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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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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앞에서도 의심하라

등록 2009-09-10 01:29 수정 2020-05-02 19:25

개학과 함께 신종 플루의 고위험 지대로 학교가 급부상했다. 개학 후 첫 업무는 방학 중 다른 나라를 방문한 학생이 있는지 조사하고, 열이 있는 ‘의심 환자’들을 귀가시키는 것이었다. 어떤 학교는 개학을 늦추고, 어떤 학교는 휴교를 단행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교문은 다시 열렸지만 전과 같지 않은 것이 많다. 여름 내내 준비했던 축제는 취소되거나 축소됐다. 각종 수련회는 당연히 없었던 일이 돼버렸다. 등교하는 전교생의 체온을 재고 안전이 확인된 학생만 교실로 보내기도 한다. 화장실에는 손소독제가 설치됐다. 아예 학교 문을 걸어잠그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아침저녁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신종 플루가 더 창궐할 것이라는데,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라면 한두 번이라도 이런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위험 앞에서도 의심하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위험 앞에서도 의심하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예방접종

갑자기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풍경이 있다. 우리는 전교생이 한 줄로 길게 줄을 서서 예방주사를 맞았다. 뇌염·콜레라·장티푸스 등 날씨가 더워지면서 예방해야 하는 병들은 왜 그리 많았는지. 예방접종은 한 해에도 몇 차례나 실시됐다. 예방접종을 원하느냐고 나의 의견을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삿바늘 하나로 여러 명에게 예방접종을 했는데, 그것을 문제 삼는 이도 없었다. 나중에는 조금 진화된 형태의 기계 주사가 나타났는데, 바늘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살짝 약물만 주입하는 주사라 했다. 우리는 그것이 돼지에게 주사 놓는 기계라고 굳게 믿었다.

어떻게 그토록 비위생적이고 강압적인 예방접종이 별다른 저항 없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원래 별다른 저항이란 것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과정이야 어찌됐든 그래도 병에 걸리는 것보다는 낫다, 라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본래 커다란 위험 앞에서는 소소한 문제들은 꼬리를 내린다. 장티푸스·콜레라의 위험 앞에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예방접종을 위해 소매를 걷어올린 것처럼. 분명한 대의 앞에서도 작은 의문들은 일단 고개를 숙인다. 신종 플루 예방이라는 대의 앞에서 우리 스스로 신종 플루의 위험 정도나 예방 수칙에 대한 의심을 철회한 것처럼.

때때로 우리 스스로 접어둔 소소한 문제들과 작은 의문들이 실은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몇몇 나라에서는 충치를 예방하기 위해 수돗물에 불소를 포함시키도록 하는 수도물 불소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수돗물만 마셔도 충치가 예방된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어떤 연구들은 불소를 과잉 섭취하면 만성적 골격불소증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골격불소증은 뼈를 약화시키고 관절염을 일으킨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돗물 불소화를 쌍수 들어 환영하기 전에 일단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신종 플루를 예방하기 위해 축제나 수련회가 취소되는 것에도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물론, 알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장시간 노출되는 것을 막는 것은 인플루엔자 전염 예방을 위해 필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것이 그토록 위험하다면, 꼭두새벽부터 학생들이 교실에 모이도록 만드는 아침 자율학습도 금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늦은 시간까지 학생을 집단적으로 학교에 남아 있게 만드는 야간 자율학습이나 방과후 수업도 함께 문제 삼아야 하는 것 아닐까? 공부를 하는 것은 신종 플루 감염의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으나 축제는 그럴 정도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까?

아침 자율학습과 축제의 차이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그 선택이 공정한지, 또 적절한지를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말 위험한 것은 이 위험을 너무 위험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신종 플루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의심만 많아 헛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흉보지 말라. 무지렁이도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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