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누가 개·고양이가 사이가 안 좋대?

‘ 남는 건 제리에게로’의 제리
등록 2015-01-01 06:07 수정 2020-05-02 19:27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소파 밑에서 자다가 눈을 뜨니 집이 왜 이렇게 적막한 것 같지? 내 손바닥 안에 있는 줄 알았던 주인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졌다. 야옹, 야옹 목 놓아 그를 불러봅니다. “만세, 왜 불러?” 집주인은 책상 앞에서 둥글게 몸을 숙이고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공책을 얼른 탁 덮고 일어난다. 뭐야, 내 얘기 쓴 거 아냐?

신소윤

신소윤

모두가 잠든 시간, 책상 위에 놓인 그 공책을 열어봤다. 내가 너무 뚱뚱해서 사료를 줄이겠다는 얘기 따위 쓴 건 아니겠지? 며칠 안에 목욕을 시키겠다 계획 같은 게 쓰여 있다면? 아 물에 푹 젖는 그 기분, 목욕은 정말 끔찍하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12월12일 청경채소고기미음, 잘 먹는다. 내일은 고구마도 줘볼까. …12월23일 브로콜리소고기미음, 그럭저럭. 남는 건 제리에게로.” 요즘 온 신경이 나의 새 친구, 아기에게 집중돼 있는 주인이 꾸역꾸역 쓰고 있던 것은 이유식일지였던 거다. 쳇, 그렇다고 내 얘기가 하나도 없을 건 또 뭐람. 예전엔 내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있기만 해도 귀엽다고 사진을 찍어대더니 요즘은 “얘, 발에 차이게 왜 이러고 있니”라고 말하는 너, 집주인. 하여간 인간들이란. 그러니 오늘은 그들 얘기 따위는 접어두고, “남는 건 제리에게로”의 주인공 제리, 나의 개 형 얘기나 써보련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우리는 2011년에 만났던가. 4월이었고 날씨는 봄인 줄 정신을 못 차리고 굉장히 추웠다. 파도 위 돛단배처럼 출렁대는 캐리어를 타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나 당도한 그곳에서 나는 제리를 만났다. 까맣고 날랜 그 개는 크흥, 펑, 크흥, 펑 경망스럽게 콧소리를 내며 내가 들어앉아 있는 캐리어를 기웃거렸다. 가만 보아하니 이 동물도 한심하기가 만만치 않구나. 걸음걸이가 소란스럽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마다 자체로 혼돈, 카오스! 똥을 싸고 모래로 덮어놓지도 않고, 욕실 슬리퍼와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거야, 왜 싸우는 거지?

제리는 첫인상과 다름없이 늘 하는 일 없이 분주했다. 샘도 많아 내가 주인 무릎에 앉아서 기분 좋게 가릉거리고 있으면 어디서 알고 쫓아와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와중에 겁은 많아서 나에게 장난을 걸 때마다 내가 번쩍 몸을 일으켜서 커 보이게 하면 놀라서 주춤 물러서곤 했다. 내 이름 만세는 그렇게 정해진 거다. 이 형이 어찌나 귀찮게 하던지 자주 앞다리를 번쩍 들고 몸을 크게 일으켰더니 주인들이 그리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내 몸집이 제리보다 1.5배는 크고 힘도 훨씬 세지만, 의리 있는 고양이인 나는 처음 형은 영원한 형, 이길 수 있어도 져주며 지내고 있다. 아기가 찾아온 이후로 늘 주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이 형, 식탐이 많아 내가 밥 먹다 사료 한 알 떨어트리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먹을 것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 내팽개치는 이 형, 가끔 내 앞에 와 발랑 드러누워 머리를 들이밀며 친한 척하는 형, 가끔 나를 너무 사랑해 머리며 귀를 핥아 침으로 흥건하게 적셔놓는 형. 누가 개, 고양이가 사이가 안 좋대? 나는 밥 주는 주인들보다 하루 24시간 늘 함께 있는 형이 더 좋은 것 같아. 급고백으로 마무리한다만 형, 내 머리에 침은 좀…. 고양이가 얼마나 깔끔한 동물인지 자주 잊는 이 형.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