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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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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몽유병자를 가둬라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맞아 독-프 평화성명서 채택… 과거 청산 없이
대립·갈등 팽배한 아시아가 장위안의 소망대로 유럽연합처럼 될 수 있을까
등록 2014-12-10 07:11 수정 2020-05-02 19:27

지난 12월1일 방송된 (JTBC)에서 중국 청년 장위안은 울었다. 이유는 독일 청년 다니엘이 독일의 과거사를 반성하며 심지어 1차 세계대전도 “독일이 잘못했다”고 ‘개념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장위안은 “잘못을 인정하는 독일의 태도에 감동받았다”며 눈물을 보이며, “ 이전에는 마음이 닫혀 있었는데 이젠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가벼운 말장난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장위안은 계속 서툰 발음으로 “우리 언젠가는 국경선도 없는 날이 오고” 결국에는 “아시아도 유럽연합처럼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잘못 인정하는 독일 태도에 감동”
중국 ‘대표’ 청년이 가슴으로 쏟은 이 발언은 아마도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은 올해 지구상의 수많은 화해 담화와 평화 언설에 묻혀 곧 잊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아시아의 우리가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시사하는 흔치 않은 장면이었다. 한반도의 냉전 긴장에 더해 일본의 식민주의 과거 청산의 지체와 후퇴, 동북아 전역을 감싸고 있는 국민국가의 민족주의적 갈등과 영토 분쟁은 동아시아 청년들로 하여금 국민국가 간 화해를 넘어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는 유럽을 부러워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자국의 입장을 강변하고 자민족의 위용을 자랑하며 타국을 질타하거나 타민족과의 경계를 설정하기 바쁜 우리 동아시아인들에게 자국의 오류와 범죄를 냉정히 인정하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민족사를 오히려 국민적 정체성과 집단적 역사의식으로 발전시킨 독일인과 유럽인의 모습은 부럽고 신기하다.
1990년 11월19~2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 참가국 정상들은 ‘새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의 도입부에서 “유럽의 대결과 분열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 평화 선언은 단순히 냉전 대결의 종식만이 아니라 근대 유럽의 국민국가 간 오랜 적대의 종결을 의미했다. 유럽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선언의 역사적 무게와 깊이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오른쪽)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지난 8월3일 격전지였던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역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행사에서 만나 서로를 껴안았다. 과거 적국 관계였던 두 나라는 세계 전역에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REUTERS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오른쪽)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지난 8월3일 격전지였던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역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행사에서 만나 서로를 껴안았다. 과거 적국 관계였던 두 나라는 세계 전역에 평화를 촉구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REUTERS

사실 지구상의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유럽은 역사상 더없이 격렬하고 잦은 전쟁터였고, 종교·인종·왕조·국가·이념 등을 둘러싼 갈등과 불화의 핏빛 교차로였다. 유럽 대륙의 오랜 적대와 갈등은 누적되고 상승돼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대전’(Great War)으로 정점을 찍었다. 아울러 세계가 처음 경험한 그 ‘대전’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발원지였고 2차 대전과 냉전을 비롯한 20세기 모든 갈등과 전쟁의 ‘원천적 재앙’이었다. 32개 국가가 ‘총력전’으로 참전한 1차 대전은 그 규모와 양상에서 모두 방대했으며 충격적이었다. 대략 1천만 명의 군인과 6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부상자도 2천만 명이 넘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2085억달러 이상의 비용이 지출되었다. 게다가 1차 대전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1차 대전은 정치와 경제, 군사와 기술, 사상과 심성, 일상과 문화, 기억과 재현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혁명적 충격을 가해 ‘현대사’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100주년을 맞아 올해 유럽은 1차 대전을 주제로 한 다양한 정치 행사로 바빴다. 가장 상징적인 행사는 단연 지난 8월3일 독일의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과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비에이 아르망(독어 지명은 하르트만스빌러코프)의 전몰자 묘지에서 함께 거행한 1차 대전 기념식이었다. 1914년 8월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그 다음날 프랑스 총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군은 1870~71년 보불전쟁 때 뺏긴 알자스 지역의 도시와 거점을 수복하고자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나갔다. 비에이 아르망은 해발 1천m의 고지로서 알자스 지역의 콜마르와 라인강 자락의 뮐하우젠 사이에 위치한 군사전략의 요충지였다. 1914년 여름부터 1918년 종전 때까지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이 ‘죽음의 고지’를 8번이나 서로 번갈아 점령하며 양쪽을 합해 최소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평화의 성지’가 된 ‘죽음의 고지’

전쟁과 폭력은 단 한 번의 역사로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격전지에서 곧 황량한 묘지로 변해버린 비에이 아르망은 1차 대전 뒤 독일과 프랑스 양쪽 모두에 새로운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특히 1932년 알베르 르브룅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의 관심과 후원으로 프랑스 군인에 대한 추모비와 납골당이 안치되면서 이곳은 프랑스의 공식적인 1차 대전 기억과 전몰자 추모의 핵심 장소로 명성을 얻었고 반독일 민족주의 신화의 거점이 되었다. 2차 대전으로 나치 독일군이 이 지역을 다시 점령했을 때 상황은 다시 긴급했다. 나치 군인들은 반독일 프랑스 민족주의 성지인 이 납골당을 아예 폭파해버릴 작정이었다. 폭파를 준비하던 독일군에게 프랑스인 시장이 화급히 달려왔다. 그는 독일군 장교들에게 납골묘에는 프랑스 군인들만이 아니라 수천 명의 독일군도 함께 묻혀 있다며 폭파하지 말 것을 설득하고 사정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 독일-프랑스 공동의 묘지에는 전후 줄곧 매년 2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발을 디뎠다. 지난 8월 이제 바로 그 장소에서 양국 정상은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는 오랜 적도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것이 죽은 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산 자의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라며 세계 만방에 모든 적대와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와 화해의 이 모범을 따를 것을 제시했다. 추모를 끝낸 프랑스와 독일의 두 대통령은 자리를 옮겨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박물관과 추모지 건립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박물관에 게시할 평화성명서는 정치가나 학자들이 아니라 양국 청년들이 함께 마련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100명의 청년들은 그곳에 미리 모였다. 그들은 세미나를 개최해 함께 토론한 뒤 다음과 같이 평화 텍스트를 만들었다.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전쟁 상황에 직면해 너희들은 외국인에 대한 적대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모든 이들을 위한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결속하고 외국어를 배워라. 네 자신의 경계를 극복하라.”

1차 대전의 전선 경험을 다룬 레마르크의 소설 의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우리는 18세였고, 이제 막 세상과 존재를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이제 그것을 향해 총을 쏘아야만 했다” “최초의 격렬한 포화를 뚫고 나가는 동안 우리는 곧 오류를 알았다. 우리가 배운 세계관은 그 포화 밑에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고 절규했다. 이 ‘전쟁체험세대’의 절망과 공포에 대해 100년이 지난 오늘 독일과 프랑스의 ‘평화 세대’들은 민족주의나 국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 적대에 대항해 싸워야 함을 강조하며 평화주의로 제대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출세의 기반이나 스펙의 과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소통의 도구로 외국어 학습을 제시한 것도 인상적이다.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정치가와 청년들이 함께 준비하는 이 공동의 역사박물관은 3년 뒤인 2017년 8월 초에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데 정치 지도자 못지않게 올해 1차 대전 100주년 행사로 누구보다 바빴던 이들은 바로 역사가였다. 올 한 해 유럽에서 1차 대전에 대한 학술행사는 넘쳤고 새로운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제시한 연구성과가 많았다. 특히 1차 대전의 원인을 둘러싼 토론은 주목할 만했다. 에서 독일 ‘대표’ 다니엘이 보여준 대로, 독일에서는 오랫동안 2차 대전은 물론 1차 대전의 발발도 독일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1차 대전 직후 한동안 유럽 각국은 교전 상대국에 전쟁 발발의 책임을 전가했지만, 1960년대 이후 비판적 독일 역사가들은 다른 국가와 달리 독일이 분명한 전쟁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었다며 자민족사 비판의 흐름을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올해 유럽에서 발간된 1차 대전 연구서는 대부분 독일의 단독 책임을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독일뿐 아니라 세르비아와 러시아, 심지어 프랑스와 영국도 모두 협량한 국가 이익과 자존심 및 무책임과 오판으로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울러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제 전쟁 발발을 전쟁 전의 적대적인 두 세력권, 즉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과 영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협상국 간 동맹 체제의 대립과 긴장 고조가 낳은 ‘필연적’ 결과로 보는 인습적인 해석도 거부한다. 이를테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영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클락은 전쟁 발발을 유럽 강대국들 간의 불화라는 구조적 틀보다는 발칸 지역 분쟁을 비롯한 여러 우발적 요인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오판과 오류의 연쇄 탓으로 보았다. 정치 지도자들의 선택과 결정이라는 ‘우발적’ 요인이 더 결정적인 전쟁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제국주의 팽창과 군비 경쟁, 동맹 체제의 경직화와 내부 불신 등은 구조적으로 전쟁을 조장하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과학 발전과 인적 교류의 증대, 국제무역의 증대와 외교적 협력의 진전 및 평화 사상과 평화운동의 대두는 역으로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특히 1차 대전 직전 10여 년은 유럽 지식인과 정치가, 사회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평화의 발명’ 시기였다. 알프레드 노벨은 평화상을 제정했으며,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민족 간 상호 이해와 평화를 제창하며 근대올림픽을 조직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이미 두 차례나 큰 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되었고, 국제 사회주의 운동은 반전운동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베르타 폰 주트너가, 미국 시카고에서는 제인 애덤스 같은 여성들이 평화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해 큰 공감과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제국주의 국가 권력자들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에서의 위기와 충돌을 조정하며 전쟁을 막는 연습을 수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새로운 1차 대전 연구의 결과는 유럽 각국의 일반 대중이 민족주의적 열정에 취해 전쟁에 열광적 지지와 동참을 보였다는 인습적인 주장을 뒤집는다. 물론 의 칸토레크 선생처럼 ‘조국 수호’ 전쟁의 의미에 취해 학생들을 선동해 전장으로 내몬 지식인과 전쟁 발발 직후 유럽 각국의 도시에서 터져나온 열광적 지지의 함성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의 결과는 그와 같은 전쟁 지지와 동참의 열기가 도시 거주자와 중간계급, 특히 대학생들과 교양 계급에 국한된 현상임을 한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각국 정부와 언론이 그 제한적인 전쟁 지지 열기를 오히려 과장하고 악용했음이 다양하게 밝혀졌다. 심지어 (대)학생들과 일부 사회계층의 적극적인 전쟁 참전 동기도 노골적인 민족주의 감정의 광기였다기보다는, 호기심과 일탈의 충동 또는 경제적 동기와 이성적 의무감 정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에 대다수 역사가가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제 ‘전쟁 열병’과 ‘민족주의 맹신’에 빠진 대중 여론, 즉 ‘1914년의 정신’에 의해 정치인들이 떠밀려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는 흔한 인식도 수정되어야 한다. 오히려 대중은 전쟁을 어쩔 수 없이 수용했을 뿐이고 3개월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뒤 역사가 보여주듯, 전쟁은 장기적 참화로 이어졌고, 대중은 곧 전쟁에 염증을 드러냈고 반전 평화 지향으로 집결했다.

몽유병자 된 권력자들이 만든 지옥

이렇듯 전쟁이 구조적 요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대중의 광기에 조응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시대정신의 귀결도 아니라면, 결국 전쟁 발발의 핵심 원인은 1914년 6월28일 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 뒤 7월 한 달 동안 각국 권력자들이 보여준 상황 인지의 실패와 조정 능력의 부족 탓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100주년을 맞아 1차 대전을 새롭게 분석한 역사가들은 당시 유럽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야망과 편견, 무능력과 통찰력 부족 등을 가장 모질게 질타한다. 역사가 클락은 그 권력자들을 “눈은 뜨고 있지만 보지는 못하는 몽유병자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마겟돈’을 만들어 폭력과 파괴의 소용돌이로 대중을 내몰았다.

결국 장위안의 희망처럼 동아시아 청년들도 21세기 유럽의 청년들처럼 ‘국경의 장벽 없이 넘나들고 서로 마음을 열’ 수 있으려면, 동아시아 곳곳에서 출몰하는 ‘20세기 몽유병자들’을 꽁꽁 묶어두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아 물론, 이곳에는 몽유병자가 너무 많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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