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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

버닝썬은 영화 같았다

‘강간 문화’를 조성하는 영화의 문제적 재현 방식 네 가지

제1258호
2019.04.17
등록 : 2019-04-17 10:54 수정 : 2019-04-26 14:00
버닝썬 홍보 사진
‘버닝썬 게이트’로 정준영의 불법 촬영물 유포 사건이 공개되자, 언론은 이들의 메신저에서 오간 대화를 앞다퉈 공개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메시지 사이에서 눈에 띈 짧은 문장이 있었다. ‘여성을 강간하자’는 정준영에게 단체대화방에 있었던 박아무개가 한 말이다.

“우리 이거 영화야.”

여성을 성폭행하는 일이 대체 뭐가 영화 같단 말인가. 이들에게 영화란 기대하지 않았던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콘텐츠쯤으로 보인다. 이렇게 실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영화라는 말로 낭만화되고, 남성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공유된다. 영화 같은 창작물이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왜곡된 성 의식의 배경에는 현실의 ‘강간 문화’가 있다.

리베카 솔닛은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강간 문화를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1970년 미국 뉴욕의 페미니스트들이 ‘강간 피해 공개 발언’을 최초로 하며 처음 짚어낸 개념인 ‘강간 문화’는, 이후 미디어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강간을 조장하는 사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되었다.

영화들이 최소한의 성평등 의식을 보여주는지 확인하기 위해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처럼 이제는 강간 문화를 조성하는 영화에 명확한 기준을 두고 제재해야 한다. 벡델 테스트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에 남자와 관련되지 않은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세 기준을 두고 영화 속 젠더 개념을 판단한다. 이 글에서는 강간 문화를 조성하는 영화의 문제적 재현 방식을 네 기준으로 나눴다.

영화 <내부자들> 화면 갈무리

1. 이야기 진행을 위해 여성이 소비되는가

한국 영화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힘을 부각하기 위해 곧잘 여성을 ‘부리는’ 장면을 넣는다. 여자를 함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성공한 남자의 증표인 것처럼 말이다. 명망가의 성공과 타락을 그린 사회물에서 여성과의 섹스가 빠진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영화 <내부자들>에는 권력가들이 룸살롱에서 여성을 고르는 장면이 나온다. 비리를 일삼은 정치인과 언론인의 결탁을 비난하는 영화이기에, 누군가는 이 장면이 이들의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쓰인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이 장면을 스크린에 펼쳐놓는 이유는, 권력을 쥔 남성이 당연하게 성취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성의 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을 얼마나 변태적으로 쟁취하느냐에 따라 남성의 권력이 올라가기에, 영화는 더욱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장면을 재현한다.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서 출소한 조현수(임시완)에게 한재호(설경구)는 ‘햄버거 대신’ 챙겨줄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윽고 장면은 달리는 빨간색 스포츠카 위에서 조현수가 백인 여성과 뒹굴고 있는 모습으로 바뀐다. 조현수가 한재호의 라인을 타고 ‘잘나갈 것’이라는 점을 이 장면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한때 “살아 있네”라는 대사로 대한민국을 강타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이 대사가 언급된 대목은 조폭 두목 최형배(하정우)가 여성의 가슴을 갑작스레 만지는 장면에서다. 여성에게 성폭행을 함으로써 남성의 기가 산다는 경악스러운 인식은 곧 유행어가 되었다.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드러낼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성을 향한 성폭력과 룸살롱 장면은 비판이 아닌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진부하기까지 한 이 장면들은 현실을 비판하기는커녕 미화한다.

(위부터) 영화 <더 킹> <핸드폰> <베테랑>. 영화사 제공. 영화 화면 갈무리

2. 성폭력 범죄에서 여성 피해자를 배제하는가

지금까지 많은 한국 영화가 여성 피해자의 존재를 배제한 채 성폭력을 재현해왔다. 영화에서 성폭력은 남성들이 각성해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나, 남성 악당의 성격을 더 추악하게 묘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유아인)는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자라온 인물이다.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하청업체 직원에게 모멸감을 안기고, 주변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린다. 이런 성격을 관객에게 알리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장치는 너무나 뻔하다. 바로 그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을 넣는 것이다. 조태오는 파티에서 사람들을 앉혀놓고, 경찰이 보는 앞에서 여성의 가슴에 얼음을 집어넣으며 희롱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다. 형사 서도철(황정민)을 비롯한 모든 인물은 조태오의 성폭력을 보고도 묵인한다. 영화에는 여성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영화가 주목한 것은 유아인 일당이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여성들에게 자행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성폭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조태오를 처단할 명분은 성폭력에서 오지 않는다. 그 명분은 그가 남성 하청 직원에게 폭력을 가한 뒤에야 완성된다.

영화 <더 킹>도 비슷하다. 주인공 박태수(조인성)는 성폭행을 저지른 체육교사를 조사하던 중 그가 부장검사 한강식(정우성)의 라인임을 알게 된다. 박태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선배 검사는 체육교사 사건만 덮으면 한강식 라인에 들어올 수 있다며 그에게 유명 여배우의 성접대 비디오를 보여준다. 박태수는 자신도 이처럼 놀고 싶다는 권력욕에 취해 사건을 덮어버린다. 극 후반 한강식과 선배 검사들이 단죄될 때 이 비디오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조차 떠오르지 않은 채 조폭과 연루됐다는 죄목만으로 처벌받을 뿐이다.

이들 영화에서 성폭력은 그 자체로 단죄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남성들이 ‘나쁜 놈’을 정죄할 때 어부지리로 같이 혼내주는 가벼운 ‘몹쓸 짓’ 정도로만 표현된다. 이는 오롯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시선만을 반영한 것이며, 여성 피해자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한다.

3. 2차 가해를 정당화하는가

정준영 무리가 메신저에서 불법 촬영물을 주고받으며 낄낄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대중은 경악했다. 동시에 궁금해했다. 사건이 밝혀진 직후 한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던 단어가 이 사실을 방증한다. ‘정준영 동영상’. 정준영 무리가 주고받은 불법 촬영물은 대중에게 범죄의 증거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낱 관음의 대상이 됐다. 2차 가해는 이처럼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시작됐다.

2009년 개봉한 영화 <핸드폰>에서도 불법 촬영물이 등장한다. 성공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매니저 오승민(엄태웅)에게 억대 CF 계약을 목전에 둔 배우 윤진아(이세나)는 희망이다. 그러던 중 승민의 핸드폰에 진아의 성관계 동영상이 전송되고, 승민은 진아의 남자친구로부터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까지 받는다. 분노한 승민이 그를 추적하며 영화는 진행된다. 그런데 어딘지 이상하다. 영화에서 불법 촬영물 유포로 피해받은 당사자는 진아다. 그러나 영화는 진아의 목소리를 온데간데없이 지워버린 채 2차 가해 상황까지 서슴없이 보여준다. 모니터 앞에 삼삼오오 모여 해당 불법 촬영물을 보는 남학생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연신 “뭐야 이거, 대박!” “야, USB! USB!”를 외친다. 이들의 모습 위로 ‘정준영 동영상’ ‘정준영 동영상 걸그룹’ 따위를 검색했을 수많은 손가락이 겹친다.

너무 옛날 영화라서 그럴까. 그로부터 약 10년이 흘러 개봉한 영화 <상류사회>를 보자. <상류사회>의 주인공인 오수연(수애)은 자신의 불륜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빌미로 협박받는다. 동영상이 불법적으로 찍혔다는 사실과 ‘가해자 처벌’은 그 사이에서 잊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더욱 가관이다. “저를 붙잡고 있는 것은 저를 협박한 그들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피해자 스스로 자신이 찍힌 불법 촬영물을 대중 앞에 전시하며 하는 말이다. 불법 촬영물 범죄 피해자가 자기 입으로 ‘욕망’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2차 가해란 가해자의 존재를 지우고 피해자의 존재를 부각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성폭력 사건을 가십으로 치부하고, 피해자를 특정해 수치심을 지우며, 범죄 증거물을 유희의 용도로 소비하는 모든 행위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버젓이 자행됐다. 한국 영화에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답습하며 피해자를 다시 한번 가해하는 끔찍한 장면이 너무도 많다.

영화 <건축학개론>. 영화 화면 갈무리

4. 강간을 강간이 아니라고 하는가

상대의 동의 없이 일어나는 모든 성관계는 강간이다. 지극히 단순한 이 논리를 자꾸만 어렵게 하는 것은 강간이 강간이 아니라는 문화를 계속 재생산하는 매체들이다. 수많은 영화가 성폭력 장면에 로맨스의 탈을 씌우거나, 우스갯소리로 넘겨버리는 방식 등으로 교묘하게 강간 문화를 고착해왔다. 강간 문화를 로맨스로 포장한 사례로 가장 유명한 것이 영화 <건축학개론>이다.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술 취한 여성이 성폭력 상황에 자연스럽게 노출됨과 동시에, ‘쌍년’이라고 불리는 이 믿지 못할 장면은 첫사랑의 향수 사이에서 완벽히 지워진다.

1천만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던 영화 <검사외전>에는 꽃미남 사기꾼 한치원(강동원)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지구당 경리(신혜선)와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짜고짜 바지를 벗으며 섹스를 시도하는 치원을 밀어내며 “잠깐만요!”라고 외친다. 경리의 표정에는 당혹감과 두려움이 떠올라 있고, 그녀는 다가오는 치원의 가슴께를 두 손으로 밀어낸다. 이렇게 명백한 ‘노’(No) 장면에 치원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키스한다. 그리고 장면은 두 사람이 함께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전환된다.

이 명백한 성폭력 장면의 이후 행보는 더욱 기가 막힌다. 경리 역을 한 배우 신혜선에게는 ‘강동원 키스녀’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이 붙었고, 방송에서는 “강동원과 키스하니 어땠냐” “부럽다” 등의 이야기를 남발했다. 신혜선을 취재한 기사의 제목에는 어김없이 ‘키스녀’라는 명칭이 따라붙었다.

<건축학개론>과 <검사외전>은 각각 12세,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이는 젠더 가치관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은 연령대의 아이들에게 노출돼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 술에 취한 여성을 집에 데려다주면, 여성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관계를 할 수 있고 이를 약점 삼을 수 있다는 것, 싫다고 거부해도 그대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것. 이 장면들이 품고 있는 칼날은 너무나 날카롭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이 그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린다.

*씨네 페미니즘 매거진 ‘SECOND’는 여성 캐릭터와 여성 영화인, 소외된 장르 등 영화계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세컨드’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탐구합니다.

곽민해·김수현·장은진·정경희 ‘SECOND’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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