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종편에 코 박은 이들이여, 보시오

절제된 외교정책을 구사하던 소련, 현실주의적 감각 뛰어났던 미국이 긴 냉전을 치러야 했던 것은 공포와 오해의 악순환 그리고 미디어의 확대재생산 탓
등록 2015-02-12 05:27 수정 2020-05-02 19:27

1952년 5월10일은 토요일이었다. 오후 2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는 120명의 세르비아 농부를 접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118명이 진짜 농부였고 2명은 소련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는 코민테른의 비밀요원이었다. 스탈린은 시종 눈엣가시였던 티토를 더 이상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농부로 위장한 두 자객은 스탈린의 지시대로 티토에게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다행히도 티토는 치명상을 피했다, 그러나 사건 직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소련과 연결된 쿠데타 세력에 점령됐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와 티토에 불만을 품은 민중은 “파시스트”이자 “월스트리트의 종”인 티토를 몰아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아울러 수시간 만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헝가리와 알바니아 군대가 소련 적군의 지휘 아래 유고슬라비아로 진격했다.

1951년 10월27일 발행된 미국 잡지 〈콜리어스〉의 표지(왼쪽)와 내부 이미지. 이 잡지는 ‘우리가 원치 않는 전쟁 미리 보기’란 제목을 달아 가상의 제3차 세계대전 시나리오를 실었다. slideshare.net 화면 갈무리

1951년 10월27일 발행된 미국 잡지 〈콜리어스〉의 표지(왼쪽)와 내부 이미지. 이 잡지는 ‘우리가 원치 않는 전쟁 미리 보기’란 제목을 달아 가상의 제3차 세계대전 시나리오를 실었다. slideshare.net 화면 갈무리

고립된 티토를 대신해 미국 대통령이 나섰다. 트루먼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탈린에게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평화의 시간입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그 시간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스탈린은 단호하게 응수했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들은 미국 뉴욕시 그랜드센트럴역에서 폭탄을 투척해 미국 시민 22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백악관은 들끓는 분노의 여론에 내몰려 더 이상 반격을 미룰 수 없었다. 5월14일 미국의 요청을 받은 유엔은 회원국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32개월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1952년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

‘에그노그 작전’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미국의 반격은 소련의 산업시설과 군사 요충지에 대한 선제 핵폭탄 투척이 핵심이었다. 이에 대항해 소련군은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과 중동으로 진입했으며 한반도와 일본에서 미군을 몰아냈다. 상당 기간 소련은 우위를 점했고 민간인에 대해 원자탄 공격도 아끼지 않았다. 영국 런던, 미국 시카고, 뉴욕, 워싱턴DC,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이 타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미국은 방공호와 민방위 조직에 힘입어 큰 피해를 모면했다. 트루먼은 대규모 반격을 명령했고, 1953년 7월22일 모스크바는 핵폭탄으로 사막이 돼버렸다. 전쟁의 마지막 향방은 미국의 공수부대원에서 차출된 1만 명의 자살특공대가 결정지었다. 그들은 우랄산맥에 공중 투입돼 그곳 벙커에 숨겨져 있던 소련의 마지막 핵무기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신묘하게 사라졌고,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가들에서 주민들은 체제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연합군의 진격을 도왔다. 1955년 초 유엔은 전선 도처에서 소련 군대를 압박해 결국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유엔의 점령 통치하에서 그곳은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수백만 명의 희생자와 핵전쟁의 가공할 파괴를 낳은 그 제3차 세계대전은 미군 장교와 방사능에 오염된 러시아 여성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끝이 났다.

1951년 10월27일 미국의 유명 잡지 에 게재된 가상 전쟁 기사의 내용이다. 130쪽 분량의 이 시나리오는 ‘우리가 원치 않는 전쟁 미리 보기-러시아의 패배와 점령 1952~1960’이란 제목으로 여러 장의 화보와 함께 실렸다. 편집국은 그 내용에 대해 정부기관 및 외교 문제 전문가들과 사전에 긴밀히 논의했고 저명 작가와 언론인들과 함께 상당 기간 토론한 뒤 시나리오 작성을 맡겼다. 시나리오 작성에 참여한 20명의 저자에는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로버트 셔우드, 언론인이자 역사, 특히 구술사의 개척자인 앨런 네빈스, 공상과학소설 작가인 필립 와일리, 그리고 언론인이자 나중에 매카시즘에 대항해 싸워 더욱 유명해진 에드워드 머로가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소련과도 장기적 협력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루스벨트주의자들에 대항해 소련과의 즉각적인 전쟁 준비를 옹호하는 입장을 대변했다. 1888년 창간된 이 주간지는 이미 큰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이 가상 전쟁 기사로 인해 판매량이 50만 부 늘어난 390만 부를 기록했다. 기사가 나간 뒤 수만달러의 후원금이 쏟아져 들어왔고 광고 수익도 두 배나 늘었다.

싸울 뜻 그다지 없었던 미국과 소련

이 시나리오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격화된 반공 및 반소 전면 전쟁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당시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편집자는 서문에서 “우리가 서술한 전쟁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한 판타지나 억지 창안물이 아니”라고 뻗대었으며 소련이 전체주의에 사로잡혀 유럽을 철의 장막으로 쪼개고 있는 한 “내일 당장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소련과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도 충격적이다.

1945년 2월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회담을 열었다. 통상적으로 이 얄탸회담을 시작으로 동서 냉전이 시작됐다고 본다. 한겨레

1945년 2월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회담을 열었다. 통상적으로 이 얄탸회담을 시작으로 동서 냉전이 시작됐다고 본다. 한겨레

이 시나리오는 냉전 초기 양 대결 진영의 심리적·정신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이 언제든 ‘자유 진영’을 공격하며 자신의 제국을 팽창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다. 그러나 최근 냉전사 연구가 밝혀주듯이 냉전 초기, 즉 1947년부터 1955년까지 소련은 그 어떤 팽창 의도도 갖지 않았고 매우 절제된 외교정책의 수행자였다. 전후 폐허로부터의 경제 재건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던 소련은 미국의 도움과 서유럽과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시종 독일 분단이나 공산주의 동독을 원하지 않았다. 독일이 군사적 중립을 통해 통일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소련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다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보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고자 봉쇄에 매달렸다. 동유럽에서 자유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고 티토 같은 이질 세력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련 자국의 안보 위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 번이나 독일의 침략을 받아 세계대전을 직접 경험하며 막대한 피해를 겪었던 소련은 향후 자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전략적 완충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전쟁 승리에 대한 결정적 공헌으로 소련이 그럴 만한 자격과 지위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팽창 계획과 침략 의도가 아니라 안보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소련 세계 정책의 관건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소련의 팽창 시도를 걱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 진짜 전쟁 위험은 미국의 세계 지배 정책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니콜라이 노비코프는 1946년 9월27일 본국으로 보내는 전문에서 미국의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세력이 세계 정복을 도모하며 소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알렸다. 물론 이 또한 미국과 ‘자유 진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나타난 상황 인지의 실패와 오해의 한 예에 불과했다. 미국 또한 냉전 초기에 명료한 외교정책을 확고히 갖고 있지 않았고 소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를테면 1947~48년 영국과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 즉 어니스트 베빈과 조르주 비도가 대서양동맹을 제안했을 때 트루먼 행정부는 주저했을 뿐이다. 당시 미국 정치 엘리트들은 전통적인 유럽식 권력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이상주의적 면모도 보였지만 군비 지출에 대한 부담을 우려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미국은 애초 소련에 대한 전쟁은커녕 서유럽 국가들과의 군사동맹 결성에도 신중했다.

두려움이 불러온 오해

그러나 주저와 신중함을 날려버린 것은 상대 진영에 대한 두려움과 오해였다. 군사적 예방 전략과 초기의 소극적 방어 구상은 ‘안보 딜레마’ 논리를 통해 곧장 공포와 오해의 악순환을 이끌게 마련이었다. 적대 세력으로부터 자국과 자기 진영의 방어를 위해 안보를 강화하면, 곧장 그 적대자로 간주된 타국과 타 진영 또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되며 그들 또한 안보 강화를 위해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 두려움과 오해의 악순환 메커니즘에서 각 진영은 상대 진영의 어떤 행위도 합리적으로 인지하기 어렵다. 상대 진영의 선한 의도나 진정성 있는 제안은 그저 ‘선전 술책’이나 ‘음험한 의도의 가상’으로 간주된다. 이제 상호 간의 이성적인 정치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냉전이 발생하고 지속된 근본 원인은 이렇듯 공포와 오해의 악순환 때문이었다. 전통주의자들이 폭로하듯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소련의 세계혁명 시도도 아니었고, 수정주의자들이 분석하듯 미국의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와 헤게모니 전략도 아니었다. 냉전을 특정 진영과 국가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물론 공포와 오해가 냉전의 근원이라고 해서 냉전의 모든 갈등과 적대가 상호 간의 의사소통 문제로 충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냉전사 연구는 ‘자유 진영’(자본주의 국가들의 자기규정)과 ‘평화 진영’(공산국가들의 자기규정)이 상대 진영에 대해 비합리적 감정인 공포에 갇혀 서로에 대한 나름의 ‘선한 의도’를 얼마나 놓치고 말았는지를 풍부히 보여주고 있다.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적 이미지에 고착해 공포를 강화하는 데 언론이나 지식인의 무책임한 전쟁 시나리오는 항상 효과적이다. 한 진영의 사회가 공포와 오해의 악순환 메커니즘을 내재화하면, 실제 상대 진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제안을 하는지는 더 이상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치 자폐증 환자와도 같이 외부의 어떤 말 걸기와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자신의 창조물인 그 적대성에 혼자 매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폐적 적대성’이다. 게다가 그것의 궁극적 귀결은 외부의 적을 이롭게 하는 사회 내부의 적을 찾아 분쇄하는 것이다. 1954년 뒤늦게 언론인 머로는 반공주의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싸우며 사회 내부로 향한 그 자폐적 적대성을 잠재우려 용을 썼다. 그렇지만 의 핵전쟁 시나리오 작성에 참여한 일부 다른 저자들은 머로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언론을 통한 전쟁 시나리오의 남발이나 지식인들에 의한 정치적 공포의 생산과 유포는 1960년대 중반까지 완전히 잦아들지도 않았다.

냉전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1952년 3월10일은 월요일이었다. 그날 스탈린은 폭탄을 든 자객을 유고슬라비아로 보내는 대신 영국과 미국, 프랑스에 중립화를 전제로 한 독일 통일과 유럽 냉전의 종식을 제안했다. 아, 지금 또 다른 가상 소설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는 말이다. ‘스탈린 각서’라는 이름의 협상안이었다. 비록 아직 한국전쟁 중이었지만, 또는 달리 본다면 한국에서 여전히 전쟁 중이었기에 유럽에서라도 평화 질서를 찾아보자는 소련의 구상이었다. 훗날 냉전사가들이 밝혔듯이, 그것은 진정성을 가진 제안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정치가들은 아예 응하지 않았다. 역사적 가능성으로 다가온 평화의 기회를 타진하는 대신 그들은 모두 에 열심히 코를 박았다. 가상의 공포와 오해에 매달리며 냉전의 세월은 그렇게 깊어갔다. 이게 남의 일인가? 오랜만에 종편 채널이나 틀어볼까!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