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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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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애도

등록 2014-05-21 05:35 수정 2020-05-02 19:27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겪고 있을 고통의 심연을 충분히 헤아릴 수 없기에, 나의 슬픔과 분노가 그들을 앞질러 흘러넘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게 된다. 예정된 결론을 향해 무참히 달려가는 시간의 바퀴 속에서 ‘기다릴게’라는 의미의 노란 리본을 다는 일이 행여 나의 죄책감과 무력감을 달래려는 의례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한 명이라도 더 살아 돌아오기를 바랐던 실낱같은 희망이 지독스럽게 부서지는 동안, 닥쳐온 낙담 앞에서도 서성거렸다. 그들이 빼앗긴 세계는, 살아남은 이들이 앞으로 겪어내야 할 악몽과도 같을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기에 낙담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책임의 애도, 재구성의 애도, 기억의 애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참사 이후 한 달이 지난 지금, 희생자들이 겪은 상실과 고통의 시간을 온전히 애도한다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이 갈수록 깊어진다. 애도가 ‘그저 슬퍼하기’가 아니라 산 자들의 ‘응답’이라면, 애도에는 책임의 애도, 재구성의 애도, 기억의 애도가 포함돼 있는 것 같다. ‘구조를 하라니깐 구경을 하고 조사를 하라니깐 조작을 하는’ 국가의 속살을 꿰뚫고 명확한 책임을 묻는 일을 ‘책임의 애도’라 부를 수 있다. 언론 보도를 통제하려는, 애도의 공간을 분향소에 한정시키려는, 사회적 애도의 발언을 유언비어로 단속하고 법률로 금지하려는 정부의 행태를 보면 책임의 애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수장’시킴으로써 이윤을 챙겨온 자들이 정작 책임으로부터는 가장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현 시스템을 바꾸는 일은 ‘재구성의 애도’라 부를 수 있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산 자들이 엮어갈 역사 속에 오롯이 새긴다는 의미에서 애도의 한 과정이다. 이 모든 애도가 충실히 이뤄지려면 참사의 의미와 희생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하는 ‘기억의 애도’가 필수적이다. 애도의 방식에는 희생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살아 있을 동안의 관계가 표출될 수밖에 없기에, 우리의 애도가 희생자들을 정의롭고 평등하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꽃다운 아이들의 죽음’으로 이번 참사를 호명하는 일은 적절한가. 단지 아이들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의 희생이 가려진다는 얘기만은 아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세월호에 승선한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이 ‘노동자’가 아닌 ‘만 19살’임을 강조함으로써 간신히 애도의 자격을 얻었다. ‘땡빚’을 내어 마련한 화물트럭은 수장되고 간신히 살아남은 화물노동자들은 사고의 악몽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생계고에 시달리면서도 입도 뻥긋 못할 처지에 몰려 있다. 죽음과 상실에 등급을 매길 때, ‘꽃다운 아이들’로 희생자됨의 자격을 제한할 때, 우리는 뜻하지 않게 희생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을 다시금 희생시키는 폭력에 가담하게 된다.

어른들만 각성하는 문제라면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아이들을 살려내라’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아이들’을 희생으로 내몬 ‘타락한 어른들’을 제어하지 못한 ‘어른 일반’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게 되면, 정치적 책임보다 어른의 복원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린다. 어른들이 각성할 문제가 되는 순간, 살아 있는 ‘아이들’은 침몰하는 배에서의 주문처럼 다시금 ‘가만히 있음’을 강요받게 된다. 장차 ‘아이들’에게 어떤 사회를 물려줄 것인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가 중요해질 뿐, 지금 당장 ‘아이들’에게 어떤 정당한 자리를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구호에만 머무를 때, 살아 있는 ‘아이들’은 현재 삶의 고통과 무관하게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할 처지가 된다. 무엇보다 죽은 ‘아이들’을 그저 참사의 비극성을 높이는 상징으로만, 어른들의 잘못을 일깨우는 거울로만 소비할 위험이 크기에, 뜻하지 않게도 그 죽음의 존엄성을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애도의 평등, 애도의 정의(正義)를 고민하지 않는 한, 온전한 애도로부터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희생자들의 정당한 자리를 빼앗는 애도는 또 다른 죽음의 시작이기에.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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