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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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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역 박영규, tvN ‘삼국지’?

프랑스인이 모두 영어 대사를 읊는 신기한 드라마 <삼총사>,

드라마를 보며 유럽연합과 동북아 공동체의 가능성을 비교해보네
등록 2015-01-17 06:39 수정 2020-05-02 19:27
BBC one

BBC one

프랑스인 다르타냥이 영국 BBC 텔레비전 화면을 휘저으며 칼싸움을 하다니.

영국 공영방송인 BBC가 새해 들어 새로운 드라마를 내놓았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사진)다. 정확히 말하면, 이 드라마는 지난해 3월 처음 선보인 뒤, 새해 들어 두 번째 시즌이 시작됐다. BBC가 프랑스 작품을 수입한 게 아니라, 자체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니 연출자도 배우도 모두 영국인인데, 배경은 17세기 프랑스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모조리 프랑스어다. 이를테면 에서 ‘그레이’ 역으로 온몸에 문신을 내놓고 뛰어다니던 영국 배우 루크 파스콸리노가 이 드라마에서 다르타냥으로 변신했다. “근데?” 연구실 옆자리에 앉은 사라-제인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영국인의 눈에는 딱히 새로울 것이 없나보다. 그게, 같은 방을 쓰는 동아시아인의 눈에는 신기했다. 아마도 한국인이 지금껏 나 을 만든 적은 없기 때문인 듯했다. 물론 우리 이웃나라들도 한국 의 일부라도 극화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영국인들이 보이는 문화적 융통성이 촌스러운 이방인의 눈에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에 등장하는 모든 ‘프랑스인들’이 천연덕스럽게 영어 대사를 읊는 동안, 극중의 ‘스페인인들’은 또 당연하다는 듯이 스페인 대사를 하는 장면도 어이가 없이 흥미로울 뿐이었다. 영국 시청자의 눈에서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계는 이런 식으로 종종 흐려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궁금해서 검색해보았다. 영국인들은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외국 작품을 날것 그대로 들여와서 영어권 배우들로 채웠다. 2000년에는 BBC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을 만들었는데, 주연으로는 프랜시스 오코너가 프랑스인 유부녀로 등장했다. 이 여배우를 모르는 이라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에서 로봇소년 데이비드의 엄마로 등장했던 이를 떠올리면 된다. 이듬해인 2001년에도 BBC는 톨스토이 원작의 를 만드는데, 유튜브에서 지금도 떠도는 동영상을 보면, 당시만 해도 주름이 쫙쫙 펴진 앤서니 홉킨스가 약간은 촌스러운 러시아식 옷을 입은 주인공인 피에르로 등장했다. 배경과 이름은 러시아인데, 대사는 영어다. 그 밖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이나 톨스토이의 같은 작품들도 BBC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이런 융통성의 저변에는 어쩌면 영국인과 함께하는 ‘유럽인’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게 됐다. 혹은 역으로 이런 문화적 이식이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고 다듬는 계기가 되겠다는 인상도 받았다. 유럽연합(EU)이라는 공동체는 이런 토대 위에서 태어났겠구나 싶었다.

생각이 동아시아로 건너오면서 공상에는 날개가 붙었다. 만약 북한과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로운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우리도 BBC의 사례를 실험적으로 좇으면 어떨까. 이를테면 김윤석이 오다 노부나가, 박영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할을 맡은 이 tvN 제작으로 전파를 타거나, 아니면 천호진이 제갈량, 정진영이 주유 역할을 맡은 같은 드라마가 나오면 어떨까. 아니면 적어도 한동안은 어렵겠지만, 송강호가 마오쩌둥 역을 맡고 백윤식이 저우언라이로 분한 은 어떨까. (이게 가능한 날이 온다면, 사골국물처럼 끊임없이 우려내는 장희빈 이야기도 한 10년 정도는 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교나 한자 덕분에 문화적 정체성이 비슷하면서도 동북아에서 유럽에서와 같은 문화적 넘나듦이 드문 것을 보면, 동북아 공동체의 가능성도 그만큼 멀리 있다는 뜻인 것 같다.

버밍엄(영국)=김기태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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