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애들은 가라?

등록 2014-04-14 05:15 수정 2020-05-02 19:27

오늘날 우리가 가진 ‘아이다움’에 대한 관념과 아동기에 부여된 발달 과업이 근대에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은 제법 알려져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조선시대 윤리는 당시 사람들이 일곱 살을 성적 실천이 가능한, 몸집만 작을 뿐 성인과 다름없는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증거다. 반면 오늘날 남녀부동석의 규범적 시기는 ‘2차 성징’이 나타나는 나이로 늦춰졌다. 1832년 6월항쟁을 주 배경으로 한 에 등장하는 꼬마 혁명가 가브로쉬는 “우리는 예전에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지금은 빵을 위해 싸우네”라고 노래한다. 시대를 꿰뚫는 통찰이다. 누구도 그에게 ‘애들은 가라’와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는 전우(戰友)로 대접받았다. 오늘날이었다면 아동학대라는 비난이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보호권력의 양극단

1

1

생각해보면 이런 사고와 행동 양식은 놀랍도록 모순적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타락하고 오염되는 성인들이 외려 아이들 보호를 자처한다는 모순이 첫 번째고, ‘순진무구함’의 허상에 기댄 보호만 강조되다보면 정작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보호는 실현될 수 없다는 모순이 두 번째다. 순진무구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아이들의 행동은 놀랍도록 많지만, 대개 비난 또는 교정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아이다움’의 틀이 외려 눈앞에 있는 구체적 존재에 대한 다채로운 이해를 가로막는 셈이다. 순진무구는 미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다보니 보호를 제공하는 자에게 보호의 내용과 범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특권이 주어질 위험이 크다. 이때의 보호는 자유·동등성의 헌납을 대가로 요구하는 권력체계로 전환된다. 이를 보호와 구분해 보호주의 혹은 보호권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보호권력에는 양극단이 존재한다. 찰스 디킨스의 에서 올리버는 다름 아닌 ‘아동보호소’에서 학대와 착취에 시달렸다. 형제복지원도 보호권력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너무도 우아하고 성실한 보호권력도 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등장했던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아무런 정치적 힘도 없는 아이들이 왜 정치권력의 잘못이 부른 피해를 뒤집어써야 하느냐는 맥락에서는 의미가 있는 구호다. 그러나 실제 촛불집회를 점화했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던 아이들을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만 한정짓고 ‘우리’로부터 밀어내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최근 SBS 드라마 에서도 엄마 김수현은 딸 샛별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정작 딸에게는 자기 운명에 몰아닥친 위험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홉 살 딸은 엎어지고 휴대전화나 잃어버리는, 그저 엄마의 애간장을 녹이는 존재로 등장한다. 아이가 무력해진 만큼, 아이를 지켜야 할 엄마의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우정의 보살핌’ 관계들

최근 ‘아이들을 위해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탈핵·생태 운동의 구호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 구호가 순진무구함이라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아이=내 자녀’라는 가족주의에 호소하며, 아이들을 참여나 연대의 주체에서 배제해버린다는 청소년운동의 비판을 언짢아하는 이가 꽤 있는 모양이다. 이 논쟁이 아이로 분류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려면 최소한 두 가지 태도가 절실해 보인다. 하나는 우리 모두가 근대사회가 아이를 대하는 양식의 자장(磁場) 안에서 살아왔고, 청소년운동은 바로 그 양식이 낳은 폐해에 대한 도전을 업으로 삼는 운동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보호의 제공을 일방화·특권화하지 않는 ‘우정의 보살핌’ 관계가 생각보다 많고, 이 관계가 보호를 주는 이나 받는 이에게 더 큰 기꺼움을 선사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일이다. 나이 어린 사람과도 우정의 보살핌, 동등한 관계 맺기는 가능하다. 아이를 키운다, 지켜준다에서 함께 자란다, 함께 지킨다로 태도를 바꿀 수만 있다면.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