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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도 믿지 마세요

FBI부터 화성 경찰까지 지문 믿고 오류 빠져
등록 2019-11-19 01:47 수정 2020-05-02 19:29
모방범죄로 알려진 8차를 포함한 화성연쇄살인 전부가 자신의 소행임을 최근 자백한 이아무개씨가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살인 혐의로 체포돼 경찰조사를 받는 모습. 연합뉴스

모방범죄로 알려진 8차를 포함한 화성연쇄살인 전부가 자신의 소행임을 최근 자백한 이아무개씨가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살인 혐의로 체포돼 경찰조사를 받는 모습. 연합뉴스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을 확률은 3.15%다. 2018년 전국 법원에서 처리된 형사재판의 총건수가 23만7699건인데 이 중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7496건이다(대법원 2019년 사법연감). 규모가 작기는 하나 남원지원의 경우 2018년 동안 총 6건의 무죄 판결을 했으니 무죄 판결은 두 달에 한 번꼴로 나온 셈이다(총건수는 443건). 3.15%라는 숫자를 어찌 봐야 할까? 법원이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있는 걸까?

형사재판은 검찰이 한 차례 거른 사건을 대상으로 이뤄진다. 일단 경찰과 검찰이 수사해서 혐의가 없다면 불기소, 혐의가 있어도 처벌의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경미하다 판단하면 기소유예 처분을 해서 사건을 걸러낸 뒤 혐의가 인정되는 사건만을 법원으로 보내 재판이 이뤄지는 것이다. 무죄율 3.15%는 법원이 불공정한 재판을 한 결과라기보다는 검찰이 그만큼 억울한 사람을 덜 만든 결과라 평가해줄 만하다.

백 명 중 세 명은 무죄

이런 검찰의 수고가 ‘검사가 어련히 알아서 기소했겠어’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신뢰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미덕이지만 적어도 형사재판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한 사회의 엘리트들이 상식의 체로 촘촘히 걸렀다 하더라도 억울한 사람은 발생할 수 있다. 코미디영화 의 첫 장면처럼, 하늘에서 갑자기 냉장고가 떨어져 사람이 사망하는 급의 일이 종종 벌어진다.

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 중심부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총 200명의 사망자와 2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날 테러 이후 알카에다 유럽지부에서는 ‘이번 테러는 스페인이 미국의 대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협조한 것에 대한 징벌’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범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스페인 수사 당국은 불발탄에서 발견된 지문을 전세계 수사기관에 보냈는데, 과학수사의 최고봉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지문의 주인을 가장 먼저 찾아냈다. FBI는 해당 지문이 자국의 변호사 브랜던 메이필드의 것임을 밝혀낸 뒤 그를 체포했다. 메이필드는 “미국 밖으로 나간 적도 없고, 스페인은 더더욱 가본 적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텅 빈 출입국 기록에서 그의 결백을 읽어내는 대신 흔적도 남기지 않고 국경을 넘나드는 ‘테러리스트’의 간악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메이필드가 구속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지 2주 만에 스페인에서 진범이 체포됐다. 스페인 경찰 역시 동일한 지문으로 추적한 끝에 한 알제리인을 찾아낸 것이다.

분명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 않았던가? 세계 최고의 수사력을 가진 FBI가 출입국 기록조차 없는 자국의 변호사를 해외 테러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할 정도로 지문의 신뢰도는 높았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지문이 동일할 수도 있다면, 인류는 그간 지문에 부여한 신뢰를 회수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다. 미 국무부는 진상규명에 나섰고 2006년 ‘A Review of the FBI’s Handling of the Brandon Mayfield Case’라는 보고서를 통해 위 사건을 전면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지문도 다시 봐야

다행히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명제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다. 마드리드 폭탄테러 사건에서 15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스마트기기에서 본인 인증 수단으로 지문을 쓰는 것만 봐도 지문의 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스페인에서 동일한 지문을 가진 두 사람이 발견된 것일까. 현실에서 지문을 판독하는 절차를 살펴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흔히들 기계나 컴퓨터가 지문의 동일 여부를 판독한다 생각하지만, 지문의 동일성 여부를 판단하는 건 사람이다. 마드리드 테러 사건에서 FBI는 불발탄에서 채취한 지문을 컴퓨터 프로그램에 있는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했고 이를 통해 해당 지문과 유사한 지문을 가진 20명을 간추려냈다. 이를 FBI 지문전문가들이 대조 작업을 한 끝에 불발탄의 지문이 메이필드의 것이라 결론 내렸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문 대조가 이루어진다.)

사람의 눈과 판단이 관여된 이상 인간 본연의 오류는 피할 수 없었다. 사실 불발탄에서 발견된 지문의 왼쪽 윗부분은 메이필드의 지문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FBI 조사관은 ‘불발탄 위에 우연히 다른 사람의 지문이 찍혔다’라거나 ‘메이필드의 다른 손가락이 찍혔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이를 무시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이런 설명을 뒷받침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해당 지문전문가들은 지문 분석 과정에서 메이필드가 최근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이집트 출신 이민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는데, 이런 정보가 이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조사관들이 범한 실수는 예외적인 것일까. 이티엘 드로, 데이비드 찰턴, 에일사 페론은 5명의 수석 지문 분석관에게 지문쌍을 준 뒤 일치 여부를 판독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 지문쌍은 수석 지문 분석관들 각각이 과거에 판독했던 것으로 이때 이들이 “일치”했다고 판정한 지문쌍이었다. 하지만 이 5명 중 4명은 재차 이루어진 판독에서 해당 지문쌍이 “불일치”한다고 판정했다. 그 이유는 새 판독 과정에서 이들에게 해당 지문쌍이 불일치한다는 암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1 같은 지문을 놓고 같은 분석관에게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분석을 요청했을 때 같은 결론이 나온 확률이 90%가 되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다.2

미치도록 잡고 싶어도

화성 8차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해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이아무개씨가 8차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한 지금, 윤아무개씨를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한 경찰 쪽에서 ‘당시 윤씨는 자백도 했고 또 현장에서 지문도 발견했다’며 억울해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재판에는 지문 증거가 제출되지 않았다는 뉴스가 있어 과연 윤씨의 지문이 현장에서 발견됐는지 의문이지만, 설사 발견됐다 해도 이것이 과연 정확한 과정을 거쳐 얻어진 결론인지 의문이 든다. ‘미치도록 잡고 싶다’는 수사관들의 바람이 닮지 않은 지문을 닮았다고 보게 만들지 않았을까?

선의가 항상 착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사재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수사관들과 판사의 선의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참고문헌
1. Itiel E. Dror, David Charlton, and Ailsa E. Peron, ‘Contextual Information Renders Experts Vulnerable to Making Erroneous Identifications’, , 2006.
2. ‘Reversing the legacy of junk science in the courtroom’, Kelly Servick, , 2016.
신민영 법무법인 예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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