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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의 아무몸

30대가 세 살이 되는 사랑의 불시착

나는 왜 불평등한 관계를 자연스러운 연애라고 느꼈나

제1296호
등록 : 2020-01-1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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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누리집 갈무리
리정혁(현빈)을 보면 설렌다. 저항이 불가능하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사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북한에 불시착한 남한 여자 윤세리(손예진)를 돌보는 남자다. “시야에 있으라”며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북한 금수저다. 등장부터 무술을 선뵀는데 알고 보니 피아니스트다. 북한 땅에서 세리가 기댈 사람은 정혁뿐이고 그로 충분하다. 절대적 보호자다.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현빈 품이라면 불시착이 아니라 안착이다.

세리를 어떻게 욕하랴

뭔가 이상하다. 세리는 남한에서 능력 있는 경영자다. 재벌 아버지한테도 인정받아 후계자로 낙점됐다. “틀린 선택을 해본 적 없는” 여자다. 물정 모르는 북한에 떨어졌으니 어리바리한 건 이해한다. 그런데 정혁 집에 숨은 첫날, 그는 일 나간 정혁에게 ‘응급전화’를 걸어댄다. “응급상황이에요. 보디샴푸가 없어요.” 세리는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얹혀 있는 상태다. “비누가 있을 텐데.” 또 전화한다. “샴푸는?” “비누.” 또 전화한다. “잠잘 때나 목욕할 때 아로마 향초가 필요해요.” 퇴근길에 정혁은 세리가 필요하다는 건 다 산다. 세리는 ‘우왕’ 눈물을 터뜨리며 아로마 향초가 아니라 양초라고 타박한다. 귀여운가? 이건 30대가 아니라 3살의 행태다. <사랑의 불시착>의 로맨스는 완벽한 의존과 보호 사이 낙차에서 피어오른다. 북한은 그 낙차를 극대화하기 위한 판타지 설정이다. 여자주인공이 아이로 퇴행하는 공간이다.

박지은 작가의 전작인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여자주인공은 아예 인간이 아니었다. 뭍으로 올라온 인어다. 생존 지식은 내 10살 조카보다도 없다. 몸만 어른이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에 도가 튼 사기꾼 남자주인공이 돌본다. 보는 사람 설렌다. 그 전에 <별에서 온 그대>가 있었다. 여자주인공은 슈퍼스타인데 매니저가 생활을 돌봐주니 물정 모르긴 매한가지다. 낙차는 남자주인공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며 벌린다. 이 땅에 400년 산 외계인이다. 오래 살았으니 모르는 거 없고 외계인이니 시간도 조정한다. 그 전엔 재벌이, 그 전엔 왕자가 있었다. 리정혁 같은 남자 어디 없나? 안 궁금하다. 반백 년 가까이 살아본 결과, 없다. <푸른 바다의 전설>의 진짜 끝은 인어의 ‘독박육아’였을 거다. 그런데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뛴다.

궁금한 점은 왜 나는 이 관계를 낭만적으로 느끼냐는 거다. 낭만적 사랑의 전제 조건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 평등한 두 인간일 텐데 말이다. 보호하고 보호받는 게 무슨 문제라고? 사기다. 이런 ‘낙차 로맨스’는 대차대조표의 ‘손실’ 쪽을 보여주지 않는다. 보호하는 자는 능동태고 보호받는 자는 수동태다. 평등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뒤통수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어느 참에 ‘보호받는’ 내 결정권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고 없다. 성인으로서 자존감은 액체괴물처럼 흐물흐물해져 있다. 보호하는 자의 호의는 왔던 것처럼 제 마음대로 사라진다. 자신을 종속변수의 구덩이에 파 넣는 짓인데 이렇게 안 하면 또 사랑을 잃을 것만 같다. 성인여성이되 어린아이처럼 무해한 존재가 돼야 관계를 지킬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그렇게 움직인다. 세리를 욕할 수 없는 까닭은 나는 개 흉내도 내봤기 때문이다. 그것도 ‘젊은 여자’일 때 이야기다.

애교는 영어 단어가 없다. 한국말만 있다. 발음대로 aegyo라고 쓴다. 김명희가 쓴 책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을 보면, 위키피디아는 aegyo를 “아기 목소리, 표정, 몸짓 등을 통해 표현되는, 애정의 귀여운 드러냄”이라고 정의했다. 애교엔 목소리 톤이 중요하다. 중저음 목소리로 말하는 아기, 무섭지 않나. 이 책에선 젠더 불평등과 여성 목소리 톤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연구를 소개한다.


순진한 여자만 남아 있으라

한 연구는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하는 성평등 격차 지수에서 153개국 중 108위인 한국보다 더 낮은 일본(121위)과 다른 나라들을 비교했다. 20대 일본 여성의 목소리 평균 주파수는 232Hz, 미국은 214Hz, 스웨덴은 196Hz다. 인사할 때 일본 여성의 목소리 톤은 310~450Hz까지 올라갔다.(1995년 연구) 오스트레일리아 연구팀은 1940년대와 9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여성의 목소리를 비교했다. 목소리 톤은 점점 낮아졌는데 연구팀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점을 반영한다고 해석했다. 신뢰감을 더 주는 쪽으로 변해간다는 거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한 선거에 나온 후보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줬더니, 참가자들은 여성 중에서 더 낮은 목소리를 내는 후보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더 유능하고 강력하다”고 느꼈다. 고음을 낼수록 덜 위협적인 존재가 되는 대신 신뢰를 잃는 셈이다.

다리와 겨드랑이에 털이 난 세리를 상상할 수 있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림 <샘>에서 한 소녀는 어깨 위로 팔을 들어 물동이의 물을 쏟고 있다. 털은 머리에만 있다. 조이한의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을 보면, 옷 입은 여자보다 벗은 여자가 더 많이 나오는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음모가 등장하는 건 1819년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처음이다. 조이한은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으라는 무언의 압력, 혹은 순진한 여자만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썼다.

애교는 선택인가? 장강명의 소설 <산 자들>에서 한 중소기업 아르바이트생 혜미는 느닷없이 잘린다. “무뚝뚝하다”가 핵심이다. 생글거리지 않는다, 차를 제때 내오지 않는다, 이런 인상비평이 불어나더니 해고로 혜미를 덮쳤다. 종합상사에 다니는 한 20대 여성은 “일은 잘한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이 문장에서 압력은 조사 ‘은’에서 나온다. “너 그렇게 무뚝뚝해서 사회생활 하겠냐. 웃기라도 하든가.” 위계가 없다면 애교도 없다. 친구가 다니는 기업은 성차가 곧 직급차이다. 관리직 여성은 한 명이다. 고졸 여직원이 대부분인 이른바 ‘업무직’은 회사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반복 업무만 한다. 이들은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 보조’ 역할을 떠맡는다. 여성 관리직인 친구는 과한 리액션(반응)을 선보여야 하는 그들을 보는 게 불편하다. 회식 때마다 성별은 여성, 직급은 남성으로 존재가 쪼개지는 것 같다.

기억은 없는데 스미고 말았다

“네가 웃기려 하지 말고, 웃어줘.” 예전에 소개팅만 나갔다면 깨져서 오는 내가 안타까워 친구가 조언한 적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신바람 나게 발랄한 거울이 돼주란 얘기다. 그다음부터 진짜 많이 웃었는데, 너무 과했나보다. 내 목소리를 들을 때 깜짝 놀라곤 한다. 왜 코맹맹이 소리를 하나? 왜 문장의 끝맺음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나? 나는 왜 불평등한 관계를 자연스러운 연애라고 느꼈나? 내가 선택했나? 그런 기억이 없는데, 내 몸에 스미고 말았다고 다리털을 밀며 생각한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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