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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의 추억’ 인식표가 바뀐다

등록 2003-08-13 15:00 수정 2020-05-02 19:23

군 당국, 정설처럼 퍼진 “전사자 치아에 끼운다”는 오해 없애려 홈 없앤 것 새로 지급

문: 전 아직 군대를 안 갔기 때문에 매우 궁금합니다. 군번 말이죠. 어떤 밀리터리 소설을 보니까 군번 홈을 이빨 위아래 중앙에 맞춰서 세로로 낀 다음에 발로 차면 이가 부서지지 않는 한 안 빠지게 한다고 써 있던데 어떻게 하는 건가요.

답: 군번줄(인식표)을 보면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모양이지요. 자세히 보면 그 중에 V자 모양의 작은 홈이 보이실 겁니다. 그 부분을 앞니 중앙에 끼고 발로 차서 끼워넣는 것이 맞습니다. 그냥 입에 넣고 만다면 나중에 찾기 힘들 수도 있고 분실 우려도 있으니까요. 살이 썩어도 치아 사이에 끼워져 있는 인식표는 오래 가겠죠. 그래서 군번줄에 홈이 있는 거랍니다.

3밀리 가량 V자 홈의 용도

네티즌들끼리 궁금한 것을 서로 묻고 답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글이다. 이 문답처럼 많은 사람들은 인식표 테두리에 파인 3밀리 가량의 V자 홈의 용도를 전사자의 이에 박아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사례도 없는 오해다.

인식표 홈 용도에 대한 오해가 이렇게 뿌리 깊자 군 당국은 7월부터 아예 인식표의 홈을 없앴다. 육군본부 부관감실은 “인식표를 전사자의 치아 사이에 끼워 고정할 경우 이미 굳어진 주검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인식표를 전사자 주검에 단단히 묶어두기만 하면 나중에 신원 확인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군 당국의 설명에 따르면, 인식표 V자 홈 용도를 명확하게 설명한 공식 문서나 근거자료는 없다. 또 한국전쟁·베트남전쟁 등에서 숱한 전사자가 생겼지만 주검의 치아 사이에 인식표를 고정시킨 사례도 확인된 바 없다.

그렇다면 인식표에는 왜 홈이 파여 있는 것일까. 군 당국은 1910년대 초 미국에서 인식표에 이름·혈액형 등 내용을 정확하게 새겨넣기 위해 인식표 재료인 스테인리스를 기계에 고정하려고 홈을 판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식표를 편하게 만들려고 판 홈이란 것이다.

육군은 7월1일 홈 없는 새 인식표를 지급·착용하도록 규정을 마련했고, 공군은 11월 입대장병부터 새 인식표를 지급한다. 다만 기존 인식표 재고가 있는 육·해·공군 부대는 남아 있는 인식표를 모두 쓴 뒤 새 인식표를 지급할 예정이다. 이 밖에 새 인식표는 뒷면 테두리를 이루는 접힌 부분도 0.8밀리에서 1.5밀리로 늘어났으며 표면을 무광택으로 처리했다.

국군 인식표는 1946년 국방경비대 창설 때부터 있었고 그 뒤 몇 차례 바뀌고 나서 V자 홈이 있는 타원형의 현 인식표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4월부터 쓰고 있다. 인식표 홈이 없어짐으로써 52년 만에 국군 인식표 모양이 바뀌었다. 1951년부터 99년까지 인식표 기재 내용도 그대로였으나, 99년 1월13일부터 ‘대한민국 육군’이란 뜻인 ‘KA’를 ‘육군’으로, 이름 표기를 조합형에서 완성형으로 바꿨다.

개목걸이? 미군들도 dog tag!

이등병부터 별 4개 장군까지 모든 국군의 인식표는 내용과 모양이 같다. 흔히 군번으로 불리는 가로 5cm, 세로 2.8cm 타원형의 인식표에는 군별(육·해·공군), 군번, 이름, 혈액형이 적혀 있다. 군인들은 목욕할 때 등을 빼고 항상 인식표를 목에 걸고 있어야 한다.

지난 4월 이라크전 때 미군 지휘관들은 크게 다치거나 숨진 미군 병사들의 신원 확인에 어려움을 겪자 ‘모든 군인들은 인식표를 차라’는 지시를 여러 차례 내렸다. 인식표는 각개 점호, 전투 중 부상시 혈액형 확인 등에 쓰지만 주된 용도는 주검 확인표다. 국군 인식표는 69cm짜리 긴 줄과 16cm짜리 짧은 줄에 2개가 묶여 있다. 전투 중 사망했을 때 동료가 긴 줄에 붙어 있는 인식표는 주검에 묶어두고 짧은 줄 인식표는 마지막 아군 목격자가 떼어 지휘계통으로 제출하면 군 당국이 전사처리를 한다.

현역이나 군복무을 마친 예비역들은 인식표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개는 인식표를 잃어버렸거나 점호나 휴가 때 인식표를 챙기지 못해 혼이 난 ‘서글픈’ 이야기다. 이상영(34·경기도 고양시 마두1동)씨는 “군복무 시절 두 손을 엉덩이 윗쪽에 올리고 머리를 땅에 박는 기합인 이른바 ‘원산폭격’을 하고 있으면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이때 목에 찬 인식표가 흘러내려 짤랑거리며 얼굴을 때리면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졌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병사들은 인식표를 ‘개목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미군 병사들도 인식표를 공식용어인 ‘identification tag’ 대신 ‘dog tag’이라 부르듯이 외국의 직업군인들도 군복무 기간 부자유스런 신세에 대한 불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인식표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9세기 프랑스 군대에서부터였다. 1914년 영국군은 혈액형을 적어 병사들에게 착용하게 했고 미군은 1917년부터 인식표를 차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 군대는 직사각형·원형·타원형 등 목걸이 인식표를 걸고 다니지만 중국은 특이하게 군복 안감에 색실로 인식표에 새길 내용을 박음질했다.

연인들 사이에선 ‘커플 군번줄’인기

미 국방부는 컴퓨터 칩을 사용한 새 인식표를 개발하고 있다. ‘개인정보휴대기’(PIC·Personal Information Carrier)란 이 새 인식표에는 각종 치료기록, 음성자료 등을 포함해 총 256메가바이트의 정보가 들어 있다. 군인이 검진을 받거나 치료를 받게 되면 위생병이 휴대용 컴퓨터를 이용해 새 내용을 입력한다.

요즘 젊은 연인들 사이에는 인식표가 사랑의 징표로 인기를 끌고 있다. 대학가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군번줄을 목에 찬 여성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찬 인식표는 군대에서 받은 것이 아니다.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는 1만원가량의 돈을 내고 주문하면 군 인식표 모양의 타원형 스테인리스에 이름·전화번호·주민번호·혈액형 등을 새겨준다. 연인들은 인식표 2개를 주문해 군번줄에 달린 인식표 두개에 서로의 개인정보를 새기고는 나눠가진다. ‘커플링’ 대신 ‘커플 군번줄’이다.

인식표가 애초 쓰임새인 ‘주검 확인표’를 넘어 ‘패션 소품’까지 쓰임새가 다양해지고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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