2019년 보건복지부 암예방 캠페인 포스터는 개그맨 이승윤이 모델이다. 얼마나 친근하고 재미있게 만들었는지 지나칠 때마다 감탄하며 본다. ‘채워지는 한잔 술에 비워지는 나의 건강’ ‘오늘 운동 30분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등등. 암예방 10대 수칙도 있다. 그중 넷째는 ‘하루 한두 잔의 소량 음주도 피해요’인데 이 항목이 목에 걸린다.

<술에 취한 세계사>는 제목이 탁월하다. 원서 제목은 ‘만취에 대한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Drunkenness)다. 지구 위 어느 땅에든 취한 사람이 있을 테니 세계가 취한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사는 이는 만취의 경험을 반추하고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취하고 싶은 사람이리라.

책은 인간이 술꾼으로 진화했다고 선언한다. 다윈마저 인간과 원숭이가 똑같은 방식으로 숙취에 대처하는 것을 보고 이 두 종이 친척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단다. 만취한 개코원숭이도 술 마신 다음 날엔 짜증을 부리고 시무룩해하며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가여운 표정을 짓는다. 아, 이걸 믿어야 하나. 고민스러워 책이 참고 문헌을 제시했는지 살펴봤다.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술을 마셨다. 그 근거로 저자는 기원전 2만5000년 ‘로셀의 비너스’를 제시한다. 풍만한 여성이 든 ‘뿔잔’에 누군가는 물이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물 먹는 것을 암석에 새기겠냐며 능청을 떤다. 인류 최초의 문자 쐐기문자(기원전 3000년께)로 새긴 노래 가사도 있다. “더없이 행복한 기분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네. 술을 마시니 기분이 너무 좋아. 몸 위아래가 두루 행복하다네.”

기원전 2000년께 수메르 푸아비 여왕의 원통형 도장에는 음료수(맥주)에 밀짚을 꽂고 마시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여러 개의 밀짚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즘처럼 각자 한 병씩 들고 마시는 게 아니라 여럿이서 나눠 마신 것으로 보인다. 맥주 마시기는 행복하고 공동체적인 일이었다는 저자의 해석에 끌려간다. 나일강의 만취 축제는 신과의 완전한 영적 교감을 위한 것이었다는데, 기원전 1300년께 네페르호테프 묘의 벽화에는 술에 취해 구토하는 여성의 모습이 있다. 신을 영접할 수 있는 새벽 해를 기다리며 구토하면서까지 술을 마신다는 걸까.

부유한 도시 로마의 연회 콘비비움은 체계가 잡힌 술자리다. 저자가 그린 삽화 콘비비움의 좌석 배치는 웃음을 자아낸다. 식탁을 중심으로 세 면에 누울 수 있는 소파가 제공되는데, 상석과 하석이 있다. 음식도 노예도 술도 자리에 따라 다르다.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 위해 콘비비움에 초대해 서열이 가장 낮은 자리에 앉히고 못 본 척하기도 했다니 술자리라기보다 권력 과시 모임이었다.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참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풍경에는 호라티우스의 시가 곁들여진다. “포도주가 흐르면 시가 흘러나오고 가난하고 지체 낮은 자가 자유로워진다.”

코로나19 중환자를 치료하는 우리 팀의 의사 수는 열 손가락에서 한참 모자란다. 진료팀 의사들은 묵묵히 바쁜 일과를 소화하고 있다. 혹 힘들 때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혼자 술, 집에서 술, 여럿이 술, 담배 찾아 삼만리, 홀로 드라이브라고 대답한다. 작가가 인용한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대체로 인간 본성은 정신이 맑을 때면 냉엄한 현실과 메마른 비판에 짓눌린다.”

마실 것 두 가지를 적정 비율로 섞어 숟가락으로 유리잔 바닥을 쿵 울리니 진동이 자잘한 거품을 일군다. 어느 놈이 꼴 보기 싫다, 그 사람 두고 볼 테다 화난 소리는 웃음과 섞이고 속이 후련해졌다. 한두 잔 술이 없어지기는 요원한 일이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