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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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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성노예, 생존으로 저항하다

수용소에서 남성 수인에게 강제로 섹스노동을 제공해야 했던
독일 나치즘 아래 또 다른 ‘위안부’… 폭력 기제의 복합성과 행
위자들의 다양한 생존 전략 및 동기에 주목해야
등록 2015-03-14 06:33 수정 2020-05-02 19:27
나치 친위대에 의해 강제 성노동에 동원된 여성 포로들이 수용됐던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의 내부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나치 친위대에 의해 강제 성노동에 동원된 여성 포로들이 수용됐던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의 내부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부 여성들은 국가권력이 만든 유곽에서 강제로 ‘섹스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그 ‘성노예’ 여성들은 하루 6~8명의 남성을 상대해야 했는데, 휴일에는 그 수가 늘어 심지어 15~20명의 남성들과 강제로 섹스를 해야 했다. 혹시라도 임신하는 경우, 그들은 냉혹히 버려졌고 다른 여성들로 교체됐다. 몸은 망가졌고 맘은 피폐했다. 그러나 1945년 종전 뒤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과 피해자 보상 및 기억과 책임을 일깨우는 과거 청산 과정에서 이 성노예 여성들의 역사는 주목받지 못했다. 강제 섹스노동 제도를 만들었던 국가와 그 시설을 향유했던 남성들 일부는 오히려 여성들에게 ‘책임’을 넘기며 그 여성들은 성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사’로 원하던 일을 해서 이득을 봤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사회는 침묵했으며 도리어 멀쩡했다. 여성들은 숨죽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늙어갔다. 오늘까지 여전히 국가는 그 성노예 여성들에게 공식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생존 여성의 수는 또 줄었다.

동·서독 모두 쉬쉬했던 불편한 역사

일본군 ‘위안부’ 얘기가 아니다. 독일 나치즘하에서 성노예로 강제 섹스노동을 수행했던 유럽 ‘할머니’의 얘기다. 홀로코스트 범죄와 관련해 과거 청산을 모범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독일의 또 다른 역사다. 독일에서도 성노예 여성들의 역사는 1990년대 후반까지 학계와 여론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나치 점령지에서 친위대나 독일군을 위해 섹스와 성접대를 제공했던 민간 유곽과 군 유곽의 역사와는 달리, 수용소 내 유곽 시설에 대한 이야기는 동독과 서독 모두 불편한 역사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금기시해왔다. 그 주제는 2000년부터 비로소 역사가들과 여론의 관심을 받게 되었지만, 이미 생존자는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나치군이나 친위대를 위한 유곽의 경우에도 나치 국가의 강제성과 통제적 성격이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수용소 유곽은 그곳 여성들이 어떤 자유나 선택의 권리도 없었고 실질적인 금전적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폭력적이었다. 아울러 나치의 희생자였던 여성 수인들이 친위대가 아니라 동료 남성 수인들에게 섹스노동을 제공해야 했다는 점에서 수용소 유곽은 더욱 기괴한 것이었다. 1942∼45년 나치들은 총 10곳의 강제수용소에 별관을 지어 유곽을 만들었다. 폴란드 땅에 있던 유명한 아우슈비츠수용소뿐만 아니라, 뮌헨 근처의 다하우, 베를린 근교의 작센하우젠, 바이마르 인근의 부헨발트에 소재한 남성 강제노동수용소 등에는 섹스를 제공하는 유곽이 들어섰다. 베를린의 문화인류학자 로베르트 조머의 연구에 따르면, 10곳의 수용소에서 총 210명의 여성들이 별관 유곽에서 강제 섹스노동을 수행했다. 그들은 모두 이미 수용소에 끌려와 있던 수인들이었다. 수년 동안 끈질긴 자료 조사 끝에 조머는 그중 174명의 여성 신원을 밝혔다. 성노예 여성들 중 30%는 ‘정치범’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사회부적응자’라는 범주로 묶인, 17살에서 35살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독일 여성이 65.5%에 달했고 폴란드 여성이 27%였으며, 러시아와 동유럽 여성이 일부 있었다.

사실 나치의 강제노동수용소와 섹스를 제공하는 유곽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나치의 수용소는 본디 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을 박탈하고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키며 철저한 규율과 전면적 통제로 사적 욕망을 짓뭉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친위대는 수용소 바깥, 즉 민간 사회에서는 유곽을 엄격히 관리하며 사회의 ‘청결함’과 인종적 ‘순결함’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오히려 수용소에서는 유곽을 세워 그것에 반하는 일에 앞장서는 모순을 보였다.

나치 친위대 돕는 자에겐 섹스를

나치가 수용소에다 유곽을 만든 이유는 강제노동수용소의 남성 수인들로 하여금 노동력 증대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나치 친위대(SS) 대장 하인리히 힘러는 남성 수인들로부터 더 철저한 복종과 규율 및 노동력 증대 효과를 얻기 위해 물질적 혜택과 보상을 제공했으며, 수용소 내 위계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조치했다. 일종의 특권과 성과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피해자 또는 희생자를 계속 구분짓고 분리하며 위계를 만드는 것은 그들 사이의 내적 결속과 연대를 파괴하고 동요와 갈등을 유발하는 전형적인 통치 방법이었다. 그와 같은 특권과 성과제의 일환으로 힘러는 일을 열심히 하거나 친위대를 적극적으로 돕는 수인들에게 수용소 유곽에서 섹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2마르크에 해당하는 대행 카드를 지급하고 15분 정도의 섹스 시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물론 유대인과 소련군에게는 그런 기회마저 박탈했다. 유대인 여성들을 수용소 유곽의 성노예로 삼지 않은 것까지 함께 놓고 보면, 인종 구분 정책을 성폭력 제도와 실행에까지 이렇게 철저히 적용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하고 망연하다. 다만 정치범들은 수용소 유곽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며 방문을 조직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인간 삶에서 흔히 그렇듯, 특권을 향유하게 된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그 특별한 기회를 그냥 지나치기란 참 쉽지 않았다.

남성 수인들의 경우 유곽에서의 섹스는 단순히 친위대의 폭력 체제에 대한 굴종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족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유곽 방문을 자신의 잃어버린 남성성을 찾는 것으로 스스로 정당화했고 몸을 통한 개체성의 확인 기회로 받아들였다. 때로 그들은 ‘죽기 전에 여자 한번 보고 싶다’는 소박한 열망 때문에 유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곽 방문객은 남성 수인의 1%에도 못 미치는 ‘특권층’이었다. 수용소의 ‘지옥’에서 그런 특권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을 뺀다면- 흔히 배신과 밀고, 또는 음모와 술수뿐이었다.

요컨대 친위대는 강제노동을 강화하고 그 제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종류의 강제노동, 즉 강제 섹스노동을 도입했고 그것을 통해 수인들을 다시금 또 다른 가해와 공모의 장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1945년 이후 오랫동안 독일 사회가 그곳에서 강제 섹스노동을 수행했던 성노예들을 나치의 피해자로 인정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원래 ‘창녀’였고 수용소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일을 맡았다는 인식이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런 ‘신화’는 엄밀한 사료 검토와 연구를 통해 최근 들어서야 어렵게 극복될 수 있었다.

친위대가 초기, 즉 1942년에 막 수용소 유곽을 개설했을 때 주로 사회에서 성매매 경험이 있는 ‘전문 인력’을 선발했던 것은 사실이다. 친위대는 수용소에 구금된 그 ‘창녀’들로 하여금 ‘자원’하도록 ‘강제’했다. 그러다가 1943년부터는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의 직업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친위대는 생존 가능성이 낮은 작업반을 의식적으로 골라 여성 수인들에게 ‘자원’하면 살 수 있다고 유인했고, 심지어 ‘6개월 동안 유곽에서 봉사하면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다’고 보장해주기도 했다. 물론 그 약속은 거짓이었다. 그렇지만 여성 수인들에게 성적 착취의 수용 여부는 삶과 죽음의 선택이기도 했다. 성노예로 일하는 것은 그나마 생존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원’ 형식을 빌린 강제이자 기망을 통한 노예화였다. 게다가 친위대는 점차 강제로 수인들을 납치해 유곽으로 끌고 갔다. 곧 친위대의 임의적인 선발이 결정적이었고, 이때 여성들의 건강과 육체 상태가 중요한 선발 기준이 되었다. 여성들은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게 되는지도 모른 채 유곽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렵사리 벗겨낸 ‘자발적’ 성노예 신화

전면 통제와 감시하에서 진행되는 ‘강제 섹스’가 정상적일 리 없었다. 유곽의 여성들은 노동 작업반처럼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정해진 남자들과 성관계를 맺어야 했고, 원칙적으로 사적 관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 ‘고객’을 거부할 수도 없었고 ‘고객’의 수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친위대는 성행위 자체도 관찰하며 감시를 체계화했다. 결국 여성들은 마치 컨베이어벨트처럼 조직된 성착취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일부 여성들은 공포와 고통 속에서 자해하며 저항하거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또 다른 일부는 깊은 절망 속에서 점차 무심해져 그 성노예 자동장치에 ‘적응’하기도 했다.

수용소의 성노예들은 점차 저항이나 거부보다는 무심함과 순응이 생존 전략이자 삶의 방편으로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여성들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다양한 생존 전략을 추구했다. 특히 나치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권력을 지닌 정기 고객은 있게 마련이었다. 여성들은 특정 남성 ‘고객’의 도움과 후원으로 그에게만 섹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특별한 물질적 보상을 받기도 했다. 아울러 그것은 상대해야 할 고객의 수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이를테면 라벤스부르크의 여성 수용소에서 부헨발트 수용소 유곽으로 끌려온 막달레나 발터라는 여성은 두 명의 ‘고객’으로부터 번갈아가며 방문을 받고 섹스를 하는 대신 그들로부터 보호와 보상을 받았다. 그런 보호-피보호 관계는 완전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발터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어떤 것이든 생존과 안전 및 ‘빵 몇 조각 더’를 위해서라면 여성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친위대 군인들과의 관계도 단일하지 않았다.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친위대 군인 옆에, 유곽의 여성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챙겨주며 심지어 소설을 읽어주던 또 다른 나치들도 있었다. 제한적이나마 그들 사이에도 ‘사랑’과 ‘우정’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은 협박과 공포의 체제, 무책임과 절망의 상호작용 속에서 빛을 잃었다.

최근에야 비로소 독일과 유럽의 역사 기억 재단들은 옛 나치 수용소 자리에 수용소 유곽의 존재를 드러내는 조형물을 설치했고 성노예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시작했다.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성적 착취를 당했던 여성들의 희생자 지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역사적으로 복원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성들이 수용소 유곽으로 가게 된 과정과 그곳에서의 생존 방식에 대한 오랜 ‘신화’를 깨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추모와 기억이 가능해졌다. 절망의 죽음 체제 앞에서 여성들이 생존과 안전을 위해 행한 작은 선택과 수용에서 ‘공모’와 ‘자책’을 찾아 가해자들의 변호 논리를 재생산할 수는 없다. 그 ‘강제된 선택’과 순응적 수용은 속수무책의 폭력 기제에 노출된 여성들의 고유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그들은 절멸 체제인 나치즘과 살해 기제인 수용소에 제대로 ‘저항’한 것이다.

기괴한 담론을 강요 말라

새로운 사료를 발굴한 것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정밀히 탐구하지도 않고, 폭력 체제의 복합성과 행위자들의 역동성에 대한 사유도 부족한 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 이미지를 깬다고 덤벼드는 이들이 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 서사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적지 않다. 오히려 폭력 체제, 특히 성폭력 체제의 다양한 메커니즘과 폭력의 행위자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강제와 압박, 유인과 기망이 함께 결합된 폭력 기제의 복합성과 행위자들의 다양한 생존 전략 및 동기에 주목해야 한다. 기괴한 담론을 만들어 나름의 ‘성찰’을 되레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강요할 게 아니다. 사료를 더 찾고 맥락을 더 더듬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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