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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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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을 잊지 않고 대답한 잎새

성질은 영악스러웠지만 키워본 것 중 가장 예뻤던 고양이
등록 2020-01-02 03:07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20여 년 전 경기도 성남 검단산 밑에 살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 청계산 기도원에 갔다가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얻어가지고 왔습니다. 집에 오자 야옹야옹 울기 시작합니다. 조금 울다가 말겠지 했는데 밤낮 삼 일을 잠깐 조는 시간을 빼고는 웁니다. 너무 영악스럽게 울어서 좀 부드러우라고 잎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오늘은 도로 데려다줘야겠다고 아침을 먹고 있는데 식탁 밑에서 양양 소리가 납니다. 잎새가 식탁 밑에 떨어진 갈치 부스러기를 주워먹고 있습니다. 너무 기특해서 아예 갈치 토막을 하나 구워서 주었더니 암팡지게 양양거리며 다 먹고 기운 차려 제법 애교를 부리며 놀기 시작합니다.

양수가 터졌는데도 나오지 않는 새끼

많은 고양이를 키워봤지만 잎새처럼 예쁜 고양이는 처음 봅니다. 등이 고등어처럼 얼룩얼룩한 회색 줄무늬 암놈인데, 배는 또 하얗습니다. 정수리에서 회색과 검은색 줄이 가늘게 양 눈썹 위까지 흐르듯이 내려와 호랑이 같습니다. 미간에서 아주 살짝 회색이 양옆으로 흘러 콧날이 더 오뚝해 보입니다. 분홍색 코에 눈 아래로 모가지 밑에까지 아주 고운 흰색 털이 이어져 있습니다. 눈가에 검은색 아이라인을 정교하게 그려놓은 것 같습니다.

잎새는 사람 손을 보면 흥분해서 장난칩니다. 손이 무슨 사냥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멀리서 달려와 팍 무는 시늉도 하고 손이 친구인 양 처음에는 장난처럼 살살 하다가 점점 엄청난 힘으로 물고 쫍니다. 후려 때려야 쫓겨갑니다. 밤에도 안 자고 손을 찾아 장난쳐서 여름인데도 긴팔 옷소매에 손을 감추고 잡니다. 새끼 시절이 지나자 장난을 덜 치고 눈치가 빨라졌습니다. 평소에는 만질까봐 피해다니는 놈이 배가 고프면 갖은 애교를 다 떱니다. 새벽 4시면 꼭 밥을 먹습니다. 곁에 와서 손을 핥습니다. 그래도 안 일어나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엎드리면 등을 밟아줍니다. 잎새의 무게로는 등이 가장 시원합니다.

1년이 되어가는 어느 날, 잎새는 앙웅앙웅 쉬지 않고 밤낮을 소리 지릅니다. 그때는 중성화해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이웃 사람들 보기 남사스럽습니다. 집 앞 비탈밭 원두막에 데려다놓았습니다. 집 안에서는 갖은 영악 다 떨면서 밖에 나가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찍소리도 못 내고 사람 품만 파고들어서 도로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또다시 괴성을 지릅니다. 한 열흘은 소리를 질러야 끝납니다. 주기가 빨리도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길고양이가 많이 다니는 삼거리 만물상에 데리고 가서 헙수룩한 상자 창고에 좀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료와 물을 넣어주었습니다. 매일 가보면 사료도 물도 먹지 않은 채 구석에 숨어 있는 것을 삼 일 만에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잎새는 조용해졌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점점 배가 불러왔습니다. 두 달이 좀 지난 어느 날, 잎새는 양수가 터졌습니다. 구석에 상자를 놓고 포대기 깔고 어두컴컴하게 가려주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다음날도 새끼를 낳지 않아 동물병원에 데려가 배에 털을 밀고 초음파를 했는데 새끼가 없습니다. 상상 임신이랍니다.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참외 속을 먹고 기운 차리고

다음해 이른 봄 발정이 왔을 때 만물상 창고에 일주일 동안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새끼를 밴 것 같습니다. 두 달쯤 지나자 양수가 터졌습니다. 아침부터 진통해 곧바로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큰일 날 뻔했다고 한 마리가 죽어 가로막고 있어 다른 새끼들이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죽은 새끼를 꺼내고 세 마리 새끼를 살렸습니다. 수술한 김에 중성화 수술도 했습니다.

잎새는 멀거니 눈을 뜨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누워 있습니다. 그래도 새끼는 중하여 젖을 먹였습니다. 참외 속을 주었더니 기운을 차려서 사료를 먹기 시작합니다. 삼 일이 되자 다른 구석으로 새끼를 물어 옮겨놓고 키웁니다. 잎새는 삼 일마다 장소를 옮기다 자리가 마땅찮으니 새끼를 데리고 책꽂이 아래 칸에 비집고 들어가 삽니다. 하루는 다른 방으로 이사하느라고 모가지를 물고 가다가 힘이 들었는지 새끼 주둥이를 물고 끌고 갑니다. 너무 애쓰는 것이 딱해서 한 마리 남은 것을 날라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꾸만 한 마리가 모자란다고 내놓으라고 앙웅앙웅 눈을 부릅뜨고 계속 큰 소리를 지릅니다.

잎새야, 여봐라 하나 둘 셋, 세 마리 다 있잖아. 아무리 해도 잎새는 계속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할 수 없이 몰래 한 마리를 다른 방에 가져갔다가, 잎새를 불러 여기 있다 하며 보여주었습니다. 그제야 젖을 먹이고 가만히 있습니다.

가을이 되자 고양이 새끼들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장난합니다. 두 마리는 어미를 닮았고 한 마리는 다람쥐같이 노랗고 알룩알룩합니다. 그런데 또 발정기가 된 모양입니다. 앙옹거리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새끼를 못 낳게 수술했는데 옆집에선 잠을 못 잔다고 자꾸만 뭐라 합니다.

배에 골탄 묻고 거지꼴로 나타났지만

걱정입니다. 강원도 평창 다수리 친정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키우던 고양이가 다 집을 나갔답니다. 고양이 새끼 낳았으면 남 주지 말고 다 다수리로 갖다달라고 합니다. 잎새와 새끼 세 마리를 데려다주었습니다. 가끔 전화로 잎새의 소식을 듣습니다. 집 안에 살던 잎새 가족들은 밖에서도 잘 적응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났다고 합니다. 봄이 되자 암컷 새끼 두 마리가 제 새끼를 낳고 어미를 얼씬도 못하게 해서 잎새가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잎새는 보내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하지만 늦었습니다.

가을에 식구가 다 같이 친정집에 갔습니다. 딸내미 둘이 잎새야 잎새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큰 소리로 불러보았습니다. 어느 집 비닐하우스에서 야옹야옹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하며 잎새가 나왔습니다. 제 이름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에는 시커먼 골탄이 묻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비쩍 마른 것이 아주 거지꼴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을 보자 너무 반가워하며 다가와 비비며 야옹거립니다. 딸들이 잎새를 서로 안고 온다고 했지만 잎새는 내 무릎에 안겨 아주 편안하게 자며 왔습니다.

잎새를 목욕시켰지만 배에 붙은 골탄은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털을 말리고 가위로 깎아내려 해도 살에까지 밀착돼 잘 뜯어낼 수 없습니다. 집에 돌아온 잎새는 너무나 익숙하게 화장실에도 가고 집 안도 여기저기 구석구석 돌아봅니다. 집에 온 지 두 달쯤 지나니 배에 골탄이 다 떨어지고 고운 털이 났습니다. 옛날 예쁜 모습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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